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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기나는방/글향기

[에세이] "나는 장난으로 뱀을 죽인 적이 있다" 박연선 작가 -

 

 

 

[프런트 에세이]나는 장난으로 뱀을 죽인 적이 있다
[레이디경향 2006-07-20 12:06]
Prologue| 뱀의 피도 빨갛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뱀을 죽인 적이 있다. 아이였을 때.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모내기를 하려고 물을 채워놓은 논에 뱀이 머리를 들고 헤엄쳐가고

 

있었다. 장난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 무리가 아니었다면, 무서워 피한 쪽은 나였을 것이다. 도망가

 

는 뱀을 쫓아가며 돌을 던졌다. 뱀의 피도 빨갛다는 걸 그때 알았다. 허물 벗는 뱀은 불사의 이미

 

지인 걸까? 비를 맞으면 되살아난 뱀이 복수를 하러 온다고, 우리 중에 누군가 그랬다. 그렇잖아

 

도 비가 오는 밤은 눅눅하고 습기찬데, 할머니를 끌어안고 자느라 온몸이 땀으로 찐득거렸다.

 

 

 



신이는 ‘미친년’이었다

 

우리 동네에 신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코밑에 수염이 거뭇거뭇하던 여자아이… 아이였을까? 몇

 

살이었을까? 아이도 아니었지만, 어른도 아니었다. 신이는 ‘미친년’이었다. 그때는 동네마다 미친

 

사람이 하나씩 있었다. 명천리는 신이. 율목리는 홍순이. 예덕리는 영남이… 미치면 힘이 장사가

 

된다더라고, 우리들은 누구 힘이 가장 셀까 궁금해했다. 나는 당연히 신이에게 한 표를 던졌다. 홍

 

순이에 비해 몸집이 작고, 영남이는 남자였지만 지연에 의한 편들기였다.


 

신이는 학교 앞에 살았다. 집에서도 동네에서도 구박받이였는데 살은 뒤룩뒤룩 쪘다. 늘 공깃돌을

 

갖고 다니면서 아무나 보고 ‘공기하자’고 졸랐다. 신이가 미친 이유를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신

 

이는 천재였다고 한다. 학교 들어가기 전에 한글을 떼고, 한번 들은 구구단을 줄줄 외웠다고도 했

 

다. 말하자면 신이는 머리가 너무 좋아서 미친 것이다. 나중에야 알았는데 율목리의 홍순이도 예

 

덕리의 영남이도 머리가 너무 좋아서 미쳤단다. 우리는 이 우연의 일치를 의심 없이 믿었다. 내가

 

천재가 아니어서 참 다행이었다.

 

 


다른 의견도 있었다. 신이가 미친 것은 간질을 앓았기 때문이라고, 1학년 어느 날 공부시간에 간

 

질 발작이 일어나고부터 신이가 그렇게 됐다고, 갓 스물을 넘긴 여선생님이 제일 놀랐다고, 이 의

 

견은 곧 사라졌다. 신이는 미쳤기 때문에 간질을 하는 거지. 간질을 했기 때문에 미친 게 아니었

 

다. 아이들의 논리는 단순 명쾌하다.

 

 


혼자일 때완 달리 무리 지어 있을 때 우리는 신이에게 강했다

 

 

간질 할 때 신이는 무서웠다. 땅바닥에 자빠져서 허우적거렸다. 입에 거품을 물었다. 돌 위에 쓰러

 

지면 머리에서 피도 났다. 공기를 집는 신이 손등에는 늘 묵은 상처와 새로 돋은 상처가 있었다.

 

 


신이에 대해 여러 개의 소문이 있었다. 예덕리로 넘어가는 말우지 고개 숲 속에서 신이가 간질을

 

하고 있었는데, 알궁둥이였다는 둥, 누구 누구네 큰아들이 바지를 추스르며 지나갔다는 둥, 아궁

 

이 앞에서 갑작스런 발작으로 손등이 홀라당 데었다는 둥, 가장 무서운 소문은 신이가 누군가를

 

간지럼 치면 그 사람도 간질쟁이가 된다는 거였다. 나는 그 말을 철썩같이 믿었다. 학교 갈 때마다

 

신이에게 잡힐까봐 겁에 질렸다. 멀리서라도 신이를 보면 빙 돌아서 피해 다녔다.

 

 

 

 


 

혼자 있을 때 신이를 두려워하지 않는 아이는 없었다. 미쳐서 힘이 장사인 데다가, 무엇보다도 신

 

이에게는 간지럼이라는 막강 공격력이 있었다. 무리를 지으면 우리는 강해졌다. 언제부턴가 남자

 

아이들은 신이에게 돌을 던졌다. 대부분은 위협용이었지만, 가끔은 살집이 좋은 신이의 등을 맞추

 

기도 했다. 그럴 때면 신이는 소리를 지르며 남자아이들을 쫓아갔다. 그런데도 신이는 남자아이들

 

을 좋아했다. 놀아준다고 생각했다. 다음날이면 까맣게 잊고, ‘공기 집자’고 졸랐다.

 

 

 



어느 겨울 신이가 얼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5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총각이었다. 여자아이들은 선생님을 미워하는 척했다. 선생님을 좋아하는

 

게 어쩐지 부끄러웠다. 가을 운동회 연습 중에 선생님이 반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돌렸다. 운

 

동장에서 살다시피 하던 신이에게도 하나가 건네졌다. 총각선생님에게 아이스크림을 받아 들던

 

신이 얼굴이 환해졌다. 그때부터 신이는 가끔 창밖에서 교실을 훔쳐봤다. 여자아이들이 삐죽거렸

 

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우리는 신이를 잊어갔다. 가끔 동생에게서 소식을 듣기는 했다. 신이는 여전

 

히 공기 집자고 아이들을 괴롭히고, 아이들은 돌을 던지며 도망 다니고, 신이의 간질 발작은 점점

 

더 잦아지고, 신이 엄마는 더 많이 신이를 때리게 됐다고… 관심 밖이었다. 성장하느라 바쁜 우리

 

에게 신이가 어떻게 되든, 누구 말대로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갔다. 간질과 간지럼이 아무 상관도 없다는 걸 알게 되고도 한참이 지났다. 대학 1

 

학년 땐가, 겨울방학이었다. 방안에서 뒹굴거리다가 문득 신이가 생각났다. 겨울만 되면 빨간 점

 

퍼를 꼭 끼게 입고 다니던 신이는 아직도 공기를 집을까? 심심풀이 이상의 호기심이 아니었다.

 

“얼어 죽었다.” 할머니는 그렇게 말했다. 신이가 죽고 그 집 식구들은 어디론가 이사를 갔다는 이

 

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고구마를 먹었다. 학교 앞 신이네 집은 허물어졌고, 길이 넓어졌다.

 

 

 

 

 

 

 


 

Epilogue| 돌에 맞은 것이 내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안도할 밖에…

 

 

아프리카의 초원을 무대로 한 다큐 프로그램. 수많은 누떼가 강물을 건너는데 그중 하나가 악어에

 

게 잡혀 먹이로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신이 생각을 한다. 악어는 왜 하필 그 누를 골랐을까?

 

약해 보여서? 약한 건 오직 그 한 마리뿐이었을까? 나는 왜 뱀을 죽였을까? 신이는 왜 그렇게 됐

 

을까? 누구의 잘못일까? 우주적인 누군가가 지구의 인간들을 바라보다가 장난으로 던진 돌에 신

 

이가 맞은 것은 아닐까? 우울해질 것 같아서 생각을 그만둔다. 누구 말대로 ‘인생에서 의미를 찾으

 

려는 것만큼 무의미한 것은 없다’. 그리고 안도한다. ‘내가 악어에게 잡힌 누가 아니어서 참 다행이

 

다’라고, 거대한 존재가 던진 돌에 맞은 게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가증스럽게도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

 

 



진행 / 박연정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Profile 작가 박연선

 

영화 ‘동갑내기과외하기’(2002), ‘그녀를 믿지 마세요’(2004)/ 단막극 ‘얼음마녀의 장례식에 오세

 

요’(2002), ‘지고는 못살아’(2003), ‘사랑한다 말하기’(2003)/ 미니시리즈 ‘파란만장 미스김 10억만

 

들기’(2004), ‘연애시대’(2006)


 

편집후기|공상하다

 

가끔씩 쓸데없는 잡념에 빠져들 때가 있다. 시쳇말로 ‘영양가 없는’ 생각인데, 한번 빠져들면 한동

 

안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게 된다. 우리들 인간이란 결국 초월적인 미지의 거대한 존재에 의해 무

 

심결에 유린당할 수 있는 하찮은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우리 인간은 그 거대한 존재가 살

 

고 있는 집의 어느 한 귀퉁이 틈새에서 우주를 이루며, 그것이 전부인 양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공상. 종교적인 ‘신’의 존재를 배제한, 말 그대로 공상일 뿐이다.

 

 

 


중학교 3학년 때 수학선생님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을 때도 한동안 그런 생각에 빠져 있었다.

 

실력은 물론 미모마저 출중하던 젊은 여교사는 의사인 남편과 인형처럼 예쁜 두 딸을 데리고 나들

 

이 가던 중 덤프트럭과 충돌해 즉사하고 말았다. 뭐 하나 부러울 것 없던 도도한 여선생님의 죽음

 

을 보며 ‘왜 하필…’하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최근 한 중년 탤런트의 죽음을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

 

이 먼저 든다.

 

 

 


불치의 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치료하면 금세 회복할 수 있어 보이는 상황에서 그렇게 허무하게

 

죽음을 맞았으니 그 가족들도 ‘하필이면 왜’라는 억울함에 허탈할 것이다. 순순히 받아들이기엔

 

너무 어이없는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아마도 누군가 무심코 던진 돌에 맞아 죽은 개구리를 떠올릴

 

지 모른다. 그렇게 허무하게 죽으려고 전날까지 목청을 높여 수학을 가르치거나, 선선히 수술대에

 

오른 것은 아닐 테니….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삶에 대해서, 생명에 대해서, 우주의 한 점도 되지 않을 내 존재의 하찮음

 

에 대해서 사념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언젠가 내가 무심결에 눌러 죽인 개미들에겐 나라는 존재

 

가 예의 ‘미지의 거대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내 손이 닿기 전까진 열심히 먹을거리를 실어다 나르

 

며 나름 삶을 꾸리고 있었을 그 개미로서는 날벼락처럼 어이없는 죽음이 아니었을까 말이다. 결국

 

나나 개미나 다를 것 없지 않나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고 보면 알 수 없는 미래가 있기에 인생은

 

살아볼 만하단 식의 구호가 무색하게만 느껴진다. 운명이 레몬을 주었다면 그것으로 레몬주스를

 

만들라던 누군가의 말이 그저 말장난으로만 느껴지는 것이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세상에 유한적으로 머물다 갈 운명인 것을, 안달하고 집착하고 미워하고

 

괴로워하는 그 모든 것이 부질없는 일인 것을…. 그러나 사람이란 게 또 그렇게 초탈의 존재는 되

 

지 못하기에, 다른 이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 놀라고 안타까워하면서도 결국은 ‘돌에 맞은 것이 내

 

가 아님’에 안도하고 다시 그 전과 같이 살아가게 마련이다. 그런 것이 인간 존재의 가증스런 일면

 

이기도 하지만 또 생을 살게 하는, 대책 없는 낙천적 기질이 아닐는지.

 

 

                                                      기사제공 :

 

 

 

 

 

* 아딸라의 덧붙임 : 

 

<그녀를 믿지 마세요>는 최희대작가의 순수한 창작 작품으로 2002년 영진위 하반기 시나

 

리오 당선된 작품입니다. 원작의 제목은 '비둘기 둥지로 날아든 뻐꾸기'로  <동갑내기 과외

 

하기>의 작가 박연선에 의해서 각색되어 지금의 제목 <그녀를 믿지 마세요>가 된 작품입

 

니다.   동갑내기 과외하기 역시 원작자인 실제 영문학 전공의 98학번 최수완씨가 당시 pc통

 

신에 올린  <스와니-동갑내기 과외하기>를 가지고 박연선 작가에 의해 재구성, 시나리오로 각

 

색된 것입니다.

 

<연애시대>는 일본 작가의 소설을 토대로 드라마화한 것입니다.

 

 

현재 박연선 작가는 쥬얼리 박정아 주연의 개봉예정 <날라리 종부뎐>의 시나리오를 담당했습

 

니다. 3년전에 적어놓은 거라고 -

 

궁 2의 시나리오 작가로 내정되어 있다는 풍문이 - 각색을 잘하시는 분이라서 그런 얘기가 돌

 

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확인된 바 없는 풍문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