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조명, 화면의 템포, 색조, 셋트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이 나름의 설정아래
잘 짜여진 이 한편의 영화는 휘몰아치듯 흘러가는 스토리 위주의 영화라든가 킬링타
임용으로 그저 2시간만의 오락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들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정교하게 잘 짜여진 움직이는 동영상 액자작품.
독서의 계절이라는 가을이 시작되는 이 시간에 나는 아름답고도 여운이 남는 책 한권을
읽고 책을 덮는 기분으로 영화관을 나섰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감독이 숨겨놓은 수많은 상징들의 의미를 잡아가며, 또 그것이
어느 정도 맞아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지적인 유희를 즐기는 재미도 있었고 - 감독
에게 질문하는 시간에 그것들 중 몇 개를 질문하고도 싶었지만 다음 순간 그게
무슨 소용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답이 있는 퀴즈가 아닌 것을. 그냥 내가
그렇게 느끼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 주인공 민우가 잃어버린 것이 내가 잃어
버린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슴 한 켠이 아파오기도 했다. 이건 내 감성에
와 닿았던 부분이 되겠다.
내가 보건대 - 이 이야기는 정확히 두 개의 세계로 나뉘어진다.
약혼녀 효진양이 대표하는 세계와 과거의 첫사랑인 미미가 대표하는 세계.
효진양은 현실세계를 대표한다.
대중적인 작품을 쓰기를 압박하는 출판사편집인. 비싼 회를 대접하고 조금 더 돈이
되는 작품을 요구하며 마감시간을 재차 확인하며 시간을 압박하는 이 출판사 편집인,
사랑을 확인하려하는 약혼녀,
불확실한 사랑을 돈으로 도장찍어두려는 장인, 어려운 건 알지만 그 때까지 입금을..
이라고 애원하는 가족들. 작품은 도장찍듯 나오는 것이 아니고 많은 주변의 압력과
작품에 대한 압박으로 민우는 조금씩 스스로 미쳐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러한 현실세계는 차가운 대리석, 금속재질의 셋트- 민우의 집, 세련미있는 약혼녀
의 의상, 군더더기 하나 없이 정갈한 일식집의 인테리어등이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한번도 환한 조명 아래 이 모든 것들이 비춰지는 적이 없다.
그리고 과거의 첫사랑인 미미는 '순수'를 표상한다.
머리를 감겨주다가 갈아입고 나온 원피스 조차도 세련미있는 의상은 아니다.
미용실 앞의 땅은 흙이고, 둘이 마주앉아 일몰을 보던 언덕도 붉은 색 흙바닥이다.
서투른 솜씨로 기타를 치고 노래를 하던 장면의 따뜻한 조명의 색감도 미미가 속한
세계의 느낌이다.
이 두 세계를 연결하는 것이 물이다.
안개는 물의 입자로 이루어진 것. 모든 사물을 뿌옇게 보이게 하는 것이기도 하며
오랜 시간 있다보면 조금씩 축축함에 빠져들게 된다.
추억의 아지트라 할 수 있는 루팡바 근처의 땅은 항상 물로 젖어 있다. 연희가 죽던
날은 비가 몹시 내리던 날.
무언가에 의해 정신이 잠식되어감을 느끼던 민우가 어느 날 꾸었던 꿈을 생각해본다.
똑똑, 무언가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 마음속으로 삼세번이지 라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삼세번의 두드리는 소리가 끝난 뒤 - 누구세요? 라고 일어서던 민우, - 이 때
역광받아 실루엣으로 나타나던, 어깨 떡 벌어진 남자다운 민우를 감상하는 즐거움도
있다 -
대리석 바닥에 흥건하게 고여있는 물. 이어 쏟아지는 물줄기를 그대로 맞게 되는
민우는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의해 온 존재를 잠식당한 민우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
다.
미미가 민우에게 권해주던 담배.
담배 역시 연기를 내뿜는다는 점에서 안개와 일맥 통하는 부분이 있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안개는 물에서 시작되고 담배연기는 불에서 시작된다는 점이 다르다.
그리고 이 담배연기를 뿜으며 집필하게 되는 민우의 새로운 습관은 알 수 없는
미미의 세계가 현실세계로 그대로 연결되는 유일한 연결물이다.
영화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품들 중의 하나가 거울등 비춰지는 것들이다.
루팡바 근처에서 브라운관에 비춰지던 모습. 루팡바를 찾던 시장통 안에 있던 오래된
거울, 햇빛쏟아지던 거리에 운반되어지던 거울, 거기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민우는 쓰러지듯 길에 눕는다.
거울은 이 영화에서 무얼까?
영화를 본 지 만 하루가 지난 뒤에 약혼녀 효진양이 가구를 고르며 하는 대사가 떠올
랐다.
- 가구는 항상 비춰보는 거울과 같아서 오랜 시간을 두고 보면서 골라야 해.
영화속에서 거울 속 비춰지는 민우의 모습은 항상 실제와 다르게 왜곡되어 있다.
같은가 했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거울 밖 실제의 민우와는 다른 자세, 다른 표정을
취하고 있다.
거울 속 민우는 누구일까? 현재 실재하고 있는 민우는 민우 자신도 모르는 다른 누구인 것이다.
거울에 비춰지는 장면은 마지막 갈등이 해소되는 부분에서 다시 나타난다.
자신의 아파트 유리에 비춰지던 옛날 고등학생 민우의 모습.
여태 옛날 자신의 모습을 멀리서 관찰하던 현실의 민우의 모습에서 이 장면에서는
두개의 인물이 겹쳐지듯 예전 고등학생 민우의 모습이 현재의 민우와 겹쳐져
마침내 하나가 된다.
그리고 창 밖에 은은한 달빛.
여태 항상 , 푸르스름한 조명만이 비치는 어두운 실내, 구름이 가득 끼어 찌뿌드드한
날씨였던 시장통 야외씬, 노천까페씬조차도 차양막이 드리워져 있고 군데 군데
얼룩지듯 햇볕이 쏟아지던 이전 씬에서 두 인물이 겹쳐지고 연한 달빛이 쏟아지는
것은 갈등 요소가 해결되고 있다는 상징으로 보여졌다.
이 때부터 화면은 점점 밝아지기 시작한다.
미미의 혼령이 지나가고 난 날 아침, 잠든 민우의 얼굴에 쏟아지는 눈부시게 환한
햇살. 영화속에서 이토록 환한 햇살은 처음이다..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효진양이
말한다. 이렇게 푹 잠든 걸 보는 것은 처음인 것 같다.. 는. - 그리고, 안경벗은
모습을 보는 것도 정말 오래간만인 듯 싶었다. - 환한 야외의 햇살. - 여기서 처음
으로 셋트장 밖에서 찍은 것이 아닌가 싶다. - 시리도록 푸른 바다와 흰 모래, 파란
하늘.
영화속 공간은 특이하다.
모든 것이 셋트로 구성되어져 있고 조명 조차 모두 인공조명들로 실제 야외 햇빛인
듯한 효과를 내었다.
이것은 기묘한 느낌을 주는데, 셋트같지 않으면서 셋트같은 느낌을 주는 이것은
이곳이 실재하지 않는 환상 속의 공간 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어쩌면 상상 속의
공간일 수도 있겠다.
미미가 옛날 살던 미장원 근처 역시 실재하지 않는 공간의 느낌을 준다.
흙바닥이 있음에도 무언가 실재하지 않는 장소의 느낌을 주는 이것은 앞과는 조금
다른 이유겠지. 민우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추억 속의 공간이니까.
민우의 아파트 내부는 한번도 전체적으로 비춰진 적이 없다. 아주 짧은 근거리
촬영만으로 이루어진 실내촬영분은 그 안의 공간이 어떤 곳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게 한다. 그 곳 역시 비현실감을 주고 집 내부에서부터 미로와 같은 느낌을
준다. 반들거리는 바닥과 스텐레스재질의 인테리어소품들은 비인간성, 차가움을
느끼게 하고.
편집인과 대면하고 있을 때 오가던 대화의 비현실성. 민우의 상상 속의 대화들과
실제의 대화들이 구분선없이 혼재되어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비현실인지조차
가늠하기 힘들게 한다.
민우가 속한 이 모든 세계가 액자 속의 상상공간을 들여다 보게 하는 이런 모든 장치
들은 민우의 혼란스러움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이 모든 것들이 가상의 이야기
공간이라는 것을 관객들에게 일깨워줌으로서 이야기밖에서 자신의 이야기에 투영해
볼 수 있게 하는 효과도 준다.
이 액자 속 이야기안에 다시 또 다른 가상공간이 삽입되어지는데, 그건 바로 미미와의
과거속 공간이다.
이러한 액자 속 액자의 이야기구성을 한 컷으로 보여준 것이 일식집 액자장면 이 되겠
다.
( 민우가 창문 안을 통해 과거의 자신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스크루지영감이 떠올랐
다. ^ ^;;)
차갑고 조소하는 듯한 민우의 표정이 처음으로 변했던 것이 바로 그 장면되겠다.
가장 강동원스러웠던 느낌의 표정. 우리가 강동원에게 기대했던 것 중의 그 어떤
것이 바로 그 표정되겠다.
몇 바퀴를 돌아도 같은 자리만 맴돌게 하던 루팡바 근처 골목. 쉽게 찾을 수 없다가
어떻게 운이 좋으면 입구를 발견하게 되는 루팡바. 중국설화가 떠올랐다. 무릉도원
같은 어떤 곳. 입구를 찾을 수 없는. 착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그 곳. 루팡바의 경우
엔 '잃어버린 어떤가를 찾으려 헤매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곳.
루팡바의 바텐더가 했던 얘기는 내게는... 그다지 무게중심을 둘 만하다고 느껴지지
는 않았다.
첫사랑의 혼령인 미미의 존재도 중국설화를 떠올리게 했는데 그래서 더 신비롭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길거리에서 현깃증으로 쓰러지던 민우의 모습은 까뮈의 이방인을 떠올리게 했고.
거울이 가득하던 뒷골목의 풍경은 이름도 기억못할 옛날 흑백의 프랑스 영화가
떠올랐고.
수많은 상징들로 가득차 있던 영화 M.
정교하고도 섬세한 영화 M.
물질주의에 억눌리고 시간에 재촉당하는 우리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것은 무얼까?
순수했던 과거로의 회귀에 대한 갈망?
날 생각하면서 울었으면 좋겠어.. 라던 미미. 아름다운 과거를 떠올릴 여유도 없고,
떠올리고도 울거나 할 어떤 감성이 메말라버린 민우와 우리들.
마지막 결론을 한 줄로 요약하면 아주 단순한 어떤 것이지만, 가슴에 와닿아 울렁거
릴 공감을 이끌어낸다는 것에 감독의 역량이 달린 것이리라.
마지막 지하철 공간 같은 데에서 저승사자로 보이는 누군가와 떠나는 미미의 나레이
션은 그렇게 구구절절하지 않아도 되었겠지만 Less poetique, more specifique를
원하는 많은 대중들에게 친절함을 보이려는 감독님의 배려라 느껴졌다.
미미로 분한 연희양은 배역에 정확히 부합되는 캐스팅이라 생각된다.
상투적 로맨스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하얀 원피스의 소녀가 아니라, 민우의
모습에 재빨리 치마로 갈아입고 나오는 모습이라던가 자주 벌러덩 넘어지는 덜렁이
의 모습, 담뱃불을 켜 줄 때의 약간 엉뚱한 표정등이 이 캐릭터를 살아 숨쉬게 만들
었다.
모든 것이 비현실감을 주는 이 영화속에서 연희와 마주하고 있을 때의 민우, 이 두
캐릭터만이 어떤 현실감을 주고 있는데 아마도 조명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떤 각도로 빛을 쏘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광대뼈와 얼굴피부의 실루엣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조명을 받고 있었는데 - 사실 그 조명에서 예뻐보이거나 잘 생겨보이기
힘들다. 그럼에도 - 예쁘고 멋졌던 미미와 민우.
민우역의 강동원 역시 두 가지 캐릭터를 연기해야 했는데, 첫사랑의 기억을 떠올리고
혼란스러워하고 아스라히 그리워하는 뒷편의 캐릭터와 냉소적이고 히스테리칼한
전편의 캐릭터.
그 뒷편의 캐릭터로는 강동원 이외의 인물을 떠올릴 수가 없고 그 전편의 캐릭터를
잘 표현해내는 것이 강동원의 숙제였을텐데 이 또한 무난하게 잘 소화했다고
느껴진다.
캐릭터 민우는 히스테리칼하되 공격적이지는 않아야 하고 지적이면서도 사랑의 느낌
이 잘 어울릴만큼 멋진 느낌도 주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갖췄으면서도 또한
아련한 느낌으로 금새 변모할 수 있는 Emotional 한 배우이다.
배우 강동원을 탐내는 감독들은 많다. 그럼에도 배역에 적역인 강동원을 자신의
영화에 캐스팅할 수 있었던 감독님은.. 역시 능력이 좋으신 감독님이다. 평단의
주목을 이끌어낼 수 있는 감독님이니까.
그리고, -지금처럼 -영화를 본 뒤 감상평을 적고 싶어서 못견디게 만들 영화를 만
들 수 있는 감독 또한 그리 흔하지 않다. 흥행하게 될 지 어떨지 불확실하지만, -
흥행하기를 간절히 원한다. 이런 영화가 흥행해야 우리 관객들은 앞으로 또 이런 영
화를 더 많이 감상할 수 있게 될테니까 - 이 정도의 주목을 이끌어낼 수 있는 영화
에 출연한 강동원도 운과 능력이 되는 배우이다.
배우와 감독의 궁합이 잘 들어맞은 영화이다.
이 가을에 괜찮은 영화를 한편 '감상'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적극 권하고 싶은 영화
이다. 꼭 보시길 -
'▶ 세상에 말걸기 ◀◀ > ● 아딸라의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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