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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캄 여행기24] 베트남 집의 양쪽 벽이 페인트칠 되어 있지 않은 이유

아딸라의 베트남 캄보디아 여행기 24

하롱베이-하노이 이동 / 무덤과 주택, 베트남의 역사

 

오늘 같이 보게 될 것은 베트남 하롱베이에서 하노이로 이동하는 4시간 동안의 풍경이다.

 

흔히 여행 후기등에 의해 볼 수 있는 하노이 시내나 하롱베이 바다 풍경등은 어느 정도는 관광지로서 잘 다듬어져  보여 주기 위해 준비된 베트남의 풍경이다. 이 영상 속에서는  농촌 베트남의 전원과 아주 작은 마을 풍경도 볼 수 있는데  아마도 이 영상의 가장 큰 미덕일 것 같다.

 

영상을 보다 보면 재미있는 것을 몇 가지 찾을 수 있다.

 

먼저 넓은 논바닥에 무덤이 있다는 것. 한 개만 외따로 있는 무덤도 있고 마을 전체 공동 무덤인 듯 무덤 군락을 이룬 것도 있다. 왜 우리 풍수설에 맞지 않게, 물많은 논에 무덤을 만들었을까?

 

그리고 집들의 모양이 앞면은 좁고 뒤로 길쭉하다는 것. 그리고 대부분 좁고 길쭉한 집들이 2층 이상이라는 사실. 예쁜 창문과 고운 색깔로 단장되어 있는 전면과는 달리 옆면엔 페인트칠조차 되어 있지 않아 날 시멘트 바른 그대로의 상태라는 것. 그 이유는 무엇일까?

 

 

 


 

 

 





영상이 좀 길다. 10분 30초나 한다..;; 보시기에 힘들 수도 있겠지만 이걸 만든 과정은 말로 설명하자면

더 구질구질하게 난관이 많았다. 무슨 일인지 편집을 다 마치고 추출 과정에만 들어가면 에러 메세지가 떠서 -

몇 개를 넣었다가 다시 뺐다가 마지막 자막을 또 빼고 10분을 맞춰보고 - 길어서 안되나 하고 ; - 거의 하루를

꼬박 다 잡아 먹은 끝에 겨우 완성을 했다. ㅜ  프로는 결과로만 말하는 거지 과정은 숨겨야 하는건데 -

내가 프로가 아닌 관계로 - ㅎㅎㅎ

 

 

전혀 개발이 안 되어 있는 허허벌판도 보이고, 예쁜 서양식 집들이 모여 있는 군락도 보인다. 주유소를 지나고 공사중인

건물 앞도 지나고, 뭔가 도로 정비중인 듯한 곳을 지나다 보면 기차길도 보인다. 제법 가게들이 모여 있는 다운타운도 지나고 -

고급 주택들이 모여 있는 주택가도 지난다. 그런 곳엔 보통 관공서같이 보이는 큰 건물들이 하나 정도씩 있다.

 

아침 9시가 조금 지난 시각, 도로를 쓸고 있는 사람들이 보이고 - 조금 큰 마을을 들어서자 플라스틱 의자들을 가게 앞에

 주륵 내다놓고 있는 식당(혹은 주점?)들이 보인다. 이런 곳은 대체로 길 가에 서 있는 사람들의 빈도가 높다. 아마도 시내인 듯.

 

마네킹에 옷을 입혀 유리문 안에 전시되어 있는 가게는 의상실이다. 예전 70년대 우리나라 풍경을 떠올리게 했다.

 

 

 

가이드 분의 베트남 역사와 어느 '따이한'의 기구한 삶, 성공에 관한 이야기를 듣다 말다 - 버스 안 틀어 주는

영화, '인도차이나'의 영상을 보려 노력했으나 너무 멀어 자막이 안 보이는 관계로 멍하니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어느 덧  출발한 지 3시간이 지나가고 -

 

 

12시가 넘은 시각이 되자 트레이닝복을 입고 자전거를 탄 채 우르르 나오는 소년, 소녀들이 보이는데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가는

학생들이다. 이 곳의 교복은 트레이닝복이란다. 학생들이 나오는 지역을 보면 시내... 인 듯 한데 한 쪽에 가게들이 모여 있는 데

비해 반대쪽은 또 논들이 가득하다. 길을 건너려고 잠시 멈춰 선 베트남의 멋쟁이 아가씨 모습도 보였다. - 영상에는 없다 ;;-높은 힐에

 상 하의 배색을  다르게 넣은 수트를 입은 모습이 한 눈에 척 봐도 멋쟁이였다. 멋쟁이 아가씨가 활보하는 곳은 대체로 시내 중심가이다... ^ ^

 

길에는 차들이 많이 안 보이고 간간이 오토바이들만 보인다. 이곳의 기름값은 우리 돈으로 약 1200원 꼴이다.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2만불, 베트남의 연소득 천불, - 대비해보면 이들에겐 기름값이 무지왕창 비싼 것이다.

 

1시 경이 되자, 드디어 하노이 시내로 진입하는 것으로 저 동영상은 마무리를 짓고 있다.

 

 

 


 

 

 

 

베트남의 무덤들 -

논 한 가운데에 모여 있다

 



중앙에 큰 무덤이 하나 있고, 뒷 쪽편을 보면  무덤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여기는 논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엔 물이 많은 논에 무덤을 쓰지 않는다.  마른 땅을 잘 찾아 산 속에 두는데 왜 여기는?


산 중에 야생 짐승들이 많단다. 그것들이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훼손한단다. 하는 수 없이 항상 돌볼 수 있는

자신들의 일터인 논에다가 무덤을 모신다고 한다. 장소야 어떻든 아끼어 보존하려는 그 마음은 같은 게 아닐까 싶다.


 

 


 


 

 

베트남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

자연과 외부 침략에 맞서 싸운 그들의 자긍심과 공동체 의식 




다리를 잇고 공사 중인 곳도 많이 보인다. 발전하는 베트남의 한 면인 것 같아서 보기가 좋다.

 

베트남은 한국을 무척 좋아한다. 각 나라 별로 TV 방송 채널을 하나씩 배정했는데 우리나라 방송만

3개인가가 나온다. 정부 시책 차원에서 한국 방송을 줄창 틀어준다고 한다. 한국의 도덕관념, 사고방식 등등

많은 것들을 부지불식간에 베트남 국민들이 받아 들였으면 하고 바란단다. 그것이 한국의 경제발전의 아주 조그마한

바탕이 된다고 믿는 모양이다...  이 나라 국민들에게 더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들이 이미 갖고 있는 것은

 상상 불허의 공동체 의식 - 이 나라 국민들의 단결은 우리의 상상을 넘는 수준이다. 여기에 더하여 -

 그들이 무언가 결심을 하고 목표를 향해 힘을 합친다면 분명히 무언가를 보여주게 될 것이다.

 

BC111년부터 천년이 넘도록 중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Viet족(越族)으로만 알려진 이 사람들은

그들 나름의 전통과 토착문화를 가지고 끈질기게 항거했다. 13세기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베트남의 Tran 왕조만이

몽고의 쿠빌라이 칸을 물리쳤고 식민지 종주국인 프랑스를 ‘디엔비엔푸’전투에서 패배시켰다.

이렇게 잘 훈련된 정신을 가진 민족이 “우리의 역사에는 투쟁 밖에 없다”며 세계최강의 미국과의

 힘겨운 전쟁을 하면서 그 ‘저항정신’을 가다듬고 있었다. 미국은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긴 세월 동안 타협이 불가능했던 베트남의 ‘민족주의’와 싸웠다는 것을 먼 훗날에 알았다고 한다.


 

이것은 베트남의 긴 역사에서 근원을 찾을 수가 있다. 베트남의 지리적 위치와 자연적 조건들은

베트남 민족을 끝없이 단합하고 투쟁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 왔다. 그들 투쟁의 역사를 한번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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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투쟁의 역사는 험난한 자연과 투쟁한 것과 외부 침략으로부터 투쟁한 것으로 나뉜다.

 

 

1. 자연과 투쟁하기

 

베트남 북부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통의 중심지였다. 북부가 이 같은 특징을 가질 수 있었던 데는 중국의 운남성에서 시작하여 베트남을 관통하는 전장 1200km에 달하는 홍강 이 있어서였다. 홍강은 비옥한 삼각주를 만들어 내어 농업의 토양이 되었고 또한 주요한 수로로서 베트남 내와 해외와의 무역의 루트가 되기도 했다. 또한 군사적으로 침입을 받는 침략의 루트도 되었다. 또 하나, 홍강은 이 민족들에게 큰 위협이 되기도 했는데, 매년 무서운 홍수를 일으켰던 때문이다.

 

중국에서 장장 725km를 흘러 다시 베트남에서 475km를 흐르는 홍강 은 매년 무서운 홍수를 일으켰다. 홍강은 주변에 크고 작은 많은 샛강을 갖고 있어 우기 때는 홍수의 위력이 더했다. 때문에 베트남의 투쟁사는 중국의 침략을 어떻게 막느냐 하는 일 이전에 홍강의 홍수를 어떻게 막느냐가 우선되었다.

 

홍수를 막는 일은 어느 일인(一人), 일족(一族), 일촌(一村)에 의해서 단순하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몇 개 마을의 연대로 해결될 일도 아니었다. 홍수를 막는 일은 홍강과 관련된 모든 사람의 과제였으며, 이를 위해 만들어진 제방은 475km가 좌우로 튼튼하게 연계될 때만이 제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제방사업은 비가 연중 한 번으로 그치지 않는 것처럼 연중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시간에 상관없이 면면히 이어져야 했다. 이 때문에 베트남의 역사를 일명 ‘제방을 쌓는 역사’라고도 한다.

 

자기 집안의 농사나 무역등의 일을 하는 틈틈이 정해진 시간에는 나라 전체적 규모로 이루어지는 이 제방쌓는 일에 나가 일을 했던 베트남 민족. 개인을 앞세워서는 결코 자연의 위협 앞에 누구도 무사할 수 없었다. 그들이 자연에 맞서 싸우기 위해 단결해야만 했던 것은 긴 역사를 지나 오면서 그들 안에 차곡차곡 쌓여온 민족성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홍강의 범람과 홍수를 극복하기 위한 피나는 투쟁 외에도 베트남인들은 개발과정에서 일찍부터 무서운 산짐승이나 정글들과도 싸워야 했다.

 

홍강의 범람과 홍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제방을 쌓고 또 무서운 짐승과 자연환경을 정복하기 위한 투쟁에서 베트남인들은 자연스럽게 광의의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공동체의식은 후술하게 될 인위적 요인과의 투쟁에서 더욱 강화되고 조직화되었다.

 

 

2. 외부의 침략에  투쟁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의 인도차이나반도의 동쪽에 위치하여 북쪽으로는 중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서쪽으로는 쯔엉(Truong)산맥을 경계로 라오스·캄보디아와 접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남서쪽에 이르기까지 동해와 타일랜드만에 연하여 있다. 해안은 크고 작은 많은 섬으로 둘러싸여 있다.

 

중국의 대륙과 해양을 잇는 이러한 반도적 특징은 베트남을 수많은 외침에 시달리게 했다.

 

기원전 40년에 이미 중국 침략에서 벗어나기 위한 투쟁이 있었다. 중국의 10만 대군과 두달간 대치하여 결국 승리하고 독립국의 지위를 얻어냈다. 그러나 몽골 의 등장으로 베트남은 1258년, 1285년, 1288년 등 모두 3차례 몽골의 침략을 받았다. 이것도 모두 승리했다.

 

베트남의 대몽항쟁(大蒙抗爭)의 승리는 몽골의 해상원정을 저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몽골의 동남아, 인도, 페르시아, 유럽으로의 진출을 좌절시켜 세계사의 흐름에도 기여했다고 할 것이다.

 

중국의 베트남침략은 명나라로 이어졌다. 베트남은 호왕조(Ho, 1400-1406) 1406년 중국에 다시 복속되어 22년의 투쟁 끝에 독립을 되찾았다.


 

그 후 베트남과 중국은 큰 분쟁 없이 종주종속관계로 이어져 오다가 1771년 떠이 선(Tay Son)농민운동이 발발하면서 다시 적대관계로 바뀌었다. 남북으로 분리되어 대립하고 있던 찡(Trinh)씨와 응우옌(Nguyen)씨를 떠이 선 3형제가 제압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청이 레 왕실의 요청을 받아 들여 20만 대군을 동원하여 베트남을 침략했기 때문이다(1789). 이전 1784년 응우옌 푹 아잉(Nguyen Phuc Anh)의 지원요청에 따라 태국이 2만의 군사와 300척의 전함을 이끌고 베트남을 침략했다. 베트남은 이들의 침략을 모두 물리쳤다.

 

 

 

중국의 침략 외에도 베트남은 쟈오주(交州) 서북쪽에 위치한 남조와 라오스, 남부에 위치한 점성과 캄보디아로부터 침략을 받았다.

 

 

1858년 프랑스와 스페인연합군으로부터 식민강점을 당했던 베트남은  1954년 7월의 제네바협정이 맺어지기까지  약 100년 동안 독립과 자유를 찾기 위해 프랑스 와 투쟁을 했다.

 

이 가운데 베트남은 미얀마루트와 장개석 지원루트의 단절을 위해, 남방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타이와 말레이로의 작전기지를 확보하기 위해, 그리고 인도차이나 자체의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자국으로 진격했던 일본과도 투쟁했다.

 

이어 베트남은 도미노이론에 근거하여 1954년의 제네바협정을 무시하고 전쟁을 일으킨 미국 과 1975년 4월 30일까지 투쟁을 했다. 가장 최근에는 1978년 12월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략에 대한 보복으로 이듬해 2월 국경선 1400㎞에 걸쳐 침략해왔던 중국 과 투쟁을 했다. (제 3차 인도차이나전쟁)


이 같은 장기간의 투쟁사는 공동체의 생성과 강화에 크게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의 자긍심을 한층 높여주는 기능을 했다.

 

 

 

 

이상은 [외국어대학 외국학종합연구센터 국제지역정보]에 있는 내용 중에서 발췌,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그들 근대 투쟁의 역사 중에서 3차까지 이어진 인도차이나 전쟁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은 분을 위해 더보기 안에 -

 

 

더보기

 그들 근대 투쟁의 역사 중에서 3차까지 이어진 인도차이나 전쟁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자.

 

프랑스의 베트남재식민지화로 발발한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이 베트남의 승리로 끝났다.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베트남전이다.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이 프랑스의 재식민지건설에 대한 인도차이나 민중의 항전이라면,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은 이념에 입각한 미국의 침략에 대한 인도차이나 민중의 저항이라 할 것이다.

미국의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의 참가는 1954년 3월 29일에 뉴욕의 해외 프레스 클럽에서 행한 아이젠하워의

 

・・・ 인도차이나는 전략적으로 한국보다 훨씬 중요함으로 방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도차이나를 상실하게 되면, 그 외의 여러 나라에도 도미노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인도차이나를 잃게 되면 태국과 필리핀은 전략적으로 포위당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동남아시아를 모두 잃게 되면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는 위협받는 양상이 될 것이다”.


는 언급에서처럼 순전히 도미노이론에 근거했다.

 

 


8년이란 전투기간을 포함하여 20년 동안 군사개입을 계속 했던 미국의 베트남전은 1972년 3월 29일 제2차 세계대전에 사용했던 총 화력의 4배에 달하는 800만 톤의 폭탄 투하, 연인원 35만의 미군 주둔, 2400억 달러에 달하는 전비 지출, 8000명의 공군을 포함한 5만 7000명의 미군 전사, 5700대의 비행기 손실을 안고 막을 내렸다. 베트남이 입은 인적 사망자는 200만에 이르렀다.

 

75년 4월 30일 월맹군이 사이공을 점령함으로써 이 30년에 걸친 전쟁은 월맹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현재 베트남은 80년대 중반 이후부터 도이 머이라는 개방정책을 펼쳐 서방 세계에 문호를 개방했다.

 

 

 

 


 

 

 

 

베트남의 주택들 -

 

앞면이 좁고 긴 형태, 그리고 옆면에 숨은 비밀

 


 

 

 

 

사진들은 모두 영상을 캡쳐한 것이다.

 

주택의 모양을 살펴 보면 모두 도로로 접한 부분은 좁고 뒤로 길쭉한 형태이다.

 

전면이 4m 정도로 일정한 주택들이 조롬히 붙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이것은 사회주의 국가인 베트남이 국민들에게 균일하게 토지를 배분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형태가 나왔다고 한다.

 

길을 중심으로 폭 2.5m~4m 정도의 땅이 배분되고 뒤쪽으로는 어느 정도 원하는 만큼 주택을 지을 수 있어서 대략 10~20m 정도의 길쭉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것의 유래를 살펴 보면 프랑스 식민 시절로까지 들어가게 된다고 한다.

 

당시 세금을 도로가의 건물 폭으로 매겼다고 한다. 그래서 전면 폭은 좁게 만들고 뒤로는 무한대로 넓힌 주택의 형태가 나오게 되었다고. @@

 

 

그리고, 건물들의 옆면을 보면 오른쪽과 같이 페인트가 칠해 지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

 

바로 옆 건물이 지어질 때 건물 사이 공간을 두고 지어지지 않고 다닥다닥 붙어서 지어진다.

 

그런데, 그 건물 자체의 외벽을 쌓아 올리는 것이 아니고 옆 건물의 벽을 공용으로 쓰게 된다. 즉, 옆 건물의 외벽이  그 건물의 거실 내벽이 된다고 한다. 어차피 색을 칠해 봤자 옆에 건물이 들어서면 그 건물 주인의 내벽이 될 것이므로 그 건물의 내부 색깔에 맞춰 다시 칠해져야 할 것이기 때문에 그냥 두는 것이라고 -

 

또한 이 지역의 여름은 아주 덥기 때문에 열을 조절하기 위해 층간 간격은 높게 되어 있다고 한다 -

 

 

 

아... 흥미롭다~ ^ ^

 

 

 


 

 

 

 

 



 

 


 

 

잠시 들른 쇼핑몰-

아베쎄 휴게소 -


 


 

쇼핑몰 안의 여자 화장실 입구 -

베트남 여자 모자인 논을 쓰고 있는 표지가 재미있다.

남자 모자는 우리나라 초랭이같이 생겼고 여자 모자는 원뿔형이다.


 

쇼핑몰 안은 원래 촬영 금지 - 한 컷 찍다가 앞에 오는 분께 저지당했다. ; 우리나라 백화점과 비슷하게 깨끗한 내부. 여기 파는 키플링 가방등은 모두 진품이라고 한다. 그리고 토속 기념품등도 많이 팔고 있었는데 기억에 남는 건 돌을 깎아 섬세하게 무늬를 새겨 넣은 보석함.

사고 싶었으나 가져 오는 도중에 깨어질 것 같아서 관뒀다. 대신 논을 쓴 실크 테디베어 한 개를 샀다. 여행기 1 에서 보실 수 있다.

 

 

 

 

그냥 링크해서 보여 드린다 - ;;

 

팔 다리가 빙빙 돌아간다 -

 

귀여운 것 -

 

실생활에 쓸모가 있는 물건도 좋겠지만 - 전혀 쓰잘데기 없는

이런 장식성 기념품도 "내 마음에는" 쓸모가 있다.

 

이런 것들을 잠시 지켜 보고 매만지는 시간은 바쁜 일상에 잠시 손을

놓고 온전히 이 물건에 집중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여행하던 장소와 시간, 그 곳의 기온, 하늘의 모습까지 순식간에

테디베어를 만지는 손 끝을 타고 지나간다..

 

 

 

떠나며 뒤로 멀어지는 아베쎄 휴게소의 모습을 마지막 컷으로 24편을 마친다 -

 

진한 핑크색의 건물 외곽에 한글로 적힌 아베쎄휴게소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한국인 관광객이 많다는 의미 -

 

다음은 하노이 시내로 들어가서 - 바틴 광장부터 돌아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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