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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기나는방/드라마·영화

[하얀거탑] 씨네21 안판석 PD 인터뷰 -

“장준혁을 제대로 그려내는 게 유일한 목표였다”
 
[씨네21 2007-03-12 08:00]     
 

 

 


 


- [온라인 인터뷰] <하얀거탑> 방영 끝낸 안판석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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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1일, 장준혁이 남긴 두통의 편지와 함께 <하얀거탑>이 막을 내렸다. 많은 이들로부터 오랜만에 만나는 현실감 넘치는 드라마를 평가를 받았던 <하얀거탑>의 성공에는 무엇보다 안판석 감독의 기여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장미와 콩나물> <아줌마>처럼 여성적인 취향의 드라마를 주로 만들어왔던 그는 <하얀거탑>에서 처음으로 남성들과 그들에 깃든 어두운 세계를 섬세하게 묘사했다. 김명민, 이선균, 이정길, 김창완 등 배우들의 숨막히는 연기 또한 그의 세밀하고 안정적이면서도 박진감 넘치는 연출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처럼 빛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안판석 감독을 만난 것은 지난 3월4일 밤 11시30분이었다. 18회 방송을 막 마친 상황이었던 탓인지 그의 얼굴에선 긴장감을 많이 찾아볼 수 없었지만, 인터뷰 후반부로 갈수록 오히려 긴장감이 더 느껴졌다. 아마도 인터뷰가 끝나는대로 마지막 두회의 극본 회의를 하러 가야 하는 탓이리라. 하긴, 장준혁의 죽음을 어떻게 끌고갈지를 결정하는 일이니 얼마나 힘드랴. 딱 1주일 전 안판석 감독과 나눈 심야의 대화를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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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거탑>은 장안의 화제작이 됐습니다.

 

어휴, 그래도 조금 성과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뭔가 반향이 없으면 정말 힘들거든요. 이 드라마에서 어떤 점은 부듯하고 어떤 점은 쪽팔리고 그래요. 무슨 얘기냐면, 시간이 없어서 뜻대로 다 못하고 엉성한 부분을 빤히 보면서도 그대로 방송에 내보내는 경우가 많다는 거예요.

 

 

 

사실, 그런 게 방송의 한계 아닌가요.

 

아무래도 드라마라고 하면 더 이해해주는 면이 있잖아요. 그래도 그런 게 만드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쪽팔린데. 그렇게 쪽팔린 것 없이 할 수 있는 부분도 있는데 말이죠. 이를테면 조금만 시간이 더 있으면…. 그게 항상 아쉬운 것이니까. 예를 들어 오늘 같은 경우에도 마무리 편집하고 음악 넣고 이런 데가 좀 부실했어요. 음악 작업을 다 못하고 방송이 나간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심지어 1회 방송 같은 경우는 음악작업을 하는 중간에 기술 스탭이 테이프를 뽑아서 갔다니까요. 방송을 해야 되니까. 나는 그런 경험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이게 뭐야, 어어어… 하다가 테이프를 뺏겼어요. 작업을 다 못했는데 방송이 나가버린 거죠.

 

 

 

<하얀거탑> 정도의 작품이면 사전제작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아니, 우리도 그랬죠. 전작제를 해보려고 여유있게 출발했어요. 대본작업도 일찍 하고, 사전 준비도 많이 하고, 촬영 스케줄도 일찍 잡아서 사전제작을 하려고 했는데, 드라마치고는 거대한 세트를 짓고 하니까 소품이나 미술을 채워야 하는데 그게 어렵더라고. 미술회사에서 장담했던 것보다 시간이 더 걸린 거예요. 그러다가 촬영이 두달 늦어졌죠. 촉박하게 제작하게 된 게 그 때문이에요. 그러다 보니 첫회 방송부터 아주 아슬아슬했죠.

 

 

 

그동안 얼마나 쉬셨나요.

 

첫회가 1월6일에 방송했고, 마지막 방송은 3월11일인데, 하루도 쉬지는 못하고 그냥 계속 일만 한 거예요. 잠은 하루에 많이 자면 4시간 정도, 한 숨도 못자는 경우도 많죠. 대충 1주일에 이틀 정도는 한숨도 못 잔다고 봐야 돼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힘들어요. (웃음) 그렇게 해서 완제품이 끝나고 방송을 하고 나면 다시 대본 회의를 시작해요. 그리고 다음날 아침부터 바로 촬영에 들어가고. 그렇게 촬영이 끝나고나도 여관에 들어가서 회의를 하곤 해요.

 

 

 

그럼 집에는 얼마나 자주 들어가세요.

 

집은 일주일에 하루 정도 들어가요. 그래도 옷은 바꿔 입어야 하니까. 세트 촬영이 있는 날이면 이천 근처 여관에서 자고, 오늘 같은 날에는 여의도의 여관에서 자든지 이렇게 해요. 단 30분이 없을 경우가 많으니까. 이제 인터뷰가 끝나면 바로 마지막 대본을 위해서 회의를 하러 가야해요. 여의도 한 오피스텔에 사무실이 있거든요.

 

 

 

감독님 생각으로는 <하얀거탑>의 어떤 면이 화제를 모았다고 생각하시나요.

 

잘은 모르겠는데, 두가지가 있는 것 같아요. 한 가지는, 영화나 드라마나 소설을 보면 소수의 단련된 눈을 가진 그룹이 있는데, 그들이 보기에 이제까지 충족시켜주지 못한 것을 이 드라마가 충족시켜준 게 있다고 봐요. 제작의 완성도라든가 문학적 함축미라든가 여러가지가. 아주 소수지만 감식안이 높은 그룹을 만족시켜줬고, 그래서 그들이 글도 쓰고 아젠다도 만들어주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 데서 반향을 일으켜준 것 같고. 그리고 그것과 아주 대척점에 있다고 할 수도 있는데, 각 잡고, 똥폼잡는 강인한 남성의 풍모를 좋아하는 부류가 있는 것 같아요. 이를테면 조폭영화를 좋아하듯이 말이죠. 이렇게 이 드라마를 좋아하는 두 부류가 있다고 봐요. 그러니까 <하얀거탑>의 경우에는 이 양 대척점에 있는 그룹들이 강력하게 지지해서 반향이 형성되지 않았나 생각이 드네요.

 

 

 

그런데 시청률은 그런 열렬한 반응만큼 나오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청률이 안 나오는 거예요. 시청률이란 것은 광범위한, 아주 모든 계층을 만족시켜줘야 되거든요. 어떤 한 계층만 만족시켜주면 시청률은 잘 안 나와요. 그런데 웬만해서는 모든 계층을 다 만족시켜주는 것은 어렵거든요.

 

 

 

그동안 드라마를 보지 않았던 남성들, 특히 그중에서도 소위 지위가 있고 나이가 든 분들도 많이들 본 것 같아요.

 

그런 분들도 자기가 겪었던 음모나 술수의 세계의 일단이 보여지니까 관심이 있을 수 있는 것 같아요. 사실 TV라는 게 하루 일과를 끝낸 사람들이 아무 생각없이 늘어져서 보는 건데,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쉬게 하면서 만족시켜줘야 하는데, 이건 그런 드라마는 아닌 것 같아요.

 

 

 

끝나는 마당에 섭섭한 점은 없으신가요.

 

섭섭하다는 느낌을 가질 새가 없다는 말이 맞겠죠. 이 드라마를 제대로 다 끝낼 수 있을지 없을지 마지막까지 조마조마하니까. 그런 감상이 들 시간은 없고, 걱정만 하고 있어요.

 

 

 

배우나 스탭 중에는 섭섭해 하는 분은 없나요.

 

섭섭해 한다기 보다는 실실 웃는 사람들이 있어요. 왜냐면 끝나가니까. (웃음) 정말 드라마를 찍는동안은 휴식 자체가 없었어요. 다른 드라마보다 힘든 면이 있었죠. 아쉬워하는 감정이 촬영 때 나타나는 게 있는데, 이를테면 장준혁이 아픈 장면을 찍는데, 상대 배우의 눈에 눈물이 어느새 그렁그렁 고이는 거예요. 그런 상황이 아닌데. 그러니까 어느 틈에 장준혁이라는 사람이 드라마 속에 나오는 가짜 인물이 아니고 묘하게 실체를 획득한 거죠. 아쉬움 같은 게 그런 데서 비치는 것 같아요.

 

 

 

감독으로서 드라마의 미흡한 점에 대한 아쉬움은 없습니까.

 

아직은 잘 모르겠네요. 원하는대로 100%를 못했다는 점, 그런 게 아쉽고.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이런 생각이 자꾸 드니까. 하여간 시간적인 한계가 가장 크죠. 잘 하는 것을 떠나서 일단 해내는 게 쉽지 않으니까 말이죠.

 

 

 

드라마 내용에 관한 것을 여쭤보자면, 애초에는 이 드라마가 장준혁과 최도영이라는 양 축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줄 알았는데, 사실 포커스는 장준혁에 맞춰져 있는 것 같아요.

 

맞아요. 그 한명에게 맞춰져 있습니다. 소설도 마찬가지에요. 일본 소설 겉 표지를 보면 ‘야망을 추구하는 천재의사 누구 대 순수한 영혼 누구’, 이렇게 나오는데 사실 본문을 읽어보면 장준혁 한 사람의 1인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어요. 나머지 사람들은 그 사람의 인간됨이라든가를 계량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이고.

 

 

 

그래선지 최도영은 많이 가려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홍보 등을 위해서 ‘장준혁 대 최도영’ 같은 표현을 쓰는데, 사실은 안 그래요. <하얀거탑>은 완벽하게 1인 스토리거든요. 최도영 같은 캐릭터는 오히려 비현실적일 수 있잖아요. 어떻게 그 나이에 그렇게 순백으로 있을 수 있을까 말이죠. 물론 그런 사람이 있긴 한데, 아주 극소수일 거예요. 그러니까 드라마 속 한 캐릭터를 맡을 정도로 어떤 집단을 대표하는 인물은 아니잖아요. 돋보이지 않을 수밖에 없죠. 사실 스토리가 발생하려면 어떤 욕망이 있어야하는데, 최도영에게는 욕망 자체가 없어요. 결국 최도영도 철저하게 주인공 장준혁의 심상을 반영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일 수밖에 없는 거죠.

 

 

 

이 드라마의 획기적인 점은 악한이 주인공이라는 점인 것 같습니다.

 

사실 악한이 주인공인 게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어요. 아주 새로운 것이라 말할 수는 없죠. 예전부터 피카레스크 소설도 있고 말이죠. 물론 악한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게 쉽지는 않아요. 흥행이 잘 되기도 어렵고요. 시청자들로 하여금 설득력을 갖게 하기도 힘들어요. 정말이지 원작 소설의 힘으로 간 거죠.

 

 

 

악한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는 점 때문에 부담은 없었나요.

 

많이 있었죠. 일단 시청률이 잘 나오기 어렵거든요. 악한이 주인공인 탓에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을 만족시켜주기가 어려워요. 그리고 드라마에서 뭔가를 탐구하려는 사람 같은 경우는 만족시켜줄 수 있는데, 아무 생각 없이 드라마에서 위안만 받고 하는 사람에게는 불만족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 것 같아요. 드라마에 전가의 보도처럼 쓰이는 출생의 비밀이라든가 3각, 4각관계, 불륜 같은 것은 좋은 소재거든요. 그런 것을 써야 많이들 봐요. 그런데 이 이야기는 그런 게 완전히 빠져있는 것이라서 우려들을 많이 했죠. 일본에서 흥행에 성공했던 드라마라는 점이 도움이 돼서 여기까지 굴러왔지, 제로 베이스에서 완전히 이 이야기만 갖고 추진했다고 한다면 쉽게 드라마화가 결정되기 어려웠을 거예요.

 

 

 

장준혁은 여러모로 정말 매력적인 캐릭터인 것 같습니다. 그에 따라 동정론 또한 많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게 애초 기획 때의 의도와는 다를 수 있는 것 같은데요.

 

다르지는 않아요. 오히려 제작 의도와 관련이 있죠. 결국 드라마의 이야기라는 게 처음 시작할 때는 남을 보게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시청자들은 일단 장준혁이라는 타자를 보게 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덧 거울을 보듯 그 안에서 자기를 보게 되는 거예요. 인간이라는 게 다 자기애가 있어서 그를 감정이입해서 사랑하게 되고 결국 자기와 동질화시키게 되는 거죠. 이 드라마는 장준혁이라는 인간을 철저히 해부하는 드라마인데, 결국 관객은 자기해부를 하게 되는 거예요. 그런 점이 이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해요.

 

 

 

장준혁은 소의(小醫)이긴 하지만, 특정분야에서는 엄청난 능력을 갖고 있고, 리더십도 훌륭하고, 사랑해주는 사람도 존재하는 등 여러 면에서 부러운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이 캐릭터가 너무 매력적이어서 시청자들을 사로잡기만 해도 그것 또한 문제라고 생각지는 않으신가요.

 

저는 그 점이 중요하다고 봐요. 만약 장준혁이 어떤 일을 해서 단순하게 처벌을 받게 된다면 시청자 본인이 갖고 있던 익숙하고 상투적인 세계관과 부합하니까 드라마가 끝난 다음에 다시 더듬어볼 이유가 없을텐데, 이 이야기의 경우는 그렇지 않아요. 생각할 지점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일단 장준혁을 동일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장준혁을 둘러싼 대다수 캐릭터들 또한 악인 또는 선과 악의 경계에 있는 사람들인데, 참 리얼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흔히들 신문을 보면서 ‘저 새끼 나쁜 새끼’ 뭐 이렇게 말들 하는데, 나쁘다거나 좋다거나 하는 그 판단이 각자의 깊은 명상 속에서 나온 결론이라기 보다는 상투성 속에서 나온 것이잖습니까. 이전까지만 해도 권모술수를 쓰고 자신의 생존을 위해 남을 짓밟는 사람은 나쁘다고 생각해왔는데, 이 드라마를 보다보면 어느덧 장준혁을 지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자기모순에 빠지게 되는 거죠. 그런 점이 중요하다고 봐요. 그래야 욕망이란 뭐고, 이상이란 뭐고, 무언가 진지한 생각을 한번이라도 하게 된다고 보는 거죠.
 

 

 


그러나 시청자들로 하여금 장준혁을 좋아하도록 해서는 안되는 것 아닌가요.

 

좋아해야 하는 거죠. 아까 말했듯, 자기를 좋아하듯이 말이에요. 그렇게 스스로가 딜레마에 빠져야 해요. ‘항상 나는 옳아’, 이게 아니라 모두가 자신의 딜레마를 들여다 봐야 하는 거죠.

 

 

 

일본 소설 원작과 한국판 드라마의 차이는 있나요.

 

크게 봐서는 그대로라고 보면 돼요. 일본과 한국의 차이, 시대의 차이 정도를 고려한 변화만 있었죠. 1960년대 일본에서 나온 소설이니까.

 

 

 

이 드라마의 핵심 중 하나는 캐스팅이었다는 생각입니다. 그중에는 허를 찌르는 캐스팅도 있었고요.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허를 찔렀다고 할 수 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아요. 내가 여기서 20년 이상을 일했기 때문에 이정길 선생님이나 김창완 선생님의 연기력이나 원래의 풍모 같은 것을 잘 안다고 생각하거든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거예요. 연기를 잘 하는 사람은 착한 역도 잘하고, 악한 역도 잘하고, 하드보일드한 것도 잘하고, 코미디도 잘한다는 거죠. 반면 하나를 못하는 사람은 다 못하고. 물론 부담스러운 점 한 가지는 많은 관객들이 관습에 틀에서 이야기를 자꾸 보니까 김창완씨가 드라마에서 나름의 캐릭터 묘사를 하고 있는데, 그런 것을 보지는 않고 ‘착한 사람이 왜 저래’라고 받아들이는 것 같아 그런 데 대한 우려가 있긴 하죠.

 

 

 

다른 캐스팅은 몰라도 장준혁 역의 김명민씨는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기가 막히게 했죠.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기대 이상으로, 어떻게 저렇게 잘할까 싶게. 진짜 좋은 배우더라고요.

 

 

 

처음부터 장준혁 역에 김명민씨를 생각하셨나요.

 

사실 다른 사람을 생각했었는데, 스케줄이나 현실성 이런 것을 맞춰가다가 김명민씨를 생각하게 됐죠. 그렇게 생각을 하는 순간, 이상하게도 이게 가장 좋은 카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명민씨는 일단 연기에 열심히 임하는데다가 머리가 비상하고, 배우로서 꼭 필요한 감성이 발달해 있거든요.

 

 

 

사실, <하얀거탑>을 보면 장준혁을 비롯한 악인들의 세계는 너무 리얼하고 구체적인데, 최도영이 중심이 된 선인(善人)들의 세계는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집니다.

 

부담이 많이 되지만, 어쩔 수가 없어요.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거든요. 실제 눈으로 그런 사람을 옆에서 보기도, 만나기조차 힘들잖아요. 비현실적이기는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에요. 나도 읽으면서 비현실적이네, 이런 생각을 했으니까. 문제는 모든 것을 다 충족하기는 어렵다는 거죠. 어떤 것을 원하면 그 점에 충실해서 주변을 꾸려야지, 여러 옳은 방향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모두 다 얻으려 하면 안된다는 생각을 처음부터 했거든요.

 

 

 

그게 아니라면, ‘모든 사람들은 악당’이라는 전제의 하드보일드 누아르처럼 만들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하려면 <하얀거탑>을 원작으로 할 필요가 없었겠죠. 여기에서는 비현실적이지만 순백의 영혼들이 주인공의 심상을 밝혀내기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것이죠.

 

 

 

편집할 때 주로 뺀 대목은 어디였나요.

 

편집을 하면 시간이 오버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결국 어떤 부분을 어쩔 수 없이 들어내야 하는 상황이었죠. 그럴 때 장준혁과 관련된 부분은 이후에 이야기가 연결되는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정보를 다 담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뺄 수 없었죠. 반면 최도영과 관련된 부분은 나중에 힘을 받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베이스로 깔아놓는 부분이 많았어요. 그래서 지금 당장은 빼도 되는 게 많더라고요. 그래서 부득이하게 뺀 장면도 많이 있죠.

 

 

 

장준혁의 외과 과장 선거가 한창일 때, 최도영은 소아암 환자 진주를 돌보기 위해 헌신을합니다. 그런데, 이 에피소드는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최도영은 너무 감상이 앞서는 것 아닌가 하고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논란이 또 성립되는데, ‘의사는 감성적이어야 하나 아니어야 하나’가 그것이겠죠. 그 점에서는 소설보다 많이 나간 점은 있어요. 소설에서는 그 배역이 좀 밍밍하고 그 배역이 나왔을 때 특별히 다뤄지는 테마가 없으니까 그런 것도 넣어보고 싶었어요. 의사란 끝까지 감정을 배제한 채 이성만 유지해야 하나, 아니면 환자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게 나은가, 묻고 싶었어요. 장준혁과 최도영을 보면 최도영은 감정이입으로 갈 것 같았어요. 그 점이 옳은지 그른지 밝혀보고 싶어서 집어넣었죠. 결국 그게 옳은지 그른지는 보는 사람 나름으로 판단하는 수밖에 없는 거죠.

 

 

 


<하얀거탑>은 어찌보면 권선징악의 이야기인데, 현실로 생각해보면 악인들이 더 출세하지 않나요.

 

음… 그런데 결국 그들은 파멸한다고 생각해요. 누구라도 말이죠.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은 결국 파멸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짧게 보면 성공해서 살아남는데 길게 보면 결국 파멸하고 말죠.
 

 

 


장준혁이 유일하게 인정하는 사람은 최도영인 듯 보입니다. 그게 굉장히 일방적이어서 때로는 짝사랑하는 듯한 분위기마저 보여주는데요.

 

장준혁은 최도영의 칭찬을 받고 싶어하죠. 나한테 그건 그럴 듯 해보이는 게,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속마음을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잖아요. 대체로 정치적으로 발언을 하지. 그러니까 장준혁이 ‘나 잘했어?’라고 물을 때 다들 정치적으로 대답하니까 그 답을 듣더라도 정말 그런지 아닌지 모르는 거죠. 그런데 나이브하게 자기 속마음을 거침없이 말하는 사람은 최도영 밖에 없으니까 자꾸 그 사람의 판단이나 평가가 궁금하고 그런 거죠. 장준혁은 의학자로서 궁극의 지존이 되고 싶은데, 그것을 평가해줄 사람은 최도영 밖에 없는 것이죠.

 

 

 

다루기 가장 부담스러웠던 스토리 라인이 있었다면 어느 대목입니까.

 

다 부담스러웠어요. 과장 선거도 그렇고, 그 이후의 이야기도 그렇고. 그런데 사람들은 드라마를 보면서 스토리 전개가 빠르다고 말하는데 사실은 빠르지 않거든요. 고작 과장 선거 하나를 갖고 9회를 했으니까. 알고 보면 느린 것을 빠르게 보이게 하는 것이었죠. 결국 그게 가장 어려운 것이었어요. 단순한 이야기인데, 이것을 복잡하게 만들고 빠르게 보이게 하고 하는 것. 그러니까 이 이야기가 가질 수 있는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는 게 어려웠다는 거죠. 결국 모든 것을 다 동원했어요. 샷의 배열이나 편집, 음악까지. 촬영할 때도 그랬고.

 

 

 

엔딩은 어떻게 진행되나요.

 

소설에 나와있는 그대로예요. 장준혁이 아파서 쓰러지고 이주완 과장이 집도를 하게 되고.그러면서 죽어가는 이야기죠. 장준혁이라는 캐릭터의 묘한 점이랄까, 매력이랄까, 독창성이랄까 하는 점이 엔딩에서 나오는데, 두통의 편지를 써놓고 죽어요. 그중 하나는 상고이유서이고, 또 하나는 자기 병에 대한 소견서죠. 그 점이 참 매력적인 것 같아요. 지치거나 하는 인물이 아니라 끝까지 뭔가를 해보려는 인물이죠. 참회하지는 않는 거죠. 아주 집요하고. 그게 왜 매력적인가 생각해보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자신이 꼴까닥하기 직전까지 (웃음) 뭔가를 해보려고 노력하잖아요. 그리고 자신이 잘못했다는 생각을 잠재의식 속에서는 하지만, 쉽게 인정은 안하죠. 그만큼 자기부정이 어려운 거겠죠. 그렇게 자기부정을 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이 매력적이라는 것이죠.

 

 

 

결국 <하얀거탑>은 정치드라마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앞서 말했지만, 여기서 나는 한 사람의 인생만 제대로 그리면 된다고 봐요. 그러니까 장준혁의 인생만 제대로 그리면 된다는 것이고, 그게 지상의 목표이기도 하죠. 그런데 그 사람과 관계된 사람들을 떨쳐내고서 그 사람 혼자만 남겨둬서는 그 사람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없다는 거죠. 결국 그 사람을 둘러싼 사람들을 모조리 대입시켜봐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의 내면이 흐름을 얻게 되고, 다양한 모습을 얻게 되는 거죠. 그런 면에서 정치드라마라고 하는 건, 초반과 중반에 장준혁을 둘러싼 인간관계 속에서 그 사람의 리액션을 보면서 관계의 정치성이 드러나는 거죠. 그리고 이제 그 단계를 넘어서니까 주변 사람들에 의해서 그 사람의 내면이 발가벗겨진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 이제 마지막으로 그 사람의 내면 속으로도 들어가보는 거죠. 한 인간을 잘 쫓아가려면 이것저것 리트머스 종이를 대어봐야 하는 거고, 그런 의미에서 정치드라마로 흘러간 것이었죠.

 

 

 

촬영 전에 일본 드라마도 참고하셨나요.

 

처음에는 보지 않았어요. 애초 판권 계약을 할 때 원작소설만을 대상으로 했을 뿐 아니라 후지TV도 계약에 참여해서 일본 드라마의 크리에이티브가 들어오면 안 되는 조항이 있었거든요. 그런 마당에 만약 보게 되면 나도 모르게 따라 할 수 있을까봐 안 봤던 거죠. 그런데 이미 다들 봤더라고요. 조연출이며, 작가며…. 자기들끼리 일본 드라마에 대해서 이야기하니까 회의하면 나만 밥오된 느낌이었고, 그래서 나중에 봤죠. (웃음) 2003년판 후지TV에서 만든 드라마였죠.

 

 

 

보니까 어떠시던가요.

 

정말 재미있게 봤어요. 일본 드라마가 도움을 준 가장 큰 점은 구체적인 내용이 아니라 ‘아 저런 이야기가 드라마가 될 수도 있구나’ 하는 확신을 준 것이었죠. <하얀거탑> 소설을 볼 때는 참 재미가 있었는데, 드라마로 옮겼을 때도 과연 재밌을지 의문이 많이 있었어요. 그러던 차에 일본 드라마를 보니까 드라마로서 재밌더라고요. 일본 드라마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소설 속 이야기 자체가 너무 단순하고 별 게 없다는 생각에 이 드라마 안에 결국 사랑 이야기를 집어넣을 수밖에 없지 않겠나 생각을 했어요. 뭐 사랑, 배신 등을 이리저리 버무려야 20부작이 나온다는 생각을 했던 거죠. (웃음) 그래서 실제로 그렇게 극본도 5편까지 썼다고요. 연애 라인 같은 것을 집어넣어서. 아무래도 서걱거린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는데, 일본판 드라마를 보니까 우직하게 잘 만들었더라고요.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원작대로 해야 하는구나 생각을 했던 거죠. 사실 일본 드라마에도 우리로 치면 이윤진(송선미)와 최도영의 사랑이 나오는데, 뭐 대단해 보이지도 않고 재미도 없더라고요. 하여간 그래서 5편까지 써놓은 것을 모두 엎어서 대본을 처음부터 다시 썼어요.

 

 

 

원작 소설에도 최도영과 이윤진을 둘러싼 러브라인은 존재하는데요.

 

사실 최도영의 사랑 이야기는 성립되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뭔가 모순되는 점이 생기게 되고 그 모순을 풀자 치면 결국 최도영을 주인공으로 해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장준혁이라는 사람을 포커스로 맞추는 것을 포기해야 하거든요. 결론적으로 안될 수밖에 없는 거죠.

 

 

 

비주얼에 대한 고민도 많았다는 생각입니다.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누아르 스타일입니다. 특히 부원장실, 각 과장실, 연구실은 의도적으로 어두운 조명으로 설계했고, 블라인드 사이로 햇살이 들어오고 하는데요. 어떤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이었나요.

 

비주얼 컨셉에 대해서는 고민이 많았어요. 고민을 한 끝에 그런 누아르 스타일을 하기로했던 것인데, 고민을 했다. 비주얼 컨셉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고민 끝에 그렇게 하기로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점을 좋아해줬다는 생각이에요. 아까 말했듯이 소수의 공부한 사람들은 어쩌면 작위적으로 봤을 수도 있겠지만. 하여간 많은 사람들이 봐야 하는데, 이런 스타일은 일종의 설탕옷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상당수의 사람들이 누아르적인 분위기, 마초적인 느낌, 남성적인 것 등등을 비판은 해도 좋아한다고요. 은밀한 욕망 같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죠. 작위적이고 비현실적이지만, 비주얼을 강력하게 밀어부치면 압도가 됩니다.만약에 그런 점을 다 걷어내고 모든 방에 불을 환하게 밝혀놓은 채 촬영을 했다면 아마 이 드라마를 아무도 안 좋아했을지도 몰라요. 비주얼을 그렇게 한 이유 또 한가지는 원래 느린 이야기인데, 급박하게 흘러가게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였죠.

 

 

 

개인적으로 여성적인 취향의 드라마를 많이 만들다가 남자들의 세계를 본격적으로 다뤘는데, 처음 아니셨나요.

 

처음이죠. 일단 안 해본 것을 하니까 쾌감은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직접 만드는 것이야 이런 장르가 처음이지만, 관객으로서는 <대부>도 좋아하거든요. 하여간 좋아하는 다른 것을 해보는 색다른 재미가 있어요.

 

 

 

실제 의사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자문을 해주는 의사 선생님과 촬영장에서 모니터도 같이 보면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분께 뭔가 이상하면 이야기해달라고 하는데 ‘됐다, 됐다’해서 넘어갔으니까 ‘됐나 보다’ 하는 거예요. (웃음) 그래도 한국사회도 조금 성숙한 게, 예전 같으면 의사처럼 좀 파워있는 사람을 소재로 삼아 그들의 부정적인 면모가 드러내면 격심한 반응을 보이곤 했는데, 이번에는 그런 반응이 전혀 없더라고요. 촬영협조를 얻고 있는 아주대만 해도 그래요. 맨 처음 아주대 홍보실에 공문을 넣었을 때만 해도 홍보실 반응은 ‘도와주고 싶어도 의사들의 안 좋은 구석이 많이 나오는 드라마라 원장님이 어떠실지 모르겠다’였다. 하지만 막상 공문을 집어넣자, 원장님은 두말 않고 찬성해주셨다. 그분은 이미 소설 <하얀거탑>을 읽어보셨더라.

 

 

 

<하얀거탑> 외에도 유난히 의학드라마가 많아졌습니다. 미국도 그렇고.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외과의사 봉달희>는 촬영 때문에 한번도 본 적이 없고, <그레이 아나토미>는 촬영하기 전에 세편 정도를 봤어요. 사실 병원이라는 공간이 이야기가 되는 곳이죠. 그 구성원인 의사나 간호사들은 계속 한 공간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거든요. 밥을 먹어도 그 속에서 먹고, 연애도 그 속에서 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러니까 이야기가 많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그러고 보면 이번에 촬영을 하면서 의사들을 다시 보게 된 면도 많아요. 예전에 의사라면 ‘열쇠 3개’ 운운하면서 부정적인 면이 많았는데 이번에 좋은 면을 많이 봤어요. 무엇보다 참 열심히들 하더라고요. 쉬지도 않으면서 일하고 짬짬이 공부도 해야 하고.

 

 

 

<하얀거탑>이라는 드라마를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그건 참 내게 어려운 질문인데… 쉽게 하기 힘든 진지한 이야기, 라는 생각은 들어요. 나 스스로 남 앞에서 진지해지기가 쉽지 않잖아요. 어색하기도 하고, 쿨하지 못하게 웬 진지인가 싶기도 하고. 하여간 그런 진지한 문맥이 형성되는 것 자체가 상당히 어려운 것 같아요.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거든요. 진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문맥을 형성시키는 것 자체가 힘든데, 이번에는 묘하게 뭔가 아다리가 맞아서 그런 문맥을 형성시켰고 진지하게 그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한마디로 소회를 말하면 <하얀거탑>은 진지한 드라마다, 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다면 <하얀거탑>은 본인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드라마인가요.

 

특별히 무슨 의미는 없고… 그저 한회씩 할 뿐이에요. 안 다뤄본 장르고… 하여간 너무 어려운 질문이거든요.

 

 

 

이 드라마를 만들기 직전 영화를 했다는 게 도움이 됐나요.

 

상당히 도움이 됐어요. 영화를 하기 전에는 나의 일을 대하는 태도가 꽤 진지하다고 생각했고, 집중력 또한 상당히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나 영화를 해보고 나니까 그동안 덜 진지했고 덜 집중했구나 생각하게 됐어요. 그런 면에서는 집중력도 더 생기고,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조금 더 진지하게 바라보게 된 것 같아요.

 

 

 

다음 작품은 어떤 구상을 하고 있나요.

 

아직 생각이 없어요. 한가지, 드라마를 하다보니 너무 힘이 들어서 빨리 영화를 해야지 하는 생각 밖에 없어요. 만약 영화를 하면 또 그게 더 힘들다고 느낄 것이고, 그러면서 드라마를 빨리 해야지, 할 것 같아요. (웃음)

 

 

(글) 문석

mayday@cine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