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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중기는 멋졌다
송중기의 ‘여림’이 <성균관 스캔들>을 바꾼 것처럼, ‘여림’은 송중기를 바꿔버렸다. 송중기라는 배우가 가진 스펙트럼은 어디까지일까. 송중기의 심장은 지금도 빠르게 뛰고 있다.
돌이켜보면 완연한 여름이었다. 송중기는 빨간 체크 패턴의 반팔 셔츠를 입고 있고 빈티지 소파 위에 앉아 지금처럼 <얼루어>와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그 며칠 전 올라온 기사에는 송중기가 박유천이 주연을 맡은 <성균관 스캔들>에서 바람둥이 여림 구용하 역을 맡아 잘금 4인방으로 활약할 예정이라는 내용이 짤막하게 나와 있었다. 여주인공이나 다른 배우들은 캐스팅이 진행 중이었다. 이것이 조선 시대 ‘꽃보다 남자’ 아니면 무엇이겠냐고, 도포 자락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이야기와 성균관 대학생으로서 성균관 유생을 연기하는 우연에 대한 이야기를 지나가는 얘기처럼 나눴다. 자세한 것은 아무것도 없던 때였다. 그저 막연히, 송중기의 이미지가 여림 역에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성균관 스캔들>이 전파를 타기 시작하면서, 우리가 송중기라는 배우를 너무 과소평가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진지한 듯하면서도 돌연 장난기를 발휘하는 변화무쌍한 표정과 능청스러움. 송중기는 그야말로 반짝반짝 빛났다.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조금씩 소개하는 드라마의 초반은 필연적인 지루함을 동반한다. 그때 생기를 불어넣은 건, 전적으로 ‘여림’이었다. 여림은 살아있는 캐릭터였고, 올해 드라마 세상에서 발견한 가장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였다. 솔직히 그가 여림을 이렇게 연기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트위터와 온라인 뉴스는, 송중기에 대한 글들로 한동안 바빴다.
“그 여름에 정말 고민이 많았어요. 잠이 안 올 정도였죠.” 처음에는 장난기 많고 능글능글한 전형적인 캐릭터로 연기하면 되겠지,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그게 아니었다. “걸오라는 캐릭터는 ‘짐승남’처럼 거친 남자예요. 그러나 그런 걸오는 실제로 터프하지 않을 것 같았어요. 어쩌면 걸오가 가장 마음이 여리고, 벌레 같은 것도 싫어하는 남자일지도 모르겠다고요. 오히려 섬세한 듯한 여림이 매사에 대범하고 겁이 없을 것 같았죠. 평면적인 연기는 안 되겠구나, 라는 걸 깨달았어요.” 원작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를 정도로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작품이라는 것도 부담이었다. 원작대로 하면 원작 팬들에게 새로움을 줄 수 없었을 거라고 송중기는 말했다. 그래서 그는 영민하게 캐릭터를 분석하고, 다른 캐릭터를 연구하며 조각들을 맞춰나갔다. <캐리비언의 해적>의 조니 뎁에게서는 흐느적흐느적 하는 걸음걸이나 빙그르르 도는 몸짓을, <동방불패>의 이연걸에게는 까불면서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모습을, <전우치>의 강동원에게서는 능글맞게 장난 치는 모습을 오려냈다. 영화를 다섯 번씩 보면서, 자기 것이 될 때까지 무작정 따라 했다. 여기까지 들으면 송중기란 배우는 모범생 타입의 연습벌레일 거라 짐작하기 쉽다. 하지만 나는 송중기가 빛났던 순간들은 오히려 본능적인 연기가 필요한 장면이었다고 생각한다. 성균관 신방례 에피소드가 그렇다. 미션에 실패한 이선준의 벌칙을 위해 심부름하는 아이들이 다리 위에서 소변을 볼 때, 여림은 아이들과 키 높이를 맞추며 부추긴다. 잠깐 스쳐가는 장면에서 보여준 그때의 표정은, 완벽한 장면 도둑의 그것이었다.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는 말에 빠르게 흥미를 보인 송중기는 이야길 듣더니 “아~!” 하면서 큭큭거리며 웃었다. “그 부분은 완전히 애드리브였어요. 아이들이 너무 귀여워서 풀 샷 연기할 때 저도 모르게 한 것인데, 감독님이 바스트 샷으로 다시 촬영하자고 했죠.” 촬영장에서 이런 일은 꽤 잦았다. 송중기의 머리와 본능이 여림이라는 캐릭터를 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제 경우엔 준비를 많이 할 수밖에 없었어요. 걸오, 선준, 윤희는 캐릭터가 분명하고, 각자 러브 라인이 있어요. 대본대로만 해도 멋있고 예뻐요. 하지만 여림은 그런 라인도 없고, 딱히 정해진 스토리가 없어요. 잘금 4인방 중 하나지만 주변 인물이에요. 캐릭터를 살리려면 노력을 해야 했어요. 그래서 더 치열하게 연구했죠. 드라마에서는 그걸 시쳇말로 따먹는다고 해요. 캐릭터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많이 생각하고, 많이 노력하는 것밖에는 답이 없었어요.” 시청률은 높지 않았으나 반응은 뜨거웠다. 드라마를 TV로 보는 대신 ‘다시보기’를 시청하는 비율이 많아서 시청률이 낮았다는 분석도 있다. <성균관 스캔들>은 첫 회의 두 배 시청률로 마침표를 찍었다. 제작사 관계자는 종방 후 인터뷰에서, ‘그 캐스팅으로 드라마가 가능하겠냐’는 주변의 우려가 많았다면서, 그 말을 뒤집은 게 보람 있고 기쁘다고 말했다. 송중기도 그런 부담을 안고 시작했을까? “캐스팅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았어요. 가장 중요한 배역을 맡은 유천은 연기가 처음이었죠. 하지만 유천은 연기를 정말 잘했어요. 다른 연기자들도 정말 좋았어요.” 러브 라인의 복선 같은 장면도 있었다. 네티즌들은 이선.준한테 차인 효은(서효림)과의 러브 라인을 점쳤고, 농담처럼 여림-걸오를 지지하는 세력도 많았다. “맞아요. 시놉시스에는 효.은과의 러브 라인이 있었어요. 하지만 전개되진 않았죠. ‘여림 걸.오설’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어요. 걸.오 앞에서 울어서 그런가? 남색의 마음으로 연기를 하진 않았지만 그런 생각은 있었어요. 남자를 좋아하는지, 여자를 좋아하는지, 애매모호하게 보였으면 하는. 상상해보면 여림은 양성애자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에게 온라인에서 꽤 화제가 되었던 비디오 클립을 보여줬다. 여림을 주인공으로 한 네티즌의 편집본인데, 그는 그 영상을 보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성균관 스캔들>은 모든 캐릭터가 자기가 가진 힘을 한 번씩 보여주는 장면이 있었는데, 여림의 경우엔 양반의 족보를 사들였다는 출신에 관한 것이었다. 조선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거상으로 그려진 아버지는 “다른 사람에게는 감기인 것이 너에게는 홍역이 될 수 있다”며 여림에게 금등지사를 찾는 일에서 손을 떼라고 말한다. 결국 여림은 우정을 위해 사람들에게 고백한다. “내 아버진 아들 자식에게 번듯한 집안을 물려주겠다고 족보를 사들였고, 아니 정확히는 양반의 허세를 사들였고 그게 바로 지금 눈앞에 있는 나다.” 그에게 이 장면은 꽤나 부담이었다고 한다. “전체 배우들의 의상비를 합친 게 제 의상비랑 비슷했어요. 당대의 패셔니스타였기에 청나라, 아랍, 일본 스타일 등 혼자서 다양한 한복을 입죠. 방도 혼자 쓰고, 모든 것을 가진 남자지만 중인 출신이라는 멍에가 있었어요. 그것이 그가 당파싸움이나 세상에 냉소할 밖에 없었던 이유죠. 그 에피소드가 방영될 무렵 며칠 동안은 촬영장에서도 우울했어요.” 그는 여전히 여림의 비밀이 밝혀지는 장면을 아쉬워한다. 이렇게 표현했다면, 저렇게 표현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나 만약 그 장면에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건 연기 외적인 부분에서 온 것이 컸다. <성균관 스캔들>의 마지막 두 회는 종결을 향해 냅다 뛰는 것처럼 바빴고, 여림의 클라이맥스 말고도 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종영을 앞두고 연장 요구가 빗발쳤지만 연장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4회 정도 더 했더라면 자연스럽게 마무리되었을 것 같아요. 너무 급했죠. 작가도, 스태프들도 다 힘들었을 거예요. 그 과정에서 희생된 캐릭터가 너무 많은 게 아쉬워요. 여림도 그 중 하나지만, 장의와 초선, 성균관 유생 친구들 등 다른 조연들의 이야기가 많이 사라졌죠. 촬영하고 버린 부분도 많아요. 마지막 장면에서 나온 여림의 모습에도 아쉬운 부분은 있죠.”
“이건 청춘 드라마가 아니라 성장 드라마라고 생각해요.” 전적으로 동의했다. 극중 캐릭터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받으면서 내면의 경계를 뛰어 넘고 성장한다. 여림은 친구들을 통해서 성균.관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신기한 건, 송중기 역시 여림을 통해 많은 부분이 성장했다는 것이다. 딱 반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는 달라져 있었다. 기사엔 나가지 않았지만, 지난번 인터뷰에서 송중기는 자신이 ‘몸치’라고 말하며, 뮤직.뱅크의 무대를 위해 포.미닛과 함께 춤 연습을 했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도저히 해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깨달았노라면서 웃었었다. 그러나 <성균관 스캔들>에서의 여림이나, <얼루어>의 뷰파인더 앞에 다시 선 송중기는 절대 ‘몸치’가 아니었다. 촬영을 하는 표정은 더 다채로워졌고, 음악에 따라가는 움직임은 크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럽고 흥겨웠다. 몸이 만들어내는 리듬은 지난번에는 보지 못했던 모습. 여림이라는 입체적인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스스로도 몰랐던 잠재력을 깨운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아니면 그가 <슬램덩크>의 강백.호처럼 정말 빠른 습득 능력을 가졌거나! “예전보다 시나리오와 대본이 많이 들어와요. 내가 잘되었구나, 하는 생각보다는 내가 앞으로 해볼 수 있는 것이 많아졌다는 점이 너무 좋아요. 기회가 늘어난 것에 대해 감사해요.” 송중기 스스로도 여림이 자신을 많이 바꿨다는 것을 인정한다. “연기의 맛을 더 느끼게 되었어요. 지금까지 평면적인 연기, 정적인 연기가 많았다면 여림은 연기하는 새로운 맛을 알게 해줬어요. 다음 역할도 또 새로운 것이 있겠죠? 그걸 찾으려고 노력해야죠.”
드라마 종방 후 좀 쉬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그는 정말 하루도 쉬지 못했다. 한 주에 <성균관 스캔들>, <런닝맨>, <뮤직뱅크>를 소화하는 건 정말 만만치 않았고, 드라마가 끝난 후에도 사정은 비슷했다고. 하지만 모두 즐겁게 하고 있다. “<런.맨>은, 최고예요.” 최근 <런.맨>의 시청률도 올라갔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엊그제는 <런닝맨>을 성균관 스캔들 콘셉트로 촬영했어요. <런닝맨> 촬영을 할 때는 늘 재미있게 놀다 와요. 매번 형들하고 노는 것 같아요. 일이라는 생각이 안 들어요.” 예능에서의 송중기는 자신이 돋보이기 위해 다른 사람을 타박하거나, 무리수를 던지는 일이 거의 없다. 송중기는 그 속에서의 모습이 실제 자신과 거의 비슷하다고 말했다. “재미를 위해 설정된 몇몇 부분은 있지만, 90%는 리얼 송중기예요.”
성공이나 인기 뒤에 마땅히 따르는 변화는 그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이 일을 하다 보면 주변의 상황이 바뀌기 시작하고, 결과적으로 자신이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두렵다고 말한다. “사람이니까 너무 피곤할 때가 있잖아요. 나도 모르게 ‘이 장면 좀 없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그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반성해요. 예전에는 한 신이라도 더 찍고 싶어 했는데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그러면서 자책을 하죠.” 눈치 챘겠지만 송중기는 매우 영리하며 동시에 솔직한 배우다. 송중기는 논란을 피해, 혹은 자신이 더 잘 보이기 위해 거짓을 말하는 타입이 아니다. 좋은 것을 좋다고, 싫은 것을 싫다고 말하는 것 이상으로 그는 생각하고 판단한다. 인터뷰를 할 때도 버릴 말이 없고, 늘 분명하게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말한다. 그리고 명쾌하게 행동한다. 처음 송중기의 시작은 고운 얼굴과 피부를 가진 모범생 배우, 신인치고는 생각보다 발음이 정확해서 대사 전달력과 진행력이 좋은 배우였다. 지금은? 배우로서 어디까지 도달할지 기대되는 존재다. 송중기는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보여주지 않았다.
몇 시간, 몇 번의 만남 속에서 진심과 진정성은 순간처럼 몇 번씩 스쳐 지나간다. 사람의 진심이란 말과 행동이면에 숨은 우물 같은 것인데, 그걸 낯선 사람에게 쉽게 열어 보이는 것은 쉬운 일도, 흔한 일도 아니다. 그러나 그를 만날 때면, 언제나 그의 진지함을 마주하게 된다. 그는 진지하게 연기를 하고, 진지하게 하루를 사는 타입의 남자다. 자신이 하는 일에 진지하다는 건, 진심만큼이나 멋진 일이다. 진지함은 그를 조금씩 더 높은 곳으로 데려다 줄 것이다. “2010년이 어떤 의미냐고요? 내겐 너무나 벅찬 해였어요. 전 지금도 가슴이 벅차요.” 어쩌면 지금까지 준비운동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요즘 많은 시간을 다음 작품을 고르는 데 쓴다. 그가 꼭 해보고 싶다는 강한 역할이나 악역이 들어왔으면 좋겠다. 그래서 또 새로운 모습으로 우릴 놀라게 해줬으면 좋겠다. 2010년의 송중기는, 정말 괜찮았다. 다음에는 그의 진심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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