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보호하고 실험한다. 사랑도 그렇다. 사랑은, 내가 살고 있는
세대와 삶, 그리고 내 자신을 위한 것.
나에게 사련(邪戀)이란 없다. '넌 그런 사람하고 사랑에 빠져선 안돼. 그 사람이 너하고
어울린다고 생각하니? 그런데도 넌 그 사람에게만 마음을 주는구나'라고 말하는 고모같
은 충고는 싫다. 나는 이 모든 게 인생을 끊어서 파는 일이라고 정의할 뿐이다.
그는 국제 변호사다. 나는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모른다. 들어도 모른다. 물론 그
직
함이 '국제적인' 변호사를 말하는 건 아니다. 전부터 쌓이고 쌓인 술 약속이 밀린 리포트
가 돼버리자, 삽으로 갈아엎듯 내가 전화를 했다. 써야 할 원고를 끝내고, 지압 한 번에
십이지장 궤양을 날려버린 기분이 든 오후 다섯 시였다. 오늘 누구 만나기로 했는데, 같
이 만나지 뭐. 누구 데려올 여자 없어? 2급 한량다웠다. 여자야 많죠. 나는 웃었다. 나는
윤에게 전화를 했다. 술 마시는 자리 있음 아무 때나 연락 달랬지?
저녁 8시, 우리는 센서로 반응하는 테헤란로 그의 사무실에서 잠시 그를 기다리고
있었
다. 그래픽적으로 정의된 실내엔 지하 창고에서 나는 사과 냄새가 느껴졌다.
응접실과 떨어진 다른 방엔 마흔이 넘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스모크 햄 빛깔의 입술이
오렌지색 눈처럼 공격적으로 느껴졌따. 물론, 입술, 눈, 뺨을 장밋빛으로 통일하라는 법
은 없다. 나는 양가집이 모두 나온 약혼 자리에서 얕보이지 않기 위해 없는 위엄 불러오
자고 마른 기침을 해대는 친정 아버지처럼 1초 동안 그녀를 째려보았다.
어이구, 얼굴 보기 힘든 분 오셨네. 근데 살 빠진 거야, 찐 거야? 그가 과장되게 웃으며
팔을 벌렸다. 빠지건 찌건 그 낯짝에 땡빛이죠. 내가 자해했다. 그가 내 뺨을 꼬집더니
옆방의 스모크 햄 빛깔의 입술을 불렀다. 그녀는 그의 불어 개인 교수. 영어를 불어로도
동시에 통역 가능하다고 소개하는 그의 목소리가 처음 잠자리를 함께 한 소녀 얘기를
하는 소년처럼 들떴다. 아, 나이를 듣긴 들었는데, 몰라봤어요. 퀵 서비스인 줄 알았어요.
일행이 될 줄 몰랐던 그녀가 완벽한 잇몸을 보이며 웃었다. 내가 봐도 남극 탐험을 떠나
는 사람처럼 입기가 잘못이었다. 나는 윤을 소개했다. 그림 그리는 친군데요, 파리에서
공부했어요. 나는 그녀가 고급 문화의 요새 속 쟁쟁한 사람들 사이에서 집에서 십자수나
놓을걸, 후회막급일 것 같아서 일단 파리부터 운운하고 봤다. 내 자신, 사회 부적응자들
목록에 첨가된 지 오랜데, 그것과 가장 가까운 듯 보이는 용의자를 곁들이려다가 윤을
곤란하게 한 건 아닐까. 평생을 재봉틀 앞에서 보내고 싶은 소녀처럼, 윤은 말이 없었다.
짙게 선팅을 한 그의 에쿠우스 안에서 우리는 몇 가지 논의를 거친 끝에 청담동의 그의
단골 바에 갔다. 라디에이터에서 뿜어대는 열기가 숨을 멎게 하는 바였다.
그는 그녀와 건너편 테이블에 앉았다. 그녀의 겹쳐진 옷 주름은 몸에 의해 만들어진
것
처럼 아주 자연스러웠다. 그녀에게는 남자를 이끄는 풍만한 몸의 굴곡이 없다. 몸이 빈
약할수록 지적으로 보이는 건 남자만의 관점일까.
우리는 일단 맥주를 시켰다. 안주는 낙지볶음. 나, 낙지 못 먹는데. 그녀가 얼굴을
찡그
렸다. 놀구 있네, 하고 나는 생각했따. 그래? 그럼 뭐? 그가 화들짝 놀라자, 그녀는 그냥
먹죠 뭐, 하고 조금 원망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보세요!"
내가 그녀를 불렀다.
"네?"
"낙지 잘 먹는 사람이 독일어도 잘한대요."
"정말요?"
얼씨구. 촌색시 같은 그녀의 무지가 사랑스러운 듯 그는 보조를 맞추듯 그녀의 손을 잡
았다. 나는 그의 아내를 안다. 그러나, 지금 내 앞에서 그들은 연인일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둘에 관한 연애담 중 어떤 것, 순간에 머무는 것이라고 해도 나는 상
관없었다. 나에게 중요한 건 문 밖으로 나가는 것. 일단 문 밖으로 나가면 모든 게 좋아
지게 돼 있으니까.
과거에 수천 번도 더 사용했을 법한 추상적인 단어들을 늘어놓던 그의 입이 인권
이야
기에까지 이르렀다. 사랑에 빠진 여자들은 자비에 관한 얘기를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아메리칸 지골로가 인권에 관해 설교하는 게 웃기듯. 그러나, 그녀가 마르틴 루터 이야
기를 하자 나는 그녀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나는 섞여진 개념들의 희생자였다. 내 머리
에 다가오는 건 언제나 고갱의 '잔인하고 생생한 꿈'.
술이 들어가고 우리들의 얼굴빛이 크레파스처럼 색채를 띠기 시작하자, 그는 5초에 한
번씩 "아 유 오케이?" 하면서 그녀의 기색을 살폈다. 나는 여자를 매처럼(친절하건 아니
건) 감찰하면서 깨지기 쉬운 물건 다루듯 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 때부턴 그녀가
비스킷 한 쪽을 먹는 것만으로도 난리가 날 것 같았다.
그들은 대담하게 자신들의 모순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이것이 불안하고 초조하고
부딪치고 긁히고 난 뒤의 사랑일까? 이 모든 게 성스러운 광기인지 아니면 그냥 미친
짓인지 품평하고 싶지 않았다. 내게 그건 단지 '충동 조절 문제'일 뿐이다.
그는 노래하러 가자고 했다. 오랜만에 너, 노래 좀 듣자. 그녀가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나는 그녀가 좀 빈뇨증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카운터에서 술값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
는 언제나 그가 만난 여자들을 나에게 보여주었지만, 나는 정말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여자가 계산하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는
남자란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 또한 자신을 보호해 주는 남자를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여자도 자기 수입의 일부를 내야 하고, 그것이 공평하다고.
왜 괜한 짓을 하냐고 그녀를 책망하는 그에게, 판돌이 판순이들이 들어와 춤을 추며
페
트병에 콧김으로 바람을 집어넣는 몬도가네 가라오케는 가지 말자고 내가 말했다. 염려
마세요, 그런 데 안 가요. 그녀가 말했다. 언제 가 봤는데? 한국에 없었잖아. 그가 물었
다. 2년 전. 그녀가 대답했다.
신선한 버터 색깔과 칙칙한 블루가 섞여 있는 벽지가 현실적이면서도 뭔가 조금 지나친
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 방이었다. 우리는 커티삭과 맥주와 과일 안주를 시켰다. 그녀는
우리를 위해 폭탄주를 만들어 주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마시고 싶었던 술이 고량주가
아니라 폭탄주 같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빨리 취하지 않으니 조급증이 생겼다. 그녀와
나는 추격전을 벌이듯 술잔을 비우기 시작했다. 마구 먹어대고 싶은 충동을 다른 것으로
변형시키는 열정적인 미식가들처럼. 그러나 프로이트가 승화라고 이름 붙인 충동 억제의
형태와는 전혀 상관없었다.
"술에 대한 집착은 우뇌 앞부분의 종양이나 그 밖의 뇌손상 때문일 수
있어."
그가 말했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두뇌에 상처를 입거나 신체 기관이나
조직의 병리적 변화에 감염됐을지도 모르는 다른 술고래들이 딱해졌다.
"하지만, 뇌손상을 찾아낸다 해도 조미료 크기 정도일 텐데요 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다 한 번 휘청한 것을 신호로 <인디안 인형처럼>을 부르기
시작
했다. 그도 헌화가에 답을 하듯 유장하게 <보리밭>을 불렀다. 나는 뻔뻔하게 <황혼의 부
르스>를, 윤은 기어 들어가듯 <그대 내게 다시>를 불렀다.
실내는 어둡지만 오히려 밝은 햇볕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욕망은 죄책감과는
별개의 일이다. 문득 혈청이 신경 끝을 누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헤모글로빈 속에 함
유된 피를 빨갛게 보이게 만드는 산소가 줄어들면서 칙칙한 빨간 색, 푸른 색, 보라 색,
그리고 마지막엔 노란 색으로 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몹시 취했다. 이젠 처음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고 나는 생각했다. 가라오케 반주만
계속 들리기 시작했다. 모두 노래를 멈추었다. 어쩐지 술잔이 깨끗하게 닦인 기분이 들
었다. 소파에 앉은 채 그녀를 깊게 껴안고 있다가 가끔 뺨에도 입을 맞추던 그가 일어나
<마이 퍼니 발렌타인>을 부르기 위해 일어섰다.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너무 행복해서요."
정강이가 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삶의 고통스럽도록 방심한 대본 선택 속에서 그녀는
삐
뚤어진 시대극, 애정의 희생물처럼 보였다.
"그가 너무 좋아서 그래요. 너무 좋아요. 너무... "
나는 여자를 애타게 하는 남자의 얼굴이란 용의주도한 조심스러움과 다른 남자들을 안
절부절하게 만드는 여성적 측면이 부각된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라면 뺀질뺀질하고,
머리는 텅 비고, 성적으로 손에 쉽게 넣을 수 없는 그런 얼굴. 그는 상대의 애를 끓게
하면서 손에 잡히지 않는 욕망의 대상이기엔 너무 접근이 쉬워 보이는 인상이다.
"난, 알아요."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검정 수트와 흰 셔츠를 입고 머리를 아래로 풀어헤친 그녀가
이
상하게 마릴린 맨슨처럼 보였다. 그녀의 결박된 듯한 팔, 시작과 끝이 분명치 않는 여러
겹의 시간들, 찢긴 듯한 마음. 그녀가 치어 리더들에게 추파를 던진 잭 니콜슨보다 더
비웃음을 사야 하는 걸까. 나의 뒤틀린 낙천주의는 다시 말했다.
"당신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어요."
난 그녀가 입에 장미 꽃잎을 물고 있다는 상상이 들었다. 그걸 뭉개지 말아야 한다고 생
각했다. 난 그녀가 손에 나비를 쥐고 있다고 상상했다. 날개를 망가뜨리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건 달리기가 아니다. 그녀 같은 사람들은 고통을 감당하기 위해 전략을 짜지
못한다. 고통이 달리기를 그만두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속력을낮추라거나, 들이마신 산
소로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달리라고 말하고 싶진 않았다. 될 수 있는 한 천천히 달리
는 것, 그냥 건강을 위해 산책만 하는 것은 싫다. 나는 언제나 손가락을 포켓 속에 집어
넣고 있는 기분을 사랑하니까.
그들이 다시 통제력을 잃은 듯 부둥켜안고 있을 때 나는 그녀 재킷의 버튼이나,
살균처
리된 듯한 단순한 치마 같은 부가물들에 눈길을 주었다. 그녀의 실수는 깨진유리처럼 보
이는 추상적이고도 불건전한 백의 프린트 속에 명백히 드러나고 있는 것도 같았다. 문득
'나는 비를 참을 수 없어(I Can't Stand the Rain)'가 듣고 싶었다.
"나 어떡하죠?"
그녀가 그에게 안긴 채 나를 보았다.
이 순간, 모든 것이 하나의 패키지라고 생각했다. 쇼 같은 사랑이 하루씩 길어진다고
해
도 언제나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그냥 가만있어요. 이해 못하겠지만, 걱정 마요, 그건 남자들 일이니까."
나는 셀 수 없이 많이 목격한 사랑에 관한 일화들 속에서 내 자신의 마지막 한
방울까
지 짜낸 기분이 들었다.
나는 우는 그녀를 위해 개구리 마스크를 쓰고 지루박을 추고도 싶었다.
"내가 당신을 위해서 노래를 해줄게요."
번호를 입력했다. 하필 <마지막 포옹>이었다. 노래를 부르고 난 뒤 나는 다시
말했다.
미안, 당신을 위해서 다른 걸 할게요. 그랬더니 하필 <약속된 이별>이었다. 연구개가 찢
어지도록 부르곤, 정말 미안, 진짜 마지막으로 당신을 위해 하나 더 할게요. 번호를 누르
고 보니 배호의 <안녕>이었다. 만회가 되지 않았다. 돌아서서 남몰래 흐느껴 울 안녕...
마이크를 놓자, 그녀는 자꾸만 딸기 잼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쨌든 누구와 사귀
건 루머에 휩싸이는 운명이 아니더라도 사랑은 필요하다. 더 많은 위험을 불러오기 위
해.
그들이 떠나자 겨울 한기가 밀려들었다.
"부러워..."
윤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밤에 돌아다닐 때마다 남편하고 마주치지 않는 날이 없었어. 그 사람이 죽은 지 몇
년
이나 됐지만, 저녁이면 그 사람이 길 위로 달려올 것 같아."
언제나 예의바르지만 네가 아무리 애써도 내 마음을 알 수는 없을 걸, 하던 윤의 태도에
조금씩 균열이 보였다. 윤은, 2년 전 남편과 사별했다. 교통사고였다. 그녀는 남편의 찢
겨진 복부를 한순간도 잊지 못했다.
이렇게까지 심화된 술자리가 될 줄 정말 몰랐다. 나는 진심으로 윤에게
미안해했다.
아, 돈 좀 찾아야 하는데. 윤이 말했다. 우리는 24시간 현금 인출기 앞에 섰다. 지금
돈
이 왜...? 라고 물으려다가 그만 두었다. 윤은 말없이 세 번째 잘못된 번호를 누르곤 낙
담했다.
"비밀 번호가 틀려. 왜 이렇지?"
우리는 밤의 어두운 행렬 사이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슬픈 것 같은데, 그 사이 사이에 어떤 압박감을 느껴. 어떤 면에선 그 사람은 나를
준
비시켰겠지. 오늘 같은 날... 하지만 무슨 준비를 시킨 걸까?"
윤의 겨울 점퍼 골진 곳에 "가족을 꾸리고 싶나요?" 같은 익살스러운 영어 문장이
수놓
아져 있었다.
난 문설주에 몸을 기댄 것처럼 우물쭈물한 기분이 들었다. 타인의 불안한 세계를
들여다
보지 않고 상대를 탐구하는 건 불가능하다. 나는 '인생은 바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우울
한 답이지만, 모든 걸 다 가질 순 없다. 사랑은 질투와 에고가 가득한 세계. 언제나 잃는
게 있기 마련인 것을.
이충걸 (GQ 코리아 편집장)
'♣ 향기나는방 > 글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충걸] 나이가 든다는 것 - (0) | 2006.07.19 |
---|---|
[북리뷰] 펌/ 쟝 쟈크 상뻬의 '얼굴 빨개지는 아이' - (0) | 2006.07.02 |
[정찬] 단편 소설 - 베니스에서 죽다 - (0) | 2006.07.01 |
작가들의 방 - (0) | 2006.06.06 |
봄을 발명한 동물들에 대해 짚이는 것이 있습니까? (0) | 2006.03.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