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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기나는방/글향기

봄을 발명한 동물들에 대해 짚이는 것이 있습니까?

다음 글은 내 글이 아니고 2004년도에 어느 소설가의 짧은 글 하나를 열심히 타이핑해서

옮겨봤었던 것이다.

 

벌써 2년이 지났고 여전히 봄은 내게 설레임과 두려움, 후회 따위를 안겨주는 계절이다.

 

<봄을 발명한 동물들에 대해 뭔가 짚이는 게 있습니까?>


 




"봄을, 발명한 동물이라구요?"

"네"

"그것 참, 금시초문인 걸."


누구나 봄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아는 봄은 겨우 저 정도의 질문에도 어김없이 흔들린다. 무너진다. 지나가 버린다. 그런 이유로, 짧고, 흩날린다. 그것이 우리의 봄이다.


봄은 간단한 것이 아니며, 겨우 개나리를 안다고 해서 봄을 아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 라는 단어가 있다. 누구나 아는 단어지만, 라디오 방송을 하는 친구에겐 전파가 미치는 곳이 세계가 된다. 전철에서 "지퍼가 열렸어요"란 지적을 받은 친구라면 순간 자신의 지퍼 속이 세계가 될 것이며, 15잔의 잭 다니엘을 비운 친구에겐 16잔 째의 잭 다니엘이 세계가 된다.


파악했겠지만,마찬가지로 '봄'이라는 단어는 누구나 아는 단어지만, 누구도 모르는 단어일 수도 있다. 처음으로 돌아가자.


봄을 발명한 동물들에 대해 뭔가 짚이는 게 있습니까? 처음 얘기를 꺼낸 것은 라디오 방송을 맡고 있는 예의 그 친구였다. 글쎄, 협찬이 떨어졌는데 결승까지 올라온 퀴즈 참가자가 있었지 뭐야. 어떤 문제를 내도 다 맞출 기세더라구. 그래서 엉겁결에 그런 문제를 내버린 거야. 봄을 발명한 동물은 무엇일까? 5.4.3.2.1. ! 이것 참 안타깝군요. 하하하. 그러고 얼른 탐 존스를 틀어버렸지. 탐 존스를 듣다 보면 모든 게 흐지부지 되기 일쑤니까. 생각해보니 개구리가 아닐까 싶어. 단정하게, 지퍼를 잘 여민 친구가 느닷없이 의견을 제시하자, 15잔 째의 잭 다니엘이 맞은 편에서 거들었다. 그래, 개구리, 개구리라면 능히 그럴 수 있지. 올챙이 적 생각을 전혀 못하니까..... 글쎄 협찬이 다 떨어졌다니까. 탐 존스를 틀라구, 이봐 탐 존스 없어? 하지만, 아쉽게도, 간판 우측 하단에 Since 1999가 새겨진 그 바에 탐 존스가 있을 리 없고, 해서 무엇하나 흐지부지 되지 못한 채 모두가 취해 버렸다.


바의 문을 나서는데 22잔의 잭 다니엘을 부축한 나를 , 또 옆에서 부축하고 있던 웨이터가 이렇게 속삭였다. 봄을 발명한 건얼룩말입니다. 손님 일어나세요. 다 왔습니다. 겨울이 끝난 것은 심야의 택시 속이었다. 다 왔나요? 다 왔습니다. 요금은 7천 9백원이고, 봄을 발명한 건 말레이맥이지요.


결국 허술하게, 그 따위 얘길 또 듣게 된 나는 곧 이어 편의점에서 봉투는 따로 20원을 받습니다. 봄을 발명한 건 팬더고요,라는 소릴 들었으며, 잠시 후 1:1 외로우시면 다이얼을~~ 봄을 발명한 건 젖소고요, 라는 문자 메시지를 받았으며, 또 대책 없이 아파트의 엘리베이터에서 신장 개업 , 쟁반짜장을 시키면 물만두가 공짜, 게다가 봄을 발명한 건 다름 아닌 범고래, 라는 홍보용 스티커를 발견했다.


한 천문학자의 말을 빌면, 유로파란 행성에는 지구의 9배에 달하는 거대한 바다가 있다고 한다. 잠을 잘 자고 일어나니, 모든 것이 흐지부지되어 있었다. 그 흐지부지 속에서 나는 또렷히 몇 마리의 동물을 그려낼 수 있었다. 그것은 얼룩말과 말레이맥, 팬더와젖소, 그리고 범고래였다. 봄날의 미풍 속에서 어쩌면 봄을 발명한 것은 과연 저들일지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저들의 공통점은 알다시피 '흑과 백' --- 도대체가 흑과 백이라니 --- 미풍의 강바닥에 스며든 온난하고 온난한 봄볕 속에서, 나는 곧 그 이유를 깨닫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이 세계는 '보호색'을 가지지 못한 개체들도 살아가야만 하는 곳이었다. 꾸벅꾸벅 머리를 끄덕이며, 어느 날 얼룩말과 말레이맥과 팬더와 젖소, 그리고 범고래는 '봄'이란 것을 생각해냈을 것이다. 그곳이 서귀포의 해안이건, 남아프리카의 오렌지강하류이건, 혹은 말레이반도의 이름 모를 리아스식 해안이건아무튼이 세계의 어딘가에서,그들이 '봄'을 발명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봄이다. 혹 당신의 초원의 한복판에서, 초원의 끝에서도 보일 만큼의 선명한 흑백으로서 있는 기분이라면, 그런 기분이 든다면, 오늘만큼은 안심하길 바란다. 애당초 봄은, 그런 당신을 위해 고안된 것이며, 발명된 것이었다. 그것이 우윳빛 잔에 가득 담긴 블랙 커피를 마시며,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이다. 검으나 희나 우리는 살아 있고, 검으나 희나 봄날은 간다. 바로 어제까지도 개나리가 피면 봄이겠거니, 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다는 아닌 모양이다.

(박민규 /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