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베르스(Karl Garbers :18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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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수학자 및 자연과학자. 1937~38년 베를린 의학사 자연사연구소 연구원이었고, 41~46년 라이프치히대학 강사를 거쳐, 47년 함부르크대학 강사가 되었다. 특히 이슬람교의 자연과학에 정통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Ein Werk Tabit bin Qurra’s Enfaer ebene Sonnenuhren》(1936) 등의 역주(譯註)가 있다. |
가생디(Pierre Gassendi :1592-16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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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철학자·물리학자·수학자. 프로방스 출생. 에크스대학에서 신학을 공부, 이 대학의 신학·철학 교수가 되었으나, 자연과학 연구에 전념하기 위하여 교수직을 사임하고, 1645년에 파리의 콜레주 루아얄의 수학교수가 되었다. 최초의 역작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에 대한 역설적 연구》(24)에서 명백히 밝힌 바와 같이, 사상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스콜라 철학 제파(諸派)에 대해 격렬한 비판적 입장을 취하였으며, 수학을 비롯한 자연과학 방면의 활약에서는 유물론적 세계관을 기조로 하였다. 그는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의 유물론적 원자론(唯物論的原子論)에 입각하여 물질과 독립된 시간과 공간의 존재를 논증하고, 이의 불멸(不滅)을 주장하였으며, 더 나아가서는 경험 지식을 모든 인식의 원천이라고 선언하여 R.데카르트의 합리주의와 형이상학적 개념에 반대하였다. 그가 주장한 원자론은 18세기 프랑스 계몽기의 감각론자(感覺論者)나 백과전서파(百科全書派)에게 큰 영향을 줌으로써 근대원자론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과학자로서는 천체의 관측과 지중해의 수로도(水路圖)작성에 업적을 남겼다. |
가우스(Carl Friedrich Gauss :1777-18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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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랄만한 수학적 재능을 지닌 가우스는 18세기와19세기에 걸쳐 수학의 거상으로 버티고 서 있다. 그는 19세기의 가 장 위대한 수학자이며 아르키메데스.뉴턴과 더불어 3대 수학자로 꼽힌다.
가우스는 1777년 독일의 브룬스빅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고집세고 교육적 식견이 없는 육체 노동자였다. 어머니는 비록 교육을 받진 못했지만, 그가 공부하는데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평생 동안 자식의 업적을 자부심으로 간직하며 살았다. 가우스는 어렸을 때부터 보기드문 신동이었다. 그는 세살 때 아버지의 부기장부에 있는 계산착오를 지적했다고 한다.
가우스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10세 때, 선생님은 학생들을 조용히 하게 하려고 1부터 100까지 더하도록 시켰고 가우스는 거의 즉시 답을 제출하였다. 마침내 모든 학생이 답을 제출하였을 때 선생님은 가우스 혼자만이 아무런 계산도 없이 5050을 정확하게 답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가우스는 등차수열의 합1+2+3+… +98+99+100을 단지 100+1=101, 99+2=101, 98+3=101 등등 으로 계산하면 50개의 쌍이 나오므로 답은 50×101, 즉 5050이라고 암산하였던 것이다. 말년에 가우스 는 자기는 말보다 계산을 먼저 배웠다고 농담을 하곤 했다. 가우스는 19세의 나이로 자와 컴퍼스를 가지고 정 17각형을 작도할 수 있음을 발견했는데 이것이 바로 일생을 수학에 바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가우스의 가장 위대한 단행본은 현대 정수론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중요한 책인 <수론 연구, Disquisitiones arirhmeticae>이다. 가우스는 천문학, 측지학, 전기학에서도 두드러진 공헌을 하였다. 1801년 새로운 방법을 도입하여 빈약한 자료를 가지고 당시 막 발견된 케레스(Ceres) 소행성의 궤도를 계산하였다. 807년 그는, 죽을 때까지 그 직에 있었던 괴팅겐 대학의 수학교수와 천문대장이 되었다.1821년 하노버의 삼각측량을 하였고, 자오선을 측정하고, 회광기(또는 일조계)를 발명하였다. 1831년 전기학과 자기학의 기초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동료 베버(Wilhelm Weber, 1804-1891)와 공동연구를 시작하여 1833년에는 전자석식 전신기를 고안하였다.
가우스는 1812년에 초기하급수에 관한 논문에서 최초로 급수의 수렴성을 체계적으로 고찰하였다. 곡면론에 관한 가우스의 걸작<일반 곡면론, Disquistiones generales circa superficies curvas>은 1827년에 발간되었고, 이로 인해 공간에서의 곡면에 관한 기하학의 연구가 시작되었다.
"수학은 과학의 여왕이고 정수론은 수학의 여왕이다."라는 유명한 얘기는 가우스가 한 말이다. 가우스는 흔히 다음과 같이 회자된다. "그는 너무 큰 거인이어서 우주를 한눈에 들여다 보았다."과학적 저술에 있어서 가우스는 완전주의자였다.대성당도 건축장의 마지막 조각이 치워질 때까지는 대성당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결과에 도달하기 위한 분석의 모든 흔적을 제거하면서 논문을 완전하게 하고, 간결하게 하며, 다듬고, 설득력 있게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가우스는 1855년 2월 23일 괴팅겐 천문대에 있는 그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그 직후 하노버의 왕은 가우스에 경의를 표하는 기념 메달을 만들도록 하였다. 이 70mm 메달은 오래지 않아(1877년) 하노버의 유명한 조각가이며 메달 제작자인 브레머(Friedrich Brehmer)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거기에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하노버의 왕 조지 5세가
수학의 왕에게
이후부터 가우스는 '수학의 왕'으로 일컬어진다 |
갈루아(Evariste Galois :1811-18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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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년 파리 근교에서 작은 마을의 시장의 아들로 태어나 그는 15세 때부터 비상한 수학적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두번이나 에콜 폴리네크니크에 입학하려 했으나, 그의 천재성을 전혀 감지못한 시험관의 형식적인 요구를 채울수 없어 입학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 후 또 다른 충격을 받았는데, 성직자로 부터 박해를 받고 있다고 느낀 아버지가 자살한 것이었다. 참을성 있는 갈루아는 결국 1829년 교사가 될 준비를 하려고 에콜 노르말(사범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민주주의에 찬동하여 1830년 혁명의 소동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수 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하였다. 그는 석방 직후 21세가 채 안 된 1832년에 애정문제로 인한 권총결투에 유인 되어 살해되었다. 갈루아는 당시 수학 교과서를 소설을 읽듯이 쉽게 통달하고, 계속해서 르장드르, 야코비, 아벨의 중요 논문을 읽고 나서 자신의 수학을 만들어 냈다. 17세때 매우 중요한 결과를 얻었으나, 프랑스 과학원에 보낸 두 논문이 보관 잘못으로 분실되어 좌절감만 더해 주었다. 방정식에 관한 짧은 논문이 1830년에 발간되었는데 이것은 매우 일반적인 이론에 확실한 근거가 된 결과를 낳았다. 그가 결투하기 전날 밤, 십중팔구 살해되리라고 믿은 그는 한 친구에게 학술상의 유언장을 썼다. 이 유언장은 발표되지 않은 발견 중의 일부에 관한 것인데, 이것은 후에 몇몇 위대한 수학자에 의하여 군론에 포함된다는 것이 판명되었으며, 소위 방정식의 갈루아 이론이라 불린다. 군론 개념에 기초를 둔 방정식의 갈루아 이론은 유클리드 도구만을 가지고 기하학적 작도를 할 수 있는 가능성에 의한, 그리고 근에 대한 대수방정식의 해의 존재 가능성에 대한 기준을 제공한다. 갈루아는 본질적으로 군(Group)의 연구를 창시하였으며, 군이라는 말을 최초로(1830년) 사용하였다. 군론에 대한 연구는 그 후 코시와 후계자들에 의하여 치환군의 특별한 형태로 수행되었다. |
갈릴레오(Galileo Galilei :1564-164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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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는 1564년 미켈란젤로가 죽은 날에 피사에서 가난한 플로렌스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17세 되던 해, 부모는 의학을 공부시키려고 그를 피사 대학으로 보냈다. 하루는 피사의 성당에서 예배를 보던 중 높은 천장에 매달린 큰 청동 램프에 정신을 빼앗겼다. 램프는 불을 켜기 쉽게 하려고 옆으로 끌어당겨져 있었는데 놓았을 때 그것은 점차로 진폭이 작아지면서 앞뒤로 진동하였다.그는 자신의 맥박수를 이용하여 시간을 재었는데 진동주기가 진폭의 크기와 관계없음을 발견하고 놀랐다. 그 후에 실험을 통해서 진자의 길이에만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과학과 수학에 관한 갈릴레오의 흥미가 바로 이 문제에서 비롯되었으며 대학에서 기하학 강의를 수강하면서 더욱 고무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는 의학을 포기하고 그 대신 훌륭한 재능을 지난 과학과 수학분야에 전념하는 것에 대한 부모의 허락을 얻어냈다. 갈릴레오는 25세 때 피사 대학의 수학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낙하 물체의 공개 실험을 했다고 전해진다. 얘기에 의하면 학생, 교수, 성직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피사의 사탑 꼭대기에서 하나가 다른 것의 열 배 무게인 두 금속 물체를 떨어뜨렸다. 그 두 금속 물체는 실제로 같은 순간에 땅에 떨어졌는데 이 사실은 무거운 물체는 가벼운 물체보다 빨리 떨어진다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부정한 것이다. 갈릴레오는 마침내 그 유명한 식 s=gt²/2 에 따라서 물체의 낙하거리는 낙하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법칙을 얻어냈다. 그러나 눈으로 확인된 갈릴레오의 실험도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가르치는 다른 교수들의 믿음을 깨지는 못했다. 대학의 권위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부정하는 갈릴레오의 무엄한 오만에 충격을 받아서 그 곳에서의 생활을 불편하게 만들었고 결국 1591년 교수직을 사임하기에 이르렀다. 이듬해 그는 파두아(Padua) 대학의 교수로 채용되었는데, 그 곳은 과학적 연구에 보다 호의적인 분위기였다. 여기에서 거의 18년 동안 갈릴레오는 실험과 강의를 계속했고 널리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1609년경 정탐 안경의 발명 소식이 갈릴레오에게 전해지자 그는 곧 리퍼쉐이가 만든 것보다 훨씬 우수한 정탐 안경을 만들었다. 갈릴레오는 연구를 거듭하여 지난번 것보다 더욱 강력한 네 개의 (멀리를 뜻하는 그리스어 tele와 보다를 뜻하는 skopos로 부터 telescope라 명명된) 망원경을 더 만들었다. 그는 목성의 네 개의 빛나는 위성을 발견하였고, 큰 물체 둘레를 작은 물체가 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뚜렷하게 확증시켜 주는 관찰을 하였다. 갈릴레오는 또 그의 망원경으로 태양의 흑점, 달 표면의 산, 금성의 위상, 토성의 고리 등을 관찰하였다. 그러나 이 발견은 태양은 완벽하며 지구와 사람은 우주의 중심에 있다고 주장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를 받아들이고 있던 많은 성직자의 편협한 반대를 한 번 더 불러일으킬 따름이었다. 한 성직자는 심지어 갈릴레오를 목성의 네 개의 위성을 망원경 안으로 끌어들인 점을 들어 고소하기까지 했다. 마침내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뒷받침하는 책을 출간한 다음 해인 1633년에 종교 재판소에 소환되었는데, 거기에서 이 늙고 병든 사람은 고문의 위협 아래 과학적 발견들을 철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책은 200년 동안이나 금서 목록에 올라 있었다. 양심을 위증함으로써 늙은 학자의 삶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무해한 과학적 연구는 계속하도록 허용되었으나 그는 실망하였고 종교 재판소의 감시 아래 실제 죄수인 채로 1642년 1월에 자신의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실험과 이론의 조화로서의 과학의 현대정신은 갈릴레오의 은혜를 입은 바 크다. 그는 자유낙하 물체의 역학을 세웠고, 후에 뉴턴이 그의 과학을 건설할 수 있었던 일반적인 역학의 기초를 쌓아 올렸다. 그는 진공 상태 안에서 투사된 물체의 경로가 쌍곡선 형태라는 것을 깨달은 최초의 사람이었고, 운동량을 포함하는 법칙들을 추측하였다. 그는 최초의 현대식 망원경과 한때 매우 유행했던 부채꼴 모양의 컴퍼스를 발명하였다. 19세기 칸토어(Cantor)의 집합론의 근본적인 관점이며 현대 해석학의 발전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 무한집합들 사이의 상등 개념을 이미 그가 깨닫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갈릴레오의 명제들이 역사적으로 커다란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갈릴레오는 그와 동시대인인 유명한 케플러를 질투했었던 것같다. 왜냐하면 케플러가 1619년경 행성 운동의 세 가지 중요한 법칙을 발표하였으나 이것은 갈릴레오에 의하여 완전히 무시되었기 때문이다. 갈릴레오는 생애 내내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다. 따라서 그는 과학자로서 관찰과 추론에 의하여 어쩔 수 없이 얻게 된 견해가 자신이 독실한 신자라고 여기는 교회의 성경에 위배되어 유죄판결을 받은 것을 알고 괴로워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과학과 성경 사이의 관계는 스스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때때로 많은 과학자들이 이러한 곤경에 처하곤 했다. 예를 들어 19세기 중엽 다윈의 진화론을 성경의 창조론과 조화시키기는 어려웠다. |
골드바흐(Christian Goldbach :1690-17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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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바흐의 추측'을 비롯해 정수론의 발전에 공헌한 수학자이다. 1725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제국 아카데미에서 수학, 역사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2년 뒤 표트르 2세의 개인 교사가 되어 모스크바로 갔고, 1742년부터는 러시아 외무부에서 일했다. |
괴델(Godel, Kurt :1906-19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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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태생의 미국 수학자. 엄밀한 수학체계라도 그 안에는 그 체계 내의 공리(公理)에 기초하여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존재하므로 산술의 기본공리들은 모순이 될 수 있다는 ‘괴델의 정리’를 발표하였다. 이 정리는 모든 수학에 대한 확고한 기초를 마련해주는 공리를 세우려던 지난 100년간의 노력에 결말을 주었다. 빈대학교 교수를 지냈고, 후에 미국으로 이민하여 프린스턴고등연구소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현대 수학의 고전으로 꼽히는 《집합론 공리와 선택공리, 일반화된 연속체 가설 사이의 무모순성》을 저술하였다. |
구르사(Goursat, Edouard-Jean-Baptiste :1858-1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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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수학자. 랑자크 출생. 툴루즈 이과대학 강사(1881∼85) 파리 이공과대학 연습교사(96 이래), 소르본 대학의 미·적분학 교수(97)를 지냈다. 함수론·미분방정식론·불변식론(不變式論)·곡면론 등 분야에 대한 공헌이 크다. 주요저서로는 《Th?rie des fonctions alg?riques et de leurs int?rales》(Appel과의 공저, 1896) 《Cours d analyse math?atique》(1905) 등이 있다. |
굴베르그(Cato Maximilian Guldberg :1836-19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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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화학자·수학자. 크리스티아니아(지금의 오슬로) 출생. 크리스티아니아대학에서 화학·수학·물리학을 공부한 후, 1861년에 왕립 육군사관학교의 수학 및 열역학 교사를 지냈다. 69년에는 모교인 크리스티아니아대학의 응용수학 교수가 되었다. 64년 의형(義兄)인 화학자 P.보게와 함께 ‘질량작용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이는 P.E.M.베르틀로와 생지르의 화학평형에 관한 실험결과(1862)를 바탕으로, 보게가 300회 이상의 실험을 하고 굴베르그가 이를 수식(數式)으로 정리하여 법칙화한 것이다. 처음에 쓴 노르웨이어 논문과 두 번째의 프랑스어 논문(67)은 학회의 인정을 받지 못했으며, 77년에 이 법칙을 독자적으로 발견한 J.H.반트호프의 영향을 받아 독일어로 쓴 세번째 논문(79)이 겨우 주목을 받았다. 굴베르그는 67~90년 분자론에 입각하여 기체·액체·고체의 일반상태식(一般狀態式)을 구하는 여러 가지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물리화학의 응용에도 관심이 있었으며, 또 75년에는 노르웨이에 미터법을 채택하게 하였다 |
그라스만(Hermann Gunther Grassmann :1809-18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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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스만은 독일의 슈테틴에서 1809년에 태어나서 1877년 그곳에서 죽었다. 그는 매우 폭넓은 지적인 취미를 가졌다. 수학뿐만 아니라 종교, 물리학, 화학, 독일어, 라틴어,역사, 지리학의 선생이었다. 그는 물리학에 관한 논문을 썼으며 독일어, 라틴어와 수학 교과서를 저술하였다. 격동기인 1848년과 1849년에 정치적 주간지의 공동 발행인을 지냈다. 음악에 관심이 있어서 1860년대에는 일간지의 오페라 평론가를 지냈다. 독일 식물에 관한 문헌학적 논문을 준비하였고, 전도 신문을 편집하였으며 음성학의 법칙들을 연구하였고, 리그베다(Rig-veda)에 관한 사전을 펴냈고, 리그베다를 시로 번역하였으며 세 가지 소리로 민요의 화음을 만들었고, 위대한 논문 <광의 양론, Ausdehnungslehre>을 저술하였다. 그라스만이 그의 유명한 <광의양론>의 첫번째 판을 간행한 때가 1844년이다. 불행하게도 해설이 부족하고 설명이 모호하여 이 논문은 동시대 학자들에게 실제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다. 1862년 간행된 개정판에서도 더 나아진것은 없었다. 그라스만은 그의 논문이 관심을 끌지 못하자 실망하여 산스크리트어와 문학의 연구에 전념을 하기 위하여 수학을 포기하였는데, 이 분야에 수많은 훌륭한 논문을 기고하였다. 그라스만은 슈타이너(Jacob Steiner)의 뒤를 이어 베를린 실업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쳤던 1834년에서 1836년까지를 제외하고, 전 생 애를 고향 슈테틴에서 보냈다. 그는 대학 교수직을 희망하였으나 전적으로 중등 교육직에만 있었다. 부친은 슈테틴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수학과 물리의 교사였다. 아들 헤르만 그라스만(Hermann Grassmann) 역시 수학자가 되었다. 그의 부친은 수학에 관한 두 권의 책을 저술하였고 아들은 사영기하학에 관하여 논문을 썼다. |
그레고리(James Gregory :1638-16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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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의 수학자·발명가. 미적분학의 고안에 공헌하였으며, 반사망원경을 발명하여 이것을 저서 《Optica Promota》(1663)에 기재하기도 하였다. 또한, 기하학적 도형의 면적측정에 관한 독자적 방법을 발표하여 호이겐스와 논쟁을 벌였으며, 망원경에 관하여 아이작 뉴턴과 서신을 교환한 일도 있다. 세인트앤드루스대학(1669)과 에든버러대학(74) 교수를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Geometriae pars universalis》(68) 《Exercitationes geometricae》(68) 등이 있다. |
그로탕디에크(Alexander Grothendieck :19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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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 유년시절은 독일에서 지냈으나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하여 프랑스로 건너온 후로는 주로 그곳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국적이 없다. 초기에는 선형위상공간, 특히 텐소르적(積)과 핵형공간(核型空間)의 이론으로 공헌을 하였으며, 대수기하의 기초를 거시적으로 일반화하여 리만베르 예상의 해결 열쇠이며 기본이기도 한 이론을 거대한 규모로 만들어낸 것이 가장 중요한 업적이다. 1968년경부터 현대의 산업사회와 군사적인 위협으로부터 지상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서바이벌 운동’을 제창하여, 이를 위하여 파리의 고등연구원 교수직까지도 사임하였으나 후에 서바이벌 운동에서도 손을 뗐다. 피루즈상(賞)을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Espaces vectoriels topologiques》(1958) 《El?ents de g?m?rie alg?rique》(60∼65) 등 |
그린(George Green :1793-18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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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수학자. 가업을 이어 빵 제조업에 종사하는 한편 수학을 독학했다. 학자들과는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연구 결과는 알려지지 않은 채 있다가, 그 일부분이 우연히 K.F.가우스에게 발견되었고 W.T.켈빈에 의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전자기현상(電磁氣現象)의 수학적 이론을 만들려고 시도, 퍼텐셜함수를 도입하여 ‘그린의 정리(적분정리)’를 유도하였고 그린함수를 결정하였다. 이렇게 하여 전자기학(電磁氣學)의 해석적 취급이 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수학의 일부분으로서의 퍼텐셜론(論)을 향한 길이 열렸다. 저서로는 《전기학 및 자기학(磁氣學)의 이론에 수학해석을 응용하는 시도》(1828)가 있다. |
남병길(Nam Byoung Kil :1820-18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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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병길은 조선 시대 철종 때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이다. 그의 형인 남병철(1817~1863)과 함께 조선 후기 수학자 형제로 유명하다. |
미국의 수학자. 웨스트버지니아주(州) 블루필드 출생. 프린스턴대학에서 교환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1994년 J.하사니, R.젤텐과 함께 노벨 경제학상을 공동수상하였다. 60년대 중반부터 내시는 기업체간의 상호작용과 시장움직임을 예측하기 위해, 체스나 포커와 같은 일반적인 게임에서 적용되는 전략에 초점을 두고 연구하여 내시균형이라는 개념을 정립하였다. 게임에서 각 경기자들이 어떤 특정한 전략을 선택하여 하나의 결과가 나타났을 때, 모든 경기자가 이에 만족하고 더 이상 전략을 변화시킬 의도가 없을 경우를 균형이라 한다. 그런데 이 중 상대방의 최적전략에 대해서만 최적인 전략을 찾아내서 균형의 개념을 정립하는 것, 즉 내시균형은 상대방의 최적전략에 대한 본인의 최적전략이라는 성격을 띤다. |
네이피어(John Napier :1550-16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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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버지가 겨우 16세 때 태어난 네이피어는 귀족 가문의 대저택인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근교의 머쉬스톤 성에서 대부분의 생애를 보냈으며 그 시대의 정치와 종교적 논쟁에 대부분의 정열을 쏟았다. 그는 격렬한 반천주교주의자였고 녹스 (John Knox)와 제임스 1세의 주장을 옹호하였다. 네이피어는 미래의 여러 가지 잔인한 전쟁무기들에 대하여 설계도와 그림을 곁들여 예언한 책을 저술하였다. 그는 미래에 4마일 반경 안의 1피트 크기 이상의 모든 생물을 없앨 수 있는 대포와 물속을 항해하는 기구가 만들어지고, 모든 방향으로 총알이 발사될 수 있는 움직이는 총구를 가진 전차가 발명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실제로 제 1차 세계대전 중에 이것들은 기관총, 잠수함, 탱크로 각각 실현되었다. 네이피어의 뛰어난 독창력과 상상력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정신적으로 이상한 사람으로 여겼으며 어떤 사람은 그를 마법사로 여기기도 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많은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다. 언젠가 그는 그의 하인 중 누구든 도둑질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수탉이 그를 알아낼 수 있다고 얘기하였다. 그는 하인들을 깜깜한 닭장 속으로 들여보내 수탉의 등을 한 번씩 두드리게 하였다. 네이피어는 하인들 몰래 미리 그 수탉의 등을 까맣게 칠해 놓았는데, 죄가 있는 하인은 수탉의 등을 두드리기가 두려워서 깨끗한 손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또 이런 사건도 있었다. 네이피어는 이웃집 비둘기들이 자기 집의 곡식을 먹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이웃집 주인에게 비둘기가 날아오지 못하게 하지 않으면 비둘기를 울에 가두어 버리겠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비둘기를 잡는 것이 실제로 불가능하다고 믿은 이웃집 주인은 네이피어에게 잡을 수 있으면 잡아보라고 말하였다. 다음 날 이웃집 주인은 그의 비둘기들이 네이피어의 잔디밭에서 비틀거리고 있고 네이피어가 조용히 그것들을 커다란 자루 속으로 집어 넣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네이피어는 술에 담근 콩을 잔디에 뿌려서 비들기들을 취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는 정치적촵종교적 논쟁으로부터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수학과 과학의 연구로 자신을 유인하였는데 그 결과 비범한 네 가지 연구 결과가 현재 수학사에 기록되고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로그의 고안, (2) 직각구면삼각형을 푸는 데 이용되는 공식인 원형 부분의 법칙(The rule of circular parts), (3) 빗각구면삼각형을 푸는 데 유용한 네이피어의 유동식(Napier's analogies)으로 알려진 네 개의 공식 중 적어도 두 개의 삼각법의 공식, (4) 네이피어의 막대 (Napier's rods 또는 Napiers's bones)라 불리는, 수를 기계적으로 곱하고, 나누고, 제곱을 구하는 데 이용되는 기구의 발명 등이다. |
노이만(독일)(Franz Ernst Neumann :1798-18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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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물리학자·광물학자·수학자. 브란덴부르크 출생. 1829년 쾨니히스베르크대학 교수가 되어 광물학 및 물리학을 강의하였다. 31년 열학(熱學)을 연구하던 중 고체의 분자열에 관한 노이만 법칙(노이만-코프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고체물질의 분자열은 이것을 조성하고 있는 원소의 원자열의 합과 같다는 법칙으로 고체원소의 원자열에 관한 뒬롱-프티의 법칙을 화합물까지 확장한 것으로, 통상 고체상태에서는 얻을 수 없는 기체의 고체상태에서의 원자열을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 또 광학(光學) 연구도 하여, 《빛의 복굴절의 이론》(32)에서는 횡파로서의 빛의 매질(媒質) 안에서의 복굴절을 논하였고, 압력·온도의 영향하에서의 비결정질(非結晶質) 내의 복굴절에 대해 처음으로 연구하였다(1841). 전자기학 분야에서는 M.패러데이에 의해 발견된 감응전류(感應電流)에 대해 렌츠의 법칙을 출발점으로 하여 수학적 이론의 수립을 최초로 시도하여 역학(力學)의 퍼텐셜 개념을 도입, 전기저항에 관한 옴의 법칙과 결합시켜 일반적인 정식화(定式化)에 성공해 ‘감응전류에 관한 노이만의 법칙’을 고안해냈다. 78년 구함수(球函數)에 관한 논문 을 발표하였다. |
노이만(헝가리)(Johann Ludwing von Neumann :1903-19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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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출신의 미국 수학자.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생. 은행가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수학에 재능을 보였다. 1919년 베를린대학 및 취리히대학에서 공부하고 부다페스트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27년 베를린대학 강사로 있다가 30년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대학 강사, 이어 수리물리학(數理物理學) 교수를 거쳐 33년 프린스턴고등연구소 교수가 되었다. 37년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고 43년 이후에는 미국 원자력위원회에서 활약하였다. 그의 연구는 수학기초론에서 시작하여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설정 등 수리물리학적 과제를 대상으로 하고, 또한 수리경제학(數理經濟學)이나 게임의 이론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였다. 현대적 수학기초론의 출발점이 된 《집합론의 공리화(公理化)》(28)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27) 《힐베르트 공간론》(27) 등은 모두가 20대에 이룬 업적이었다. 그리고 《게임의 이론》(28) 《에르고드이론의 연구》(32)를 집필하고, 또 《위상군론(位相群論)》에서는 《콤팩트 위상군에서의 힐베르트 제5문제의 해결》(33)이나 《군(群) 위의 개주기(槪週期) 함수론》(34)으로 군 위의 조화해석(調和解析)의 연구를 발전시켰다. 44년에는 O.모르넨슈테른과 《게임이론과 경제행동》을 저술하였으며, 그 이후에는 고속도 전자계산기(MANIAC:기상연구에 이용된 초기의 컴퓨터)의 연구·제작과 수치해석에 기여한 공로로 페르미상(Fermi賞)을 수상하였다. 그 외에 머리(Murray)와 함께 작용소환론(作用素環論)·연속기하(連續幾何)를 창시하였다. 45년에는 계산기계 연구소장, 54년에는 원자력위원이 되었다. |
뇌더(Amalie Emmy Noether :1882-1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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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여자 수학자 중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여겨지는 뇌더(Amalie Emmy Noether)는 1882년 독일의 에를랑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막스 뇌더(Max Noether, 1844-1921)는 에를랑겐 대학교의 뛰어난 수학자였다. 막스 뇌더는, 같은 대학교에 속해 있으며 뇌더가족의 절친한 친구인 고르돈(Paul Gordon, 1837-1921)과 마찬가지로 대수학자였다. 그 대학교에서 공부한 에미 뇌더도 대수학자가 된 것은 당연하다. 그녀는 1907년 고르돈의 지도 아래 박사논문<삼항쌍 이차형식에 대한 완전한 불변계에 관하여, on Complote System of lnvarianta for Ternary Brquadratic Porns>썼다. 1910년 고르돈이 퇴임하자 소거이론과 불변량 이론에 특히 관심을 가진 다른 대수학자 피셔(Ernst Fischer, 1875-1959)가 1년 후 그 자리를 계승하였다. 그가 뇌더에 끼친 영향은 미우 겼고, 그의 지도 아래 그녀는 고르돈의 논문의 연산적 측면에서부터 힐베르트의 추상 공리적 접근까지 열심히 공부하였다. 에를항겐을 떠난 후 뇌더는 피팅겐에서 공부하였는데, 그녀는 여자 강사를 반대하는 몇몇 교수들의 반대를 극복하고, 1919년에 자격시험을 통과하였다. 1922년 피팅겐의 특별교수가 되었고, 게르만 국가혁명의 월권 아래 많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학술활동이 금지된 1933년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그 직후 독일을 떠나 펜실메이니아에 있는 브라이언 모어 대학의 교수직을 얻고, 프린스턴의 고등 연구소의 연구원이 되었다. 그녀의 일생에 있어서 미국에 있는 기간이 아마 가장 행복하고 가장 풍요한 시기였을 것이나 그녀는 창조력이 최고조에 달한 1935년에 53세의 나이로 죽었다. 뇌더는 가난한 간사였고 교수법도 부족했지만, 추상대수학 분야에 족적을 남긴 놀랄 만한 숫자의 학생에게 영감을 주었다. 추상적 환과 이데알 이론을 연구한 그녀의 제자들은 현대 대수학의 발전에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그녀의 장례식에서 아인슈타인은 그녀를 열렬하게 칭찬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녀를 막스 네더의 말로 표현했을때 에드먼드 란도 (Edmund Landau)는 '막스 네더는 에미 네더의 아버지'라고 응수했다. 에미 네더 탄생 100주년 기념 행사가 1982년 브라이언 모어 대학에서 열렸다 |
뉴만(John von Neumann :1903-19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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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만은 게임이론이라는 유명한 수학의 한 분야를 발전시킨 미국의 수학자였다( 903 - 1957 ). 그는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자라 베를린과 부다페스트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는 1930년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1933년 이후로는 뉴저지의 프린스턴에 있는 The Institute for Advanced Study (응용 학문 연구소)에 합류했다. 그는 1937년에 미국 시민이 되었으며 2차 대전 중에는 The Los Alamos 원자 폭탄 프로젝트에 고문으로 일했다. 1955년 3월에는 미국 원자력 위원회 (U.S. Atomic Energy Commission)의 위원이 되었다. 뉴만은 세계적으로 뛰어난 수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양자 역학 이론, 특히 연산에 대한 환(ring)의 개념(뉴만 대수로 알려져 있다)에 대한 중요한 공헌으로 주목받았다. 또한 주로 통계학과 수치 해석 등의 응용 수학 분야에서 이루어진 그의 선구자적인 업적은 그를 더욱 빛나게 했다. 그는 또한 초고속 전자 컴퓨터를 고안한 것으로 유명한데 1952년 신축적인 저장 프로그램을 이용한 최초의 컴퓨터, 매니악 I (the Maniac I)을 만들어 냈다. 1956년, 원자력 위원회는 전자 컴퓨터의 고안과 이론에 대한 지대한 공로를 인정하여 그에게 엔리코 페르미 상(The Enrico Fermi Award)을 수여했다. |
뉴턴(Issac Newton :1642-17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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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은 갈릴레오가 죽은 해인 1642년 성탄절에 울즈돕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뉴턴이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농부였으며 그래서 그도 농사에 전념해야 했다. 그러나 어린 그는 기계 모형을 고안하는 것과 실험하는 것에 뛰어난 재능과 즐거움을 나타냈다. 그래서 생쥐의 힘으로 동력을 얻어 밀을 빻아 밀가루를 만드는 장난감 방앗간과 물의 힘으로 작동하는 나무시계를 만들었다. 그 결과 학교 교육을 더 받게 되어 18세 때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였다. 이 시기에 스타우브리지 박람회에서 우연히 산 점성술에 관한 책을 읽고 수학에 관심을 집중하게 되었다. 그는 유클리드의 <원론>을 읽었는데 그것이 너무 명백하다는 것을 알았고, 그러고 나서 데카르트의 <기하학 ,La geometrie>을 보았는데 다소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또한 오트레드의 <수학의 열쇠, Clavis>, 케플러와 비에트의 책, 그리고 월리스의
<무한의 수론, Arithmetica infinjtorm>을 읽었다. 이런 수학책들을 읽고 난 후 수학을 창조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려 23세 때인 1665년 초에 일반화된 이항정리를 알아냈고, 오늘날 미분학으로 알려진 유율법(流率法 )을 만들었다. 그 해와 이듬 해 동안 런던에 페스트가 유행하여 대학이 휴교에 들어가서 울즈돕으로 내려와 지냈다. 이 기간 동안에 미분학을 곡선의 임의의 점에서의 접선과 곡률반경을 구할 수 있는 정도까지 발전시켰다. 그는 또한 다양한 물리학 문제에 흥미를 갖고 광학에 관한 첫번째 실험을 하였으며 만유인력이 기본 원리를 공식화하였다. 뉴턴은 1667년 케임브리지로 돌아와서 2년 동안 광학 연구에 매달렸다. 1669년 배로가 뉴턴을 위하여 루카스 교수직을 사임함으로써 18년간의 대학 강의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병적일 정도로 논쟁을 싫어하여 그의 발견들은 발견한 후 오랫동안 발표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 발표를 미루는 습관 때문에 나중에 미적분학의 발견의 전후에 관련하여 라이프니츠와 부적절한 논쟁을 겪게 된다. 이 논쟁 때문에 뉴턴을 지도자로 지지하는 영국 수학자들은 대륙과의 수학 교류를 단절하였고 이로 인해 영국의 수학 발전이 거의 100년이나 늦어졌다. 1673년 부터 1683년까지의 뉴턴의 대학 강의는 대수학과 방정식론에 전념된 것이었다. 그가 달의 운동에 대한 연구와 관련하여 지구의 반지름의 새로운 측정법을 사용함으로써 만유인력 법칙을 증명한 때가 바로 이 시기인 1679년이다. 그는 또한 태양과 행성을 무거운 질점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는 가정에서 만유인력 법칙이 케플러의 행성운동 법칙과 양립함을 확증하였다. 1703년 영국 학술원장에 피선되어 매년 재선되었으며 죽을 때까지 그 직에 있었고 1705년에는 나이트 직위를 받았다. 그는 1727년 84세의 나이에 만성적이고 고통스러운 병으로 세상을 떠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뉴턴의 가장 위대한 저서는 말할 것도 없이 <프린키피아>인데, 거기에는 완전한 역학계와 천체 운동현상의 완전한 수학적인 공식화가 처음으로 나타난다. 이 책은 과학사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고 가장 많은 찬사를 받은 책임이 분명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아마도 유율법에 의하여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리들은 군데군데 약간의 단순한 극한 개념을 써서 순전히 고전적인 그리스 기하학을 이용하여 증명되었다는 점이다. 상대성 이론이 발견되기 전까지 모든 물리학과 천문학은 뉴턴이 이 책에서 만든 좌표계의 가정 위에 세워졌다. 뉴턴은 그 시대의 수학자들 사이에 알려진 다양한 난제 중 어느 것도 풀지 못한 적이 없었다. 그 중 하나는 라이프니츠가 제기하였는데 그는 곡선족의 직교궤도를 구하여 풀었다. 뉴턴은 숙련된 실험가이자 뛰어난 분석자였다. 수학자로서 그는 거의 전 분야에서 이제까지 배출된 학자 중 가장 훌륭하다고 평가되고 있다. 물리학적 문제에 대한 통찰력과 수학적으로 다루는 능력은 아마 어느 누구도 결코 추월할 수 없을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태초부터 뉴턴이 살았던 시대까지의 수학을 놓고 볼 때, 그가 이룩한 업적이 반 이상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그의 위대성에 관한 많은 증명서들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라그랑주는 "뉴턴은 최상의 행운아이다. 왜냐하면 단지 한 번만 우주의 체계를 세울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했다. 이러한 찬사에 비하여 자기 업적에 대한 자신의 평가는 다음과 같이 겸손하다." 나는 내가 세상에 어떻게 비쳐질지 모른다. 하지만 내 자신에게 나는 진리의 거대한 바다가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은 채 내 앞에 놓여 있고, 나는 그 바닷가에서 놀며 때때로 보통보다 매끈한 조약돌이나 더 예쁜 조개를 찾고 있는 어린애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언젠가 선배들에게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멀리 보았다면 그것은 단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라고 겸손하게 설명하였다. 뉴턴은 가끔 하루에 18 내지 19시간을 집필하였고, 놀랄 만한 집중력을 가졌었다고 전해진다. 그가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넋이 빠지는 것을 입증하는, 꾸며낸 듯한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 줄거리는 이렇다. 뉴턴이 몇몇 친구를 초대하여 저녁을 대접할 때, 포도주 한 병을 가지러 방에서 나갔다가 딴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어 자기가 왜 나왔는지조차 잊어버리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중백의를 걸쳐 입고 교회당으로 가벼렸다. 또 한 일화로, 뉴턴의 친구인 스턱켈리 박사가 닭요리로 저녁을 먹기로 그를 방문하였다. 뉴턴은 외출중이었으나 식탁에는 이미 요리된 닭이 뚜껑 덮힌 접시에 차려져 있었다. 저녁 약속을 잊어버린 뉴턴은 약속시간을 너무 지체하였고 스턱켈리 박사는 마침내 뚜껑을 열고 닭요리를 먹고 나서 뼈를 뚜껑 덮힌 접시에 담아 놓았다. 뉴턴이 나중에 와서 친구와 인사하고 식탁에 앉아서 뚜껑을 열었으나 뼈 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는 "아참, 우리가 이미 저녁을 다 먹었다는 것을 잊었군,"이라고 말했다. 또 한 일화로, 어느날 뉴턴이 그란담으로부터 말을 타고 집으로 오고 있을 때 마을 건너편에 있는 스피틀리게이트 언덕을 오르려고 말에서 내렸다. 언덕을 오르는 동안에 말이 미끄러 떨어졌는데도 빈 고삐만이 손에 끌려 가고 있는 것을 뉴턴을 몰랐다. 언덕꼭대기에 올라서 다시 말 안장 위로 뛰어 오르려고 했을 때에야 비로소 뉴턴은 그 사실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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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마코스 (Nikomachos :50-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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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아라비아의 게라사 출생. 신(新)피타고라스 학파이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산술서 《산술입문》을 저술하였다. 이 책에서 수론(數論)의 기초, 특히 수의 성질과 분류를 취급하고 있다. 중요한 것으로는, 세제곱수는 연속되는 모든 홀수의 합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법칙의 발견이 있다. 즉,
1^3=1, 2^3=3+5, 3^3=7+9+11,···
이 책은 그 후 아풀레이우스, 보에티우스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되어, 중세에는 산술서로서 유클리드기하학과 함께 매우 높이 평가되었다. 음악에 관해서도 저서《화성학(和聲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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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부(Jean Gaston Darboux :1842-19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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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수학자. 파리에서 공부하며 C.에르미트의 지도를 받았다.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로 장기간 재직하면서 프랑스의 수학계를 이끌었으며 수학 및 천문학 잡지 《Bulletin des sciences math?atiques et astronomiques》의 창간에 힘썼다. 19세기 초엽부터 기하학이 걸어온 좌표적·해석적 경향을 계승하여, 해석학과 상미분방정식론 또는 군론 등을 기초로 하여 기하학을 발전시켰으며, 그의 주요 저서인 《일반곡면론강의(一般曲面論講義)》(4권, 1887∼96)는 미분기하학의 명저로 알려져 있다. 곡면론과 미분방정식론의 관련, 도형의 연속적 변형, 가동좌표축(可動座標軸)의 도입, 허원소(虛元素)의 사용, 또 사원좌표(四圓座標), 오구좌표(五球座標)의 도입 등에서 창의성을 발휘하였고, 또 G.F.B.리만에 관한 이해도는 독일의 F.클라인과 비견된다고 한다. 그는 행정적·교육적 수완도 뛰어나 J.H.푸앵카레의 전기도 썼다. |
달랑베르(Jean Le Rond d Alembert :1717-17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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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수학자·물리학자·철학자. 계몽사조기(啓蒙思潮期)를 대표하는 문인의 한 사람으로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며, 그 종신서기(終身書記)였다. 그는 섭정 오를레앙공(公) 시대에 저명한 살롱을 가진, 사교계의 꽃 드 탕생 후작부인의 사생아로 출생하여, 생후 곧 노트르담 성당 옆의 작은 교회 계단에 버려졌다 한다. 근처에서 살던 유리 직공 달랑베르의 아내가 주워다 길렀다. 그의 이름은 그가 20세 때 스스로 지은 이름이다. 그의 친아버지인 데투시 장군이 그를 경제적으로 돌보았고, 죽은 후 거액의 유산을 남겼으며 또 장군의 유력한 친지가 그를 비호하여 23세에 아카데미 회원에 선출되었다. 12세 때 콜레즈 드 카틀 나시옹에 입학하여 신학·법률·의학을 공부하였으나, 얼마 후 철학·수학·물리학으로 방향을 바꾸었고, 특히 역학(力學)에서는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주저 《역학론:Trait de dynamique》(1743)은 26세 때 공간(公刊)한 것인데, 그는 이 저서에서 그 당시에 프랑스에서 주류를 이루던 데카르트주의를 배척하고, 물체와 그에서 독립된 공간을 생각하는 뉴턴주의의 입장을 취하였다. 또, 물체의 운동을 정역학(靜力學)의 경우와 같은 평형상태(平衡狀態)로 옮겨서 고찰하는 ‘달랑베르의 원리’를 설명하고, 역학의 일반화의 기초를 닦아 해석역학으로의 전개를 마련함으로써 역학발전의 한 단계를 이룩하였다. 이 밖에 세차(歲差)와 장동(章動)의 문제(49), 달의 운동론에 관련된 3체(三體)문제의 연구 등, 천체역학 방면에도 공헌하였다. 사상가로서도 계몽사상가의 중심인물로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였으며, 특히 D.디드로와 공동으로 편집·간행한 《백과전서》는 유명하다. 이 전서에서 수학·물리학·천문학 항목을 집필하였으며, 이 점은 백과전서파의 주장이었던 수학과 자연과학에 역점을 둔 데서 비롯되었으며, 이 《백과전서》의 주류를 이루는 부분이었다. 그가 쓴 서론 속에 이 취지를 강조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동시에 F.베이컨의 사상을 기초로 과학의 기원과 역사적 발전을 고찰하고, 과학의 분류를 시도함으로써 과학편(科學編)에 큰 전망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그의 철학적 입장은 감각적 인식론에 머물러 종교적 견해에는 많은 의문을 제시하면서도 디드로처럼 철저하지도 못해 일종의 물심이원론에 시종하였다. |
데데킨트(Dedekind, Julius Wilhelm Richard :1831-19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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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수학자. 괴팅겐대학교를 졸업하고, 여러 대학의 교수를 거쳐 브라운슈바이크고등기술학교에서 강의하였다. 1871년 대수적(代數的) 정수론(整數論)에 ‘이데알’ 개념을 도입하여 추상대수학에의 단서를 개척하였다. 72년 《연속과 무리수》에서는 ‘절단(切斷)’에 의하여 무리수를 정의함으로써 실수의 연속성의 개념을 명확히 하였다. 그의 무한의 개념과 실수의 구조에 대한 개념연구는 현대수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저서로 《대수적 정수론에 대하여》가 있다. |
데자르그(Gerald Desargue :1593-16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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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플러가 죽은 지 9년 후인 1639년에 대단히 독창성이지만 거의 주목받지 못했던 원추곡선에 관한 논문이 파리에서 발표되었다.그것은 공학자이며 건축가이고 한때 프랑스 육군 장교였으며 1593년에 리용에서 태어나 1662년경 그 논문은 다른 수학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채 잊혀졌고 모든 발행본들은 사라졌다.두 세기 후 프랑스 기하학자 샤슬레 (Michel Chasles, 1793-1880)가 지금까지 표준처럼 되어 있는 그의 기하학의 역사를 집필할 때, 데자르그의 논문의 가치를 평가할 방법이 없었다.그러나 6년 후인 1845년에 샤슬레는 데자르그의 제자인 라 이르(Philippe de la Hire, 1640-1718)에 의하여 만들어진 그 논문의 필사본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고 그 때부터 그 논문은 종합 사영기하학의 초기 발전단계에서의 고전 중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데자르그의 이 얇은 책이 처음엔 무시된 것을 설명하는 여러이유들이 제시될 수 있다. 그것은 2년 먼저 데카르트에 의해 소개된 더 유명한 해석기하학에 의해 빛을 잃었다.기하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 새로운 강력한 도구를 발전시키는 일과 무한소를 기하학에 응용하려는 시도에 정력을 쏟고 있었다.또한 데자르그는 보통과 다른 저술 방식을 택했다.그는 약 70개의 용어들을 소개했는데, 대부분 알기 어려운 식물학에서 따온 것이었고 그중 단 하나 '대합'(involution)만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아이러니컬하게도 재합은 비평가들이 그것을 날카로운 비평과 조소를 위해 뽑아낸 데자르그의 특수용어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보존되었다. 데자르그는 원추곡선에 관한 책 외에도 다른 책들을 썼는데, 그중 하나는 어린이들이 노래를 잘 하도록 가르치는 법에 대한 논문이다.그러나 그를 17세기 종합 기하학의 가장 독창적인 기여자로 손 꼽히게 한 것은 원추곡선에 관한 얇은 책이다.케플러의 연속성의 원리로 시작되는 이 책은 대합, 조화영역, 호몰로지, 극과 극선, 투시도 등 오늘날 사영기하학 수강생들에게 친숙한 주제들에 대한 많은 기본 정리들의 대부분을 발전 시켰다.흥미 있는 한 개념은 극과 극선의 개념이 구까지 또 어떤 다른 2차곡면으로까지 확장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데자르그는 얼마 안 되는 2차곡면만을 알고 있었고 아마도 대부분의 이 곡면은 1748년 오이럴가 완전히 열거할 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것 같다.다른 곳에서 우리는 데자르그의 중요한 두 삼각형의 정리를 발견할 수 있다."만일 두 삼각형이 동일한 평면 위에 있든 아니든 간에, 대응하는 꼭지점을 연결하는 직선이 한 점에서 만나도록 위치해 있으면 대응하는 변의 교점은 동일 직선상에 있고 또 그 역도 성립한다." 데자르그는 파리에서 살고 있던 30대에 일련의 무료 강의를 통하여 동시대인에게 상당한 감명을 주었다.그의 논문은 데카르트에의해 인정받았고 파스칼은 그의 영감의 많은 부분의 근원을 데지르그에게 돌런 적이 있다.라 이르는 상당한 노력으로 아폴로니우스의 <원추 곡선론>의 모든 정리들이 데자르그의 중앙 투시법에 의한 원으로부터 유도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했다.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17세기에는 새로운 기하학이 거의 세워지지 않았고 그 분야는 제르곤, 퐁스러, 브리앙송, 듀팽, 샤슬레, 슈타이너 같은 사람들에 의해 크게 발전된 19세기 초반까지 동면에 들어갔다. |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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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1596년 루트(Tours) 근교에서 태어나서 여덟 살 때라 플레쉬에 있는 예수회 학교로 보내졌다. 바로 거기에서 (처음에는 몸이 약해서)그의 평생 습관이 된 아침에 늦게 까지 침대에 누워 있는 버릇이 길러졌다. 후에 데카르트는 아침 휴식중의 명상시간을 가장 생산적인 시간으로 여겼다. 1612년 데카르트는 학교를 떠나 곧장 파리로 가서 메르센과 미도르주와 더불어 얼마간 수학연구에 전념했다. 1617년 그는 오렌지공 모르스 왕자의 군대에 입대하여 몇 년간의 군생활을 시작했다. 군생활을 마치자마자 독일,덴마크, 네덜란드, 스위스,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4,5년을 보냈다. 몇 년동안 파리에 다시 정착해 있으면서 수학연구와 철학적 명상을 계속하였으며 한동안 광학기구를 제조하기도 하다가 당시 국력이 최고조에 달한 네덜란드로 이주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거기서 20년간 살면서 철학, 수학, 과학에 몰두했다. 1649년 크리스티나 여왕의 초대를 받고 마지못해 스웨덴으로 갔다. 몇 개월 후 폐렴에 감염되어 1650년 초에 스톨홀롬에서 세상을 떠났다. 위대한 철학자이며 수학자는 스웨덴에 묻혔으며, 유품을 프랑스로 옮기려는 노력은 실패했다. 데카르트가 죽고난 17년 후에 오른손 뼈를 제외한 유골은 프랑스로 돌아와 파리에 있는 지금의 판테온에 다시 안장되었다. 오른손 뼈는 당시 유골의 수송을 맏았던 프랑스 재무장관이 기념품으로 보관하고 있다. 데카르트가 저술을 완성한 것은 네덜란드에서 20년간 체유하는 동안이었다. 우주에 대한 물리적 설명서인 <천체론, Le monde>을 집필하는 데 처음 4년을 보냈으나, 교회측이 갈릴레오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신중히 고려한 끝에 포기하고 미완성인 채로 놔두었다. 그는 <방법서설, Discours de la methode pour bien conduire sa raison er chercher la verite dans les sciences> 이라는 제목의 모든 과학에 관한 철학적 논문의 집필로 방향을 전환했는데, 이 책은 굴절광학, 기상학, 기하학의 세 부록을 달고 있다. <방법서설>은 부록과 함께 1637년에 출간되었으며, 해석기하학에 대한 데카르트의 공헌은 세 권의 부록 중 마지막 권에 나타나 있다. <방법서설>의 유명한 세 번째 부록인 <기하학, La geometrie>은 약 1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이며, 그 자체가 세 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제 1권은 대수적 기하학의 약간의 이론을 설명하고, 전 그리스 시대에서의 발전상을 그리고 있다. 그리스인들은 한 변수는 임의의 선분의 길이에, 두 변수의 곱은 직사각형의 넓이에, 세 변수의 곱은 직육면체의 부피에 대응시켰다. 그리스 시대에서는 그 이상의 발전은 없었더. 반면에 데카르트는 X2을 넓이라기보다는 1:X=X:X2의 비례에서 네 번째 항으로 생각하고, X를 알 때 쉽게 계산될 수 있는 적당한 선분의 길이를 표시하는 것으로 제안했다. 이 방법으로 우리는 단위선분을 이용하여 한 변수의 몇 제곱이나 몇 개의 변수의 곱을 선분의 길이로 나타낼 수 있고, 변수값이 정해재면 유클리드 도구를 사용하여 실제로 선분의 길이를 그릴 수 있다. 데카르틀가 해석기하학을 만들게 된 동기를 설명하는 몇몇 전설같은 이야기가 있다. 그중 하나는 꿈에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1616년 11월 10일 성 마틴 이브에 다뉴브 강둑 위에 있는 군대의 겨울막사에서 야영하고 있는 동안, 그의 전 인생을 변화시켰다고 그가 말하는 기이하고 생생 하며 조리 있는 몇 편의 꿈을 꾸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 꿈들이 인생에 있어서 목표를 명확히 해 주고, "경이로운 과학"과 "놀라운 발견"을 밝히는 데 그의 미래의 모든 노력을 다하기로 결심하게 해 주었다. 데카르트는 무엇이 경이로운 과학이며 훌륭한 발견인지는 결코 명백히 밝히지는 않았으나, 일부 사람들은 그것이 해석기하학 또는 대수학의 기하학에의 응용, 그리고 모든 과학적 방법의 기하학에의 적용일 것이라고 믿고 있다. 18년 후에야 비로소 그의 착상의 일부를 <방법서설>에 상술했다. 다른 이야기는, 뉴턴의 떨어지는 사과 이야기와 같이, 데카르트가 천정을 기어다는는 파리를 보고 해서기하학에 대한 착상을 떠올렸다는 것이다. 파리의 경로는 인접한 두 벽으로부터 파리까지의 거리를 연결시키는 관계만 알면 나타낼 수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이 두 번째 이야기는 비록 출처가 의심스러울지라도 상당한 교육적 가치가 있다. |
드 모르간(Augustus De Morgan :1806-18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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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 모르간은 1806년 마드라스에서 (한쪽 눈이 먼 상태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동인되 주식회사와 관련하고 있었다. 그는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공부했으며 수학 학위시험에서 4등으로 졸업한 후 1828년 새로 설립된 런던 대학교(후에 유니버시티 칼리지로 개명된)의 교수가 되었는데, 그곳에서 논문과 제자를 통하여 영국수학계에 큰 영항을 미쳤다.그는 철학과 수학사에 관한 책을 많이 탐독하고, 대수학의 기초, 미분학, 논리학, 확률론에 관한 논문을 썼다. 그는 매우 명쾌한 해설가였다.그의 재치있고 재미있는 책 <역설 모음집, A Budger of Paradoxes>은 여전히 재미 있는 읽을거리이다. 그는 집합론에서의 쌍대의 원리를 밝히면서 집합의 대수에 관한 부울의 연구를 계승하였는데, 소위 드 모르간 법칙이 이것의 한 예이다. 부울처럼 드 모르간은 수학을 기초 연산의 집합에 종속되는 기호의 추상적 연그로서 간주하였다. 드 모르간은 학문적 자유와 종교적 관용을 거리낌없이 말하기 잘하는 명수였다. 그는 플루트를 멋지게 연주하고, 사람들과 항상 쾌활하게 교제하고, 대도시 생활을 매우 좋아했다. 그는 퀴즈와 수수께끼를 매우 좋아하여 나이나 태어난 해를 묻는 질문에 "나는 X2년에 X살이다." 라고 대답하곤 했다.그는 1871년 런던에서 죽었다. |
드 무아브르(Abraham De Moivre :1667-17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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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률론에 기여한 사람들 가운데 중요한 한 사람이 1685년 낭트 칙령이 폐지된 후 보다 정치적 환경이 좋은 런던으로 이주한 프랑스 신교도인 드 무아브르(Abraham De Moivre, 1667-1754) 이다. 그는 영국에서 가정교사로 생활하였고 뉴턴과 친한 친구가 되었다. 드 무아브르는 보험 통계수학의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수명에 따른 연금, Annuities upon Lives>,
확률론에 관한 새로운 자료들을 많이 담고 있는 <우연설, Doctrine of Chances> , 순환급수, 활률론, 해석적 삼각법에 기여한 <해석기요, Miscellanea analytica> 등으로 해서 특히 주목받고 있다. 드 무아브르는 통계학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활률적분과 정규 도수곡선을 처음으로 취급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잘못 명명된 스털링 공식(Stirling formula), 은 드 무아브르가 유도한 것이며 이는 큰 수의 계승을 어림 셈하는데 매우 유용하다. 드 무아브르 이름으로 알려졌고 모든 방정식론책에서 발견되는 낮익은 공식
(cos x+i sin x)n=cos ns+i sin nx, i=√-1 은 n이 자연수인 경우에 잘 알려진 드 무아브르 공식이다. 이 공식은 해석적 삼각법의 시금석이 되었다. 드 무아브르의 죽음에 관해 전해지는 재미있는 우화가 하나 있다. 이야기에 따르면 드 무아브르는 매일 전날보다 15분씩 더 자야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 등차수열이 24시간에 이르렀을 때 드 무아브르는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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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로비슈(Moritz Wilhelm Drobisch :1802-18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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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철학자·수학자. 라이프치히 출생. J.헤르바르트의 제자이자 1842년 라이프치히대학 교수이다. 논리학적으로는 형식논리학에서 존재와 사유(思惟)의 일치로서의 형이상학적 논리학으로 이행(移行)하고, 심리학적으로는 수학적 심리학의 입장에 섰다. 주요저서는 《신논리학:Neue Darstellung der Logik nach ihren einfachsten Verh隨tnissen》(1836) 《헤르바르트의 철학체계:Beitr隣e zur Orientierung ?r Herbarts System der Philosophie》(43) 《수학적 심리학:Erste Grundlinien der mathematischen Psychologie》(50) 등이다. |
디리클레(Peter Gustav Lejeunc Dirichlet :1805-18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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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클레는 1805년 뒤렌에서 태어났고, 브레슬라우와 베를린 교수직을 계속해서 역임했다. 1855년 가우스가 세상을 떠나자 가우스 후임으로 괴팅겐의 교수로 인명되었는데, 이것은 전에 가우스의 제자였고 평생 스승을 존경한 매우 재능 있는 수학자에 대한 알맞은 예우였다. 괴팅겐에 재직하는 동안 가우스의 미완성 연구를 끝내려 했으나, 1859년에 요절함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독일어와 프랑스에 능통한 디리클레는 두 나라의 수학과 수학자 사이의 섭외 역할을 훌륭히 해내었다. 그의 가장 각광받는 수학적 업적은 아마도 함수개념을 일반화 시키게 만든 작업인 푸리에 급수의 수렴에 관한 예리한 분석일 것이다. 그는 가우스의 보다 나해한 방법 중의 일부를 쉽게 이해시키는 데에 많은 공헌을 했으며 그 자신의 정수론에 뚜렸한 기여를 하였는데, 그의 멋진 <정수론 장의, Vorlesungen uber Zahlentheorie>는 아직도 가우스의 정수론 연구의 가장 명쾌한 입문 중의 하나이다. 디리클레는 야코비의 절친한 치눅이자 해설가이며 양아들이었다. 그의 이름은 수학전공 학생들에게 디리클레의 급수, 디리클레 함수와 디리클레 법칙으로 알려져 있다. 디리클레와 그의 위대한 스승 가우스에 관한 감동적인 일화가 하나 전해진다. 가우스 박사 학위를 받은 만 50년 후인 1849년 7월 16일 괴팅겐에서 50주년 축하를 바당ㅆ다. 축하행사의 진행 도중의 어느 시점에서 가우스가 그의 <수론 연구>의 원본 한 장으로 파이프 담배에 불을 붙이게 되어 있었다. 그 자리에 참석해 있던 디리클레는 그것이 신성한 것을 모독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오싹해졌다. 마지막 순간 그는 대담하게 가우스의 손에서 논문을 빼앗아 일생 동안 기념으로 보관하였는데, 그의 사후에 편집자가 그의 논문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디리클레는 고결하고, 성실하고, 인간적일고, 겸손한 성질을 지닌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야코비와는 달리 젊은 사람들의 심정을 헤라일 수 없었던 것 같다. 디리클레의 아들이 그의 선택받은 아버리로부터 항상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을 급우들이 부러워했을때, 아들은 다음과 같은 가엾은 대답을 했다. "오! 우리아버지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알고 있지 않다." 디리클레의 장난꾸러기 조카엥제는 자서전에서 국민학교에 다니던 6,7세 때 삼촌에게 받았던 수학교육은 그의 생에에서 가장 무서운 경험이었다고 썼다. 디리클레는 가족들과 편지 왕래하는 일에 매우 미지근하였다. 그는 첫 아기를 얻었을 때, 영국에 살고 있던 장인에게 편지하는 것을 잊었다. 나중에 알게 된 장인을 디리클레가 적어도 2+1=3이라고 쓸수는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낟. 이 재치 있는 장인이 다름아닌 철학자 모제스 멘델스존의 아들이자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의 아버지인 에이브러햄 멘델스존이었다. 디리클레의 뇌는 가우스의 것과 마찬가지로 괴팅겐 대학의 생리학과에 보존되어 있다. |
대수의 발전에서 대단히 중요하고 또 그 이후의 유럽 수론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준 사람이 바로 알렉산드리아의 디오판수스(Diophantus)이다. 헤론처럼 대오판투스도 그 출생시기와 장소가 분명하지 않다. 물론 그가 헤론과 동시대인일 것이라는 약간의 증거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그를 3세기경의 인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리스 명시선집>에도 그의 생애에 대한 풍자적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가 알렉산드리아에서 활약했다는 사실 이외에는 어떤 것도 확실하게 전해 내려온 것이 없다. 디오판투스에게는 세 개의 저작이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산학, Arithmetica> <다각수에 관하여, on Polygonal Numbers> <계론, Porisms> <산학>은 디오판투스의 가장 중요한 저술로서 모두 13권의 책으로 되어 있으나 그중 여섯 권만이 현존하고, <다각수에 관하여>는 단지 일부만이 현존해 있으며 <계론>은 분실되고 말았다. <산학>은 대수적 수론을 해석적 논법으로 쓴 책으로서 디오판투스를 이 분야에서 천재로 만들어준 책이다. 이 저작의 현존하는 부분은 약 130여 개의 다양한 문제의 해를 다루고 있으나 대체로 1차 또는 2차방정식과 관계된 것이다. 매우 특별한 3차방정식 문제도 하나 풀려 있다. 제Ⅰ권은 미지수가 하나인 정 방정식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고 나머지 책에서는 두 개 또는 세 개의 미지수를 갖는 2차 또는 종종 고차의 부정 방정식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들이 일반적인 해법으로 풀리는 것이 아니라 각 문제마다 그때 그때 특별한 방법으로 해가 구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디오판투스도 단지 양의 유리해만을 인정하고 있고 대부분의 경우에 하나의 답만으로 만족했다. 단지 유리해만을 구하는 부정 대수문제는 흔히 디오판투스문제로 일컬어져 왔다. 현대에 와서는 해의 조건을 정수로 제한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디오판투스가 이러한 종류의 문제를 처음 만든 것은 아니다. 더구나 그가 부정방정식을 푼 최초의 인물도 아니고 2차방정식을 기하하적이 아닌 방법으로 처음 푼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생략속기법의 대수적 표기를 이용한 최초의 인물이었음은 틀립없다. 디오판투스는 미지수, 미지수의 6승까지의 멱, 뺄셈, 등식, 역수 등에 대하여 생략포기를 사용했다. 그는 살았던 그리스 시대에는 주로 기하학만이 연구되었고 산수와 대수가 분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디오판투스가 약자(또는 문자)를 도입함으로써 대수는 산수로부터 확실하게 구분되어 갈라지게 도니다. 두 학문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구분되어 갈라지게 된다. 두 학문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문자의 사용 여부이다. (또 하나는 음수를 수로 인정하느냐 하는 점이다.) 디오판투스의 이러한 공로와 수학에 대한 열정을 문제 하나로 대신한 그의 묘비명은 참으로 멋진 생각이 아닐수 없다. |
디외도네(Dieudonne, Jean :19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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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수학자. 릴 출생. 에콜 노르말 졸업 후, 1946~47년 상파울루대학 교수를 지낸 것을 제외하고, 37~52년 낭시대학 조교수·교수를 지냈으며, 미국 미시간대학(52~53), 노스웨스턴대학(53~59년) 등에도 있었다. 그 후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파리 교외의 고등과학연구소 교수(59~64), 니스대학 교수(65~70년)를 역임하였다. 1복소변수함수론의 연구에서 출발하여 30년대에는 ‘부르바키’의 창립자 중 한 사람으로서 현대수학의 여러 분야에 업적을 남겼는데, 특히 함수해석에 관계된 뛰어난 저술가였고, 68년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의 일원이 되었다. 저서에 6권의 《해석요론(解釋要論)》이 있다. |
딩글러(Hugo Dingler :1881-19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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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철학자·수학자. 뮌헨 출생. 1920년 뮌헨, 32년 다름슈타트의 각 대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주로 자연과학 및 수학의 인식론적 기초를 연구하였으며, 측정장치에 의한 측정결과의 제약(制約)을 강조함으로써 근대적 이론물리학과 대립하게 되었다. 주요저서로서는 《자연철학의 기초:Die Grundlagen der Naturphilosophie》(1913) 《자연철학의 역사:Geschichte der Naturphilosophie》(32) 《방법론적 철학:Grundriss der methodischen Philosophie》(49) 등이 있다. |
라그랑쥬(Joseph Louis Lagrange :1736-18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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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는 이탈리아 튜린의, 전에는 부유했던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배경을 가진 가문에서 태었으며, 11명의 형제중 막내였고, 성년이 되도록 생존이 유일한 아이였다. 튜린에서 공부하고 젊은 나이에 그 곳 시관학교에서 수학 교수로 복무했다. 1766년 오일러가 베를린을 떠났을 때 프레더릭 대체가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 그의 궁정에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수학자'가 있기를 희망한다고 라그랑주에게 편지를 보냈다. 라그랑주는 그초청을 받아들여서 오일러가 혼란스러운 정치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라그랑주는 새로 설립된 에콜 노르말, 그 후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교수직을 수락했다.
전자의 학교는 얼마 안 있어 없어졌지만 후자의 학교는 많은 현대 프랑스의 위대한 수학자들이 그 곳에서 공부하고 그 곳에서 교수직을 가졌지 때문에 수학사에서 유명하게 되었다. 말년에 라그랑주는 고독과 절망감에 매우 시달렸는데 그는 56세 때 그보다 거의 40세 가까이 어린 소녀를 만나 사귀기 시작하면서 여기에서 벗어났다. 그녀는 친구인 천문학자 레모니에(Lemonnier)의 딸이었다. 그의 불행을 자주 접한 그녀는 그에게 매우 헌신적이고 적임인 친구였으며 남편을 위로하여, 살고 싶은 욕망을 일깨워 주는 아내였다. 세상에서 받은 상 중에서 가장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부르럽고 헌신적인 어린 아내라고 그는 정직하고 순수하게 주장했다.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 시도는 1797년 그의 위대한 저서 <미분의 원리를 포함하는 해석함수론, Theorie des fonctions analytiques contenant les principes du calcul differentiel>에서 행해졌다. 여기서 주요한 개념은 테일러 급수에 의한 함수 f(x)의 전개식이다. b에 관한 f(x+b)의 테일러 전개에서 도함수 f´(x), f″(x), ···은b, b/2!···의 계수로서 정의 된다. 오늘날 매우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표기f´(x), f″(x),···은 라그랑주가 만든 것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의 수많은 위대한 프랑스 수학자와 매우 친밀했던 나폴레옹은 "라그랑주는 수리과학 분야에서 치솟은 피라미드이다."라고 말함으로써 라그랑주에 대한 그의 평가를 요약했다. |
라마누잔(Srinivasa Ramanujan :1887-1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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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수학자. 어렸을 때부터 수학에 관심을 가져오다가 15세 때 대학 도서관에서 빌린 수학책을 통해서 재능이 있음을 알았으나 집안이 가난한데다 신분이 낮고 학력이 없어 어려운 연구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영국의 수학자 G.H.하디(1877∼1947)에 의해서 특이한 재능이 높이 평가되어 정부의 연구비를 지원받게 되었고, 1914년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때까지 그는 근대수학이라는 것을 모르고 연구하였고, 또 추론(推論)에는 많은 오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적 방법에 의한 깊은 명찰과 직관과 귀납으로써 뛰어난 결과들을 많이 도출해 내었다. 그 뒤에 영국에서 발표된 연구 가운데는 현대 정수학(整數學)의 깊은 부분에 관계되는 중요한 예상이 몇몇 남아 있다. 특히 자연수 n의 분할수(分割數) p(n)에 관한 것이 유명하다. 18년 30세의 젊은 나이로 로열 소사이어티 회원으로 뽑혔다. 19년 인도로 귀국하였으나, 병으로 32세에 세상을 떠났다. |
라메(Lam? Gabriel :1795-18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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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수학자·물리학자. 초기에는 러시아의 광산기사로 근무하였고, 1832년 귀국한 후 파리 에콜폴리테크니크(공과대학) 물리학 교수, 51년 파리대학 교수가 되었다. 주로 탄성체이론(彈性體理論)·열전도론(熱傳導論) 등 응용수학적 분야의 연구를 추진, 이들의 전개에 공헌하였다. 36년 타원체의 온도평형(溫度平衡)의 문제를 풀기 위하여 라메의 방정식과 라메의 함수를 도입하였고, 52년 등방성(等方性) 탄성체의 탄성률로서 ‘라메의 상수’를 도입하였다. |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rm Leibniz :1646-17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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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의 위대한 세계적 천재였으며 미적분법의 발명에서 뉴턴의 경쟁자였던 고트프리드 빌헬름 라이프니츠(Gottfried Wilberm Leibniz)는 1646년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독학하여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보통교과서를 다 공부하여 수학, 신학, 철학, 법학의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일반 특성, characteristica generalis> 의 첫번째 착상을 벌전시키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훗날 부울(George Boole, 1815-1864)의 기호 논리로 꼬츄피우고, 또 훨씬 후인 1910년에는 화이트헤드와 러셀의 <수학의 원리, Principia mathematica>를 꽃피운 뿌리가 되었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젊다고 하는 표면적인 이유 때문에 법학박사학위를 거절당한 그는 뉴렘베르크로 이사했다. 그 곳에서 그는 역사적 방법에 의한 법 교육에 관한 탁월한 글을 써서 마인츠 체후에게 헌납했다. 이 일로 해서 마인츠 제후는 그를 법령 재편찬위원회에 임명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대사관원으로 보내게 되는데, 처음에는 마인츠 제후를 위해 1676년부터 그가 죽을 때까지는 하노비에서 브룬스빅 공의 지위를 위해 봉사했다. 1672년 외교적 업무로 파리에 있을때 라이프니츠는 그 곳에 살고 있던 호이겐스를 만났는데, 이 젊은 외교관은 그 과학자를 설득하여 자기에게 수학을 가르쳐 주도록 하였다. 그 이듬해 라이프니츠는 정치적 임무를 띠고 런던으로 파견되었는데, 그 곳에서 올덴버그와 사귀었으며 영국학 술원에 계산기를 만들어 보내기도 하였다. 파리를 떠나기 전에 브룬스빅 공의 사서라는 유리한 직책에 취임하기 위하여 라이프니츠는 이미 미적분학의 기본 정리를 발견하고 이 주제에 관한 개념의 대부분을 개발하였으며, 미분법의 수많은 기본 공식을 만들어 내었다. 그의 일생을 마감하는 7년간은 미적분의 발견에서 뉴턴과 독립적으로 했느냐에 관해 뉴턴 사이에서 발생한 다른 사람들의 논쟁으로 해서 한층 비참하게 되었다. 1714년 그의 군주는 최초로 영국의 게르만 왕이 되었으나 라이프니츠는 하노버에 남겨저 무시되었다. 2년 후인 1716년에 죽었을 때 그의 장례식에는 단지 그의 충실한 시종만이 참석하였다고 전해진다. 라이프니츠는 천부적으로 낙천주의자였다. 가기 생애 동안 대립하는 종파를 하나의 일반적인 교회로 재결함시키려는 희망을 가졌을 뿐 아니라, 이진살술의 상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에 의하여 전 중국을 기독교화하는 방법을 가질 수도 있다고 느꼈다. 신은 1로 무는 0으로 나타낼 수도 있기 때문에 아진법에서 모든수가 0과 1로 표현되는 것과 똑같은 신은 무에서부터 모든것을 창조했다고 추측하였다. 이러한 생각에 매우 흡족한 라이프니츠는 그생각이(특히 과학을 좋아했던) 중국의 현 황제와 나아가 중국의 모든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바람으로 중국 수학위원회 위원장인 예수회 수사 그리말디에게 그것을 알렸다. 라이프니츠의 종교적인 환상의 또 다른 예는 허수가 기독교 성경의 성령-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중간쯤이 양서류의 일종과 닮았다고 한말에서 엿볼 수 있다. 인간으로서 유일하게 가지고 있었던 그이 재능에 대한 마지막 찬사로 라이프니치에 대한 설명을 마친다. 연속과 이산이라는 수학적 사고의 넓고 대조적인 두 영역이 존재하는데, 라이프니츠는 수학의 역사에서 사고의 이 두 가지 성질을 완전하게 가졌던 유일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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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플라스(Pierre-Simon Laplacc :1749-18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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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플라스(Pierre-Simon Laplace)는 1749년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그는 수학적 능력이 뛰어나서 일찍이 좋은 교사직을 얻었고, 정치적인 기회주의자로서 프랑스 혁명의 불확실한 기간 동안 정권을 잡는 어떤 정당에라도 비위를 맞추었다. 그의 가장 뛰어난 업정은 천체역학, 활률론, 미분방정식, 측지학 분야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기념비적인 두 작품, <천체 역학론, Traite de mecenique Celeste>(5권 1799-1825)과 <활률의 해석적 이론, Theorie analytique des probailites> (1812)을 발표하였는데, 각각 해박한 비전문가적인 해설이 붙어 있다. 그에게 '프랑스의 뉴턴'이란 별칭을 붙여준 다섯 권으로 된 <천체 역학론>은 라플라스 자신의 업저과 함께 그 이전의 모든 발견을 포함했고, 이로 인해 라플라스는 이 분야에서는 필적할 만한 사람이 없는 거장이 되었다. 이 논문과 관련해서 종종 말해지는 몇몇 일화를 다시 말하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나폴레옹이 그의 논문에 신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까다로운 지적을 했을 때 라플라스는 "폐하, 저는 그 가설이 필요치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미국의 천문학자 나다니엘 보우디취는 라플라스의 논문을 영역할 때 "나는 라플라스 가 '따라서 그것은 명백하다'고 한 부분을 여러 시간 힘들여 부족한 부분을 공부하여 왜 그것이 명백한 가를 알아내지 않고서는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고 언급했다. 라플라스의 이름은 우주 발생의 성운설, 퍼텐셜 이론의 소위 '라플라스 방정식(이 어느 것도 라플라스가 만든 것은 아니지만), 소위 '라플라스 변환' 그리고 행렬식의 '라플라스 전개'와 연관되어 있다. 라플라스는 뉴턴이 죽은 지 꼭 100년 후인 1827년에 죽었다. 어떤 보고에 의하면 그의 마지막 말은 "우리가 아는 것은 미미하고 모르는것은 무한 하다."였다. 라플라스에 관한 다음 이야기는 흥미롭고 직장을 구하려는 사람에게 귀중한 충고를 제공해 준다. 라플라스가 젊어서 수학 교수직을 얻기 위하여 파리게 도착했을 때 저명한 사람이 쓴 추천서를 달랑베르에게 제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온 라플라스는 역학의 일반원리에 관한 재기 있는 편지를 달랑베르에게 썼다. 이것이 취직의 문을 열어 주었고 달랑베르는 "귀하는 내가 당신의추천서를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을 아셨군요. 당신은 자신을 더 잘 소개했기 때문에 다른 것은 필요치 않군요." 라고 답장하였다. 며칠 후 라플라스는 파리의 육균 사관학교의 수학 교수에 임명되었다 . 라그랑주와 라플라스는 종종 서로 대조를 이루곤한다. 무엇보다도 볼(W.W.Rouse Ball)이 다음과 같이 요약했듯이 그들의 방식에서 두드러진 대조를 이룬다. "라그랑주는 형시과 내용 둘 다에 완벽하고 신주아ㅎ게 전개과정을 설명하기 때문에 그의 논증은 일반적이지만 이해하기 쉽다. 반먼에 라플라스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고 과정에 무관심하며, 그의 결과가 옳다는 사실에 만족해 하며 그것 을 증명하지 않거나 틀리게 증명하여 방치한다." 또한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수학에 대한 견해에서도 현격한 대조를 이룬다. 라플라스에게 수학은 단지 자연 현상을 셜명하는 데 사용하는 하나의 도구이고 라그랑주에게는 하나의 빼어난 예술이고 그 자체가 존재이유이다. |
란다우(Edmund Landau :1877-1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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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수학자. 베를린 출생. 1909년 괴팅겐대학 교수가 되었으나, 33년 나치스의 유대인 박해로 대학에서 쫓겨났다. 그 후에는 베를린으로 돌아가서 생활하였으며, 그 동안에 케임브리지대학 등의 초청으로 국외를 여행한 일도 있다. 저서나 논문이 많은데, 특히 해석적 수론(解析的數論)과 함수론에 크게 기여하였다. 초기의 저서 《소수분포론(素數分布論)》(1909)에서는 역사적으로 이론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 자신의 최신의 기여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설명하였으나, 10년대 후기의 저서나 논문에서는 간결한 문체를 사용하였다. 수학논문의 이와 같은 문체를 란다우슈틸(Landau-Stil)이라고 부른다 |
람베르트(Jhoann Heinrich Lambert :1728-177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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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베르트(Jhoann Heinrich Lambert, 1728-1777)는 당시 스위스의 영토였던 뮐루즈(일사스)에서 태어났다. 람베르트는 매우 재능 있는 수학자였다. 가난한 재단사의 아들인 그는 대부분 독학으로 공부했다. 훌륭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결과들을 매우 주의를 기울여 엄밀하게 입증하였다. 사실상 람베르트는 π가 무리수인 것을 엄밀하게 증명한 최초의 수학자였다. 람베르트는 도형 기하학, 혜서의 궤도 결정, 지도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평면도법 이론 (이 평법도법 중 많이 사용되는 하나에는 현재 그이 이름이 붙어 있다.) 등 수많은 주제의 수학에 주목할 만한 공헌을 한, 다방면으로 박식한 학자였다. 한때 그는 언젠가 라이프니츠가 개설한 종류의 수리논리를 여구하려 했다. 1766년 그는 <평행서느이 이론, Die Theorie der Parallellinien>이란 제목의 유클리드 평형공준을 고찰한, 사후에 출판된 논문을 썼는데 그것으로 인해 그는 비유클리드 기하학 발견의 선구자 중의 하나에 속하게 되었다. 람베르트는 잠깐 동안 프로이센 학술원에서 오일러의 조교로 있었다. 언젠가 프레더릭 대제가 람베르트에게 "그대는 어느 분야의 과학에 유능한가"라고 묻자 람베르트는 짧막하게 "전부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전해진다. 람베르트는 가우스가 태어난 해인 1777년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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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지(Frank Plumpton Ramsey :1903-19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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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수학자·철학자.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수학을 배우고 그 대학에서 강사를 지냈다. A.화이트헤드와 B.러셀에 의한 명제함수이론의 수정과 거기에 나타나는 타입이론의 간략화를 주장하였다. 또한, L.비트겐슈타인의 초기사상의 영향을 받아, 토폴로지이론과 설명이론을 발전시켰다. 주요저서로 《수학의 기초와 논리학적 논문들:The Foundations of Mathematics and Other Logical Essays》(1931)이 있다. |
러셀(Be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197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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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집안의 자손인 러셀(Berrand Atrand Arthur William Russell)은 1872년 웨일즈의 트렐렉 근교에서 태어났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라니티 칼리지에서 공모 장학금을 받은 그는 수학과 철학에서 명성을 크게 떨쳤으며 공모 장학금을 받은 그는 수학과 철학에서 명성을 크게 떨쳤으며 화이트헤드 밑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주로 미국의 대학교에서 강의하였고 수학, 논리, 철학, 사회학, 교육학에 관한 책을 40권 이상 저술하였다.그는 실베스터, 드 모른간과 공동 수상한 영국학술원상 (1934), 메릿 훈장(1940), 노벨 문학상(1950)과 같은 많은 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거리낌없이 의견을 말하여 종종 논쟁에 휘말렸다. 제1 차 세계대전 중에 평화주의자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징병제도를 반대하여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쫓겨나고 4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1960년대 초에 핵무기에 반대하는 평화주의 운동을 이끌어 다시 잠깐 동안 투옥되었다. 뛰어난 지성과 능력의 소유자였던 그는 1970년 98세의 고령에도 끝까지 정신이 흐려지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 |
레기오몬타누스(Regiomontanus :1436-14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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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천문학자·수학자. 쾨니히스베르크 출생. 본명은 Johann Mller. 1452년 빈에서 포이어바흐로부터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을 공부하였다. 61년 스승의 사망 후 로마로 유학, 그리스어 원전 《알마게스트:Almagest》 등 여러 과학서적을 번역하였다. 68년 이들 원전을 가지고 귀국한 후, 뉘른베르크의 부호 B.발터의 도움을 얻어 71년 독일 최초의 천문대를 건설하고, 새로운 천문기기(天文器機)의 제작과 천체관측에 힘썼다. 그리고 관측자료를 토대로 54년부터 60년까지 《천체위치추산표(天體位置推算表)》를 편집하였다. 또한, 항성과 달 사이의 각거리를 측정하여 원격(遠隔) 2지점의 시간을 비교하는 방법(태음거리법)을 창안하였다. 이를 이용함으로써 원양항해에서의 경도결정이 가능하게 되었고, 대항해(大航海)시대의 막이 올랐다. 72년 핼리혜성을 관측하고, 이것을 처음으로 천체로 인정하였다. 75년 로마교황청의 초청으로 개력(改曆)위원회에 참여하기 위해 로마로 갔으나 급환으로 사망하였다 |
레비치비타(Levi-Civita, Tullio :1873-19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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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수학자. 파도바 출생. 1898년 파도바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1918~38년 로마대학 교수를 지냈다. 무솔리니가 이탈리아의 대학교수에게 파시스트당 정부에 대한 선서를 요구하였지만 과학자로서의 양심 때문에 선서를 할 수 없다고 거부하였다. 스승인 리치와 함께 절대미분학(絶對微分學)을 창시하고 그 결과를 《절대미분학의 방법과 그 응용》(1900)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다. 유클리드공간에서의 평행의 정의를 리만공간으로 확장하였다. 텐서 해석(解析)은 리만기하학의 연구에 적절한 방법이고 아인슈타인에 의한 일반상대성이론, 그리고 중력장의 이론에도 사용되었다. |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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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화가· 조각가. 회화· 조각· 건축 외에 과학· 음악 등 다방면에 재능을 발휘하였다. 1466년 피렌체에 가서,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회화· 조각을 수업, 〈수태고지〉 등을 그렸다. 82년에는 밀라노에 가서, 성프란체스코성당의 제단화 〈암굴의 성모〉나 산타마리아데레그라체 성당에 벽화 〈최후의 만찬〉을 그렸다. 1500~06년에 다시 피렌체에서 활동, 군사· 토목 공사에 종사하고, 〈성모자와 성 안나〉 〈모나리자〉의 제작에 착수하였다. 17년 프랑수아 1세의 초빙으로 프랑스의 보아주에 가서 건축· 운하 공사에 종사하다가 죽었다. 과학적 연구는 수학· 물리· 천문· 식물· 해부· 지리· 토목· 기계 등 다방면에 이르며, 이들에 관한 수기(手記)나 인생론· 회화론 등이 많이 남아 있다. |
레코드(Robert Recorde :약1510-15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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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레코드는 산술책 이외에도 천문학, 기하학, 대수, 의학 등에 관한 많은 저술을 하였는데 그중 몇가지 저작은 분실되고 말았다. 1551년에 출간되 천문학에 관한 저서 <지식의 성, Castle of Knowledge>은 영국의 독자들에게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처음으로 소개한 책이었고 역시 같은 해에 출간된 <지식의 오솔길, Pathewaie to Knowleage>은 유클리드의 <원론>의 초록집이었다. 특히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은 1557년에 출간된<지혜의 숯돌, whestone of Wittle>이라는 이름이 붙은 대수책으로 이 책에서 처음으로 오늘날의 등식기호가 사용되어 있다 |
로바체프스키(Nicolai Ivanovitch Lobache :1792-18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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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바체프스키는 카잔 대학교에서, 대부분의 생애를 처음에는 학생으로서 후에는 수학 교수로서 마지막에는 학장으로 보냈고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관한 최초의 논문은 보야이의 논문이 인쇄되기 2,3년 전인 1829-1830년에 Kasan Bulletin 에 발표했다. 이 논문은 러시아에서는 거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러시아어로 쓰여졌기 때문에 실제로 다른 곳에서도 아무런 관심을 끌지 못했다. 로바체프스키는 이 최초의 논문을 다른 곳에 소개시키려 하였다.예를 들어 좀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려고 1840년 <평행 이론에 관한 기하학적 연구, Geoinetrische Untersuchungen zur Theorie der Parallellinien>라는 제목의 독일어로 소책자를 발간하고, 죽기 1년 전이며 장님이된 1년 후인 1855년에 <범기하학, Pangeometrie.이라는 제목의 프랑스어로 쓰여진 최종적이며 전선된 논문을 발간하였다.
당시에는 새로운 발표에 대한 정보가 매우 늦게 전파되었지 때문에 가우스는 1840년 독일어판이 나와서야 비로소 로바체프스키의 논문을 보았고, 야노스 볼리아이는 1848년까지 그 논문을 모르고 있었다. 로바체프스키 자신은 그의 논문이 널리 알려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가 발전시키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오늘날 종종 로바체프스키의 기하학(Lobachevskian geometry)이라 불린다. |
르장드르(Adrien-Marie Legendre :1752-18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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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장드르(Adrien-Marie Legendre, 1752-1833)는 많은 명제를 상당히 단순화하고 재정리 하여 유클리드의 <원론>을 교육적으로 개선하려 시도했던 매우 유명한 그의 책 <기하학의 원리, Elemen ts de geomerrie>로 기초 수학사에 이름이 알려졌다. 이 논문은 미국에서 매우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져서 금세기 기하학 교과서의 표준이 되었다. 실제로 1819년 하버드 대학교의 파라(Johe Parrar)가 르장드르의 기하학을 처음 영역하였다. 고등수학에서 르장드르의 주된연구는 정수론, 타원함수, 최소제곱법, 적분에 관하여 집중되었는데, 이것은 수준이 높아서 여기서 다룰 수 없다.
또한 수학적 표를 면밀히 계산하였다. 1794년에 나온 <기하학의 원리> 외에 르장드르는 최초로 정수론만을 다룬 859페이지짜리 책 두권 <정수론, Essai sur la theorie des nombres>(1797-1798)을 발간하였다. 그는 후에 포괄성과 권위에서 오일러의 유사 서술과 경쟁이되었던 세 권짜리 책 <적분학 연습, Exercises de calcul Integral>(1811-1819)을 썼다. 측지학에서 르장드르는 프랑스 삼각측량법으로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
노르웨이의 수학자. 노르드피오르데이드 출생. 크리스티아니아대학(현 오슬로대학)에서 수학한 후, 1869년 독일의 베를린으로 갔다. 그곳에서 F.클라인(1849∼1925)과 친교를 맺고 공동으로 수학연구를 하고 논문도 썼다. 그 후 71년 크리스티아니아대학으로부터 학위를 받고 이듬해에 이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73년 연속변환군의 연구를 시작하여 ‘리의 구면기하학(球面幾何學)’을 발견하였으며, 84년 이후 F.엥겔(1821∼96)과 협력하여 변환군 연구를 계속하였다. 86년 클라인의 뒤를 이어 라이프치히대학 교수로 부임하여 98년까지 강의하였다. 98년에 건강을 해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변환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하여 해석적인 형태로 이 운동을 추구하여 기하학적 변환의 이론에 신기원을 이루어 놓은 것과 함께 변환의 일반이론의 기초를 확립함으로서 연속군(連續群)의 이론을 창시하였다. 이 연속군을 리군(群)이라 부르는 것은 그의 이름을 따서 붙인 때문이다. 또한 미분방정식론에의 공헌도 컸다.
저서에는 F.엥겔과의 공저인 《변환군론(變換群論):Theorie der Transformationsgruppen》(3권, 1893)과 G.셰파스와의 공저인 《연속군론(連續群論) 강의》 등이 있다. |
리만(Geoorg Friedrich Bernhard Riemann :1826-18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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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만은 1826년 하노버의 조그만 마을에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수줍음이 많고 허약했다. 그는 아버지의 검소하ㅈ 환경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대학과 괴팅겐 대학에서 좋은 교육을 받았다. 그는 후자의 학교에서 복소함수론 분야의 뛰어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에서 복소변수를 가지는 함수의 해석적인 성질과 해석학에 위상적인 고찰을 소개한 리만곡면의 매우 유용한 개념을 보증하는 소위 코시-리만 방정식(비록 리만시대 이전에 알려졌지만)이 나온다. 리만은 20세기에 더 일반적인 그베그 적분으로, 그 후 적분의 보다 더 깊은 일반화에 이른, 현재 우리가 림나적분으로 알고 잇는 것의 저으이에 의하여 적분가능성의 개념을 명백히 하였다. 후에 아인슈타인과 그 밖의 사람들이 라만의 공간과 기하학의 폭넓은 개념이 일반 상대성이론에 필요한 수학적 토양임을 알게 되었다. 리만 자신도 이론 물리학의 다방면에 공헌하였는데. 예를 들어 그는 충격파의 수학적인 논법을 최초로 도입했다. 수학문헌에서 소위 리만 제타함수(Riemann zeta funxtion)와 리만 가설(Riemann bypothesis)이 유명하다. 후자는 정수론에서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와 비교되는 고전적 해석학에서의 유명한 미해결 추측이다. 리만은 1857년에 괴팅겐 대학교의 조교수로 임명되고, 1859년 한때 가우스가 차지했던 디리클렌의 교수직을 승계하여 정교수가 되었다. 리만은 40세의 젊은 나이에 건강을 회복하기 위하여 찾아간 북부 이탈리아에서 폐결핵으로 죽었다. |
매클로린(Colin Maclaurin :1698-17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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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클로린은 기하학 특히 고차원 곡선에 관하여 매우 유명한 논문을 썼으며, 고전 기하학을 물리 문제들에 응용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응용수학에 관한 그 많은 논문 중에는 상을 받은 조수의 수학적 이론에 관한 논문이 있다. 그의 <유율법 연구, Treatise of Fluxions>에는 회전하는 두 타원체의 인력에 관한 고찰이 실려 있다. 매클로린은 수학의 천재였다. 11세의 나이에 글라스고우 대학교에 입학이 허가되어 15세에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중력의 힘에 관한 학위논문의 훌륭한 공개 심사를 받았다. 19세에는 에버딘에 있는 매리스칼 대학의 수학 교수직에 선발되었고 21세에 최초의 중요한 책<기하학의 기본, Geometria organica>을 발간하였다.
27세에는 에딘버러 대학의 수학 교수의 조교가 되었다. 조교 수당을 얻는데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대학교가 이 뛰어난 젊은이를 고용할 수 있도록 뉴턴이 개인적으로 비용을 부담하였다. 오래지 않아 매클로린은 그가 돕던 교수를 승계하였다. 미분에 관한 논문은 그가 죽기 겨우 4년 적인 44세 때 나왔는데 이것은 뉴턴의 유율법에 관한 최초의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해설이며 미적분학의 원리들에 관한 버클리(Bishop Berkeley)의 공격에 대한 답으로서 매클로린이 쓴 것이다. |
메나이크모스(Menaechmus :BC380-BC3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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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4세기 후반에 활약한 그리스의 수학자. 에우독소스(Eudoxos)의 제자로, 2개의 비례중항(比例中項)의 문제에 관한 해법을 하던 중, 원뿔곡선과 그 성질을 발견하였다. 다만 원뿔곡선은 평면이 원뿔의 모선에 대하여 항상 직각으로 자를 때 생긴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꼭지각이 예각일 때 타원, 직각일 때 포물선, 둔각일 때 쌍곡선이 생긴다고 하였다. 이 밖에도 ‘기하학 전체를 보다 완전한 것으로 만든 사람’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기하학 원리의 뜻, 정리와 문제의 구별, 명제의 전환 가능성 등에 관해 광범위하게 논하였다. |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천문학자·물리학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출생. 98년 로마에 천문대를 건립하였다. 저서로, 원의 현에 관한 저작(6권)이 있었다고 하나 없어지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는 아라비아어·헤브라이어·라틴어 등으로 번역된 《구면학(球面學):Sphaerica)》(3권)이 있다. 이것은 구면삼각형을 취급한 것으로, 유클리드의 평면삼각형에 대응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제1권에는 구면삼각형의 개념과 정의 등이 있고 제2권은 천문학의 입장에서 구면학을 취급하였으며, 제3권에는 ‘메넬라우스의 정리’를 비롯하여 유클리드의 《기하학원본》 제6권과 유사한 비례의 제명제(諸命題)가 있다. |
몽주(Gaspard Monge :1746-18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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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주는 그가 태어난 도시인 본(Beaunne )에 있는 오라토리오외의 대학에서, 또 16세에 물리학 강사가 되었던, 리용에 있는 그들의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고향의 대규모 지도를 정교하게 만든 덕분에 메지엘에 있는 병학교에 제도공으로 취직하게 되었다. 공급된 자료로부터, 계획된 요새의 포 위치를 찾아내라는 요청을 받고 몽주는 당시의 길고 지루한 산술적 과정을 빠른 기하학적 방법을 매체하였다. 3차원 물체를 2차원 평면에 적절히 사용하여 현명하게 표현한 것 중의 하나인 그의 방법은 군에서 채택하여 일급비밀로 분류하였다. 후에 그것은 화법기하학(iescriptive geometry) 으로 널리 가르쳐졌다. 몽주는 1768년 메지엘의 수학 교수, 1771년에 물리학 교수가 되었으며 1780년에는 파리 학원의 수리학 교수에 임명되었다. 몽주는 해군성 장관으로 재직하며 육군에서 사용하는 무기와 화약을 제조했다. 1795년 에콜 폴리테크 설립할 때 집정부하에서 주동적인 역할을 했고 그곳에서 수학 교수를 지냈다. 그는 나폴레옹과 친하게 지냈고 존경했으며 후에 실패로 끝난 1798년의 이집트 원정에 수학자 푸리에(Joseph Fourier, 1758-1831)와 함께 수행했었다. 프랑스로 돌아와서는 에클 폴리테크니크의 자리에 복귀하여 뛰어난 재능을 지닌 교수임을 입증했다. 그 곳에서 그의 강의는 젊고 유능한 많은 기하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는데, 그들 가운데는 미분기하학 분야에 기여한 듀팽(Charles Dupin, 1784-1873)과 사영기하학 분야에 기여한 퐁슬레(Jean Vivtor Poncelert,1788-1867)도였다. 화법기하학의 장사 외에도 몽주는 미분기하학의 아버지로 간주된다. 그의 논문 <해석학의 기하학에로의 응용, Application del'analyse a la geometrie 0>은 5판이나 발간되었고, 곡면의 미분기하학의 초기 연구의 가장 중요한 것들 중의 하나였다. 몽주는 여기에서 무엇보다도 3차원 공간에 있는 곡면의 곡률선의 개념을 소개했다. 미분기하학에 대한 몽주의 업적은 주로 곡면의 외적인 기하학에 관한 것이다. 몽주는 그가 태어난 도시인 본(Beaunne )에 있는 오라토리오외의 대학에서, 또 16세에 물리학 강사가 되었던, 리용에 있는 그들의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고향의 대규모 지도를 정교하게 만든 덕분에 메지엘에 있는 병학교에 제도공으로 취직하게 되었다. 공급된 자료로부터, 계획된 요새의 포 위치를 찾아내라는 요청을 받고 몽주는 당시의 길고 지루한 산술적 과정을 빠른 기하학적 방법을 매체하였다. 3차원 물체를 2차원 평면에 적절히 사용하여 현명하게 표현한 것 중의 하나인 그의 방법은 군에서 채택하여 일급비밀로 분류하였다. 후에 그것은 화법기하학(iescriptive geometry) 으로 널리 가르쳐졌다. 몽주는 1768년 메지엘의 수학 교수, 1771년에 물리학 교수가 되었으며 1780년에는 파리 학원의 수리학 교수에 임명되었다 |
뫼비우스(August Ferdinand Mobius :1790-18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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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비우스 띠는 1865년 발견된 이래로 전문가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매력적인 관심사가 되어 왔다. 뫼비우스 띠는 한때 수학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세월이 흐른 뒤에는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원천으로 더욱 유명해진다. 뫼비우스 띠는 독일의 수학자이며 천문학자인 뫼비우스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 발견은 위상수학이라 불리는 완전히 새로운 수학분과의 모태가 되었다. 위상수학은 연속 변형 하에서도 변하지 않고 유지되는 표면의 성질을 연구한다. |
민코프스키(Minkowski :1864-19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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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활동한 러시아 출신의 수학자. 리투아니아의 코브노 근교 출생. 쾨니히스베르크대학에서 공부했다. 그 무렵부터 D.힐베르트와 평생에 걸친 친교를 맺기 시작했다. 1895년 쾨니히스베르크대학 교수가 되었고, 96년 취리히대학, 이어서 1902년 괴팅겐대학으로 옮겼다. 정수론에 기하학적 방법을 도입하여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연구로 유명하다. 일반적으로 ‘민코프스키의 시공세계(時空世界)’ 즉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의 4차원적 시공(時空)의 기하학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상대성이론의 시간·공간개념을 논하였고, 또한 물리법칙의 로렌츠군(群)에 대한 불변성을 해명하여 상대성이론의 형성에 공헌을 하였는데, 4차원세계의 기하학은 그 묘상화에 기여를 한 것이었다. 주요저서로 《수의 기하학:Geometrie der Zahlen》(1896), 《디오판토스 근사론(近似論)》(1907), 《공간과 시간:Raum und Zeit》(1909) 등이 있다 |
바이어 슈트라스(K.T.W. Weierstrass :1815-18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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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시절을 법학과 경제학의 공부로 보내 방향을 잘못 잡은 바이어슈트라스는 늦게 수학공부를 시작하였고, 4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베를린 대학교의 강사직을 얻어 중.고등학교 수업에서 벗어났으며, 1864년 그 대학교의 전암교수가 되어 마침내 모든 시간을 고등학교 수학에 전념할 수 있기까지는 또 8년이 걸렸다. 바이어 슈트라스는 중등교육에 바쳤던 세월을 전혀 후회하지 않았고, 후에 대학교 재직시 뛰어난 교수 능력을 발휘하여 이제까지 알려진 고등수학의 가장 훌륭한 강의자가 되었다. 바이어슈트라스는 초타원적분, 아벨함수, 대수적 미분방정식에 관한 많은 초기 논문을 썼으나, 가장 널리 알려진 수학적 업적은 몇급수를 써서 복소수함수론에 기여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것은 일찍이 라그랑주가 생각한 복소평면에 대한 확장이지만, 바이어슈트라스는 그것을 엄격하게 완성하였다. 대수학에서 바이어슈트라스는 행렬식을 소위 공준적으로 정의한 최초의 사람일 것이다.그는 정사각행렬 A의 향렬식을, A의 각 행의 성분의 동차선형이고, A의 두 행을 교환하면 부호만 바뀌며, A가 단위행렬이면 1이 되는 A의 성분의 다항식으로 정의 하였다. 바이어슈트라스는 매우 감화를 주는 선생이었고 매우 세심하게 준비된 강의는 많은 미래 수학자들에게 전형을 세워주었으며 '바이어슈트라스의 엄밀함'은 '극도로 주의깊은 추론'과 동의어가 되었다. 바이어슈트라스는 '탁월한 수학적 양심이었고, '현대 해석학의 아버지'로 알려지게 되엇다. 그는 라그랑주가 1797년에 미적분학을 엄밀하게 하려는 시도의 첫번째 발표를 한 지 꼭 100년 후인 1897년 베를린에서 죽었다. 이 수학의 엄밀화와 더불어 오늘날의 수학에서 매우 뚜렷해진 추상적 일반화 경향이 나타났다. 아마 19세기의 다른 어떤 수학자보다 독일의 수학자 리만이 현대 수학의 이 특징에 더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는 확실히 수많은 수학분야, 특히 기하학과 함수론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후학들에게 보다 높은 수준의 발전에 대한 생각을 이보다 더 풍부하게 물려준 수학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
배로(Isaac Barrow :1603-16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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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로는 케임브리지에서 교육을 마쳤으며 그리스어에 가장 능숙한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수학, 물리, 천문학, 신학에 걸쳐 두루 인정을 받은 매우 학구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육체적 강인성, 용감성, 반짝이는 재치와 꼼꼼한 성실성에 대한 재미있는 얘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그는 케임브리지에서 루카스 교수직에 임명된 최초의 사람이었는데 1669년 위대한 제자 뉴턴을 위해 관대하게 이 자리를 사임했다. 그는 1677년 케임브리지에서 일생을 마쳤다. 배로의 가장 중요한 수학적 업적은 <기하학 강의, Lectiones opticae et geometricae>인데 케임브리지에서 교수직을 사임한 해에 출간되었다. 이책의 서문에서 책 내용의 일부, 아마 광학을 다룬 부분은 뉴턴의 덕임을 인정하고 있다. 바로 이 책에서 요즘 교과서에 나오는 미소삼각형(differential triangle)을 사용하고 있는 현대 미분과정과 매우 비슷한 접근방법이 나온다. 다른 분야에서 나타나는 증거가 미약함에도 불구하고, 배로는 일반적으로 미분법과 적분법이 역연산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최초의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이 중요한 발견이 소위 미적분학의 기본정리이며 배로의<기하학 강의>에 소개되고 증명되었다 |
베비지(Charles Babbage :1791-18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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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현대의 전자 컴퓨터를 내다보았던, 원칙적으로는 공학적 계산 기계를 고안하고 만들어 냈던 영국의 수학자이자 발명가였다. 그는 Devon에 있는 Teignmouth에서 태어났으며 캠브리지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1816년 왕립학회의 회원이 되었으며 왕립 천문학회와 통계학회인 Analytical의 창설 활동을 했다. 1820년 그는 간단한 수학적 계산을 할 수 있는 기계 장치인 Difference Engine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이 기계를 만들기 시작했으나 기금이 부족하여 완성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1991년 영국 과학자들은 그의 세부 도안과 설계 명세서를 보고 만들어 냈다. 이 기계는 베비지의 고안이 견고했다는 것을 증명하면서 소수점 이하 31자리까지 정확하게 계산해 냈다. 1830년에는 좀 더 정밀한 계산을 수행하도록 고안된 Analytical Engine을 만들기 시작했으나 이 장치 역시 만들어지지 못했다. 그의 저서인 "Economy of Machines and Manufactures(1832)"는 작동적 연구로 알려져 있는 연구 분야를 창시했다 |
보야이(Janos Bolyai :1802-18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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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야이는 1832년 아버지의 수학책 부록에 그의 발견을 발표했다. 후에 로바체프스키가 1829-1830년경에 비슷한 발견을 발표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지만 언어의 장애와 새로운 발견에 대한 정보의 전파가 느렸기 때문에 로바체프스키의 논문이 서유럽에 알려지는 데는 몇 년이 걸렸다.
여러 사람이 다른 사람의 연구에 대한 정보를 어떻게 얻을 수있었는지 말해주는 복잡하고 알려지지 않은 이론을 여기에서 논의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아무튼 당시에는 이 문제에 관한 상당한 표절 시비가 있었다. 야노스(또는 요한) 볼리아이는 오스트리아 군의 헝가리 장교였고 , 시골 수학 교사이며 가우스의 오랜 친구인 파르카스(또는 볼프강)볼리아이의 아들이었다. 젊은 볼리아이는 의심할바 없이 평행공준에 대한 연구에, 일찍부터 이 문제는 관심을 보인 아버지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일찍이 1823년에 야노스 볼리아이는 그에게 직면한 문제의 실체를 이해하였으며 그 해 아버지에게 쓴 편지에서 그 연구에 매우 열줄하였으므ㅇㄹ 알 수 있다. 이 편지에서 자료를 정리할 시간과 기회를 찾을 수 있으면 바로 평행이론에 관한 연구를 발표하고 싶다고 밝혔고, "나는 무로부터 이상하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냈다."고 외쳤다. 아버지는 준비된 논문을 자신의 기초 수학에 관한 두 권으로 된, 약간 철학적인 책의 부록으로 실을 것을 주장하였다. 야노스가 고찰한 바를 확장시키고 정리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뎠으나 마침내 1829년 완성된 원고를 아버지에게 전했고 3년 후인 1832년 아버지의 책의 첫째 권에 26페이지짜리 부록으로 발간되었다. 야노스 볼리아이는 매우 많은 분량의 원고 더미를 뒤에 남겼으나 더 이상 아무것도 발표하지 않았다. 그의 주요 관심사는 평행공준과 독립이고, 따라서 유클리드 기하학과 새로운 기하학 모두에서 성립되는 명제의 집합을 뜻하는, 그가 '공간의 절대적 과학' (the absolute science of space)이라 부르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
볼테라(Volterra, Vito :1860-19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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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수학자·물리학자. 안코나 출생. 1883년 피사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이어 토리노대학(1893)을 거쳐 로마대학 교수로 취임하였다(1900). 수리물리학의 문제에 관한 업적이 있으며, 탄성이론에서 편미분방정식을 연구하였다. 변분(變分) 문제와 관련하여 N.H.아벨이 만든 방정식을 일반화하고, 이른바 ‘볼테라의 적분방정식’을 연구한 것은 유명한 일이다. 해석함수의 다가성(多價性)이 가산적인 데 불과하다는 것을 나타낸 ‘프앵카레-볼테라의 정리’ 등도 있으며, 현대수학의 중요한 분과인 위상해석학에서 선구적인 공헌을 하였다. |
부울(George Boole :1815-18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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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울은 1815년 영국의 링컨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하찮은 소매 상인이었고, 따라서 부울은 단지 국민학교 교육만을 받았으나 독학으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익혔다. 후에 국민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는 동안에 라플라스와 라그랑주의 저서를 통하여 형식 논리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1847년에 부울은 <놀리와 수학적 해석, The mathematical Analysis of Logie>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발간하였는데, 드 모르간은 이것을 획기적인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이 책에서 부울은 수학의 본질적인 특성은 내용보다는 형식에 존재하며 수학은 (일부 사전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주장하는 것처럼) 단치 "측정과 수의 과학" 이 아니라, 보다 폭넓게 그 기호에 대한 정확한 연산법칙에 따르는 기호와 내적인 무모순성만 요구하는 법칙으로 이루어진 연구라고 주장하였다. 2년 후 부울은 새로 설립된 아일랜드의 콕에 있는 퀸스 칼리지의 수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1854년 부울은 1847년의 초기 저술을 확장시키고 다듬어서 ,사고법칙에 대한 고찰, Investigation of the Laws of Thought>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만들었는데, 여기에서 형식논리와 오늘날 부울 대수라 알려진 집합의 대수인 새로운 대수학을 확립하였다. 최근에 부울 대수는 전기 스위치 회로이론 등과 같은 수많은 분야에 응용되고 있다. 1859년에 부울은 <미분방정식론, Treatise on Differential Equations>, 1860년에는 <차분법론, the Calculus of finite differenes>을 발표하였다. 후자는 오늘날까지 그 분야에서의 표준 저서가 되고 있다. 부울은 1864년 콕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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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르기(Brgi, Jobst :1552-16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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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의 수학자·천문학자. 라틴어로는 Justus Byrgius이다. 젊었을 때에는 궁정의 시계사(時計師)였는데, 나중에 카셀의 천문대에 들어갔으며, 또 프라하에서 J.케플러와 함께 지내기도 했다. J.네이피어나 H.브리그스와는 별도로 지수이론을 통하여 로그[對數]에 도달했으나, 역로그표[逆對數表] 《Arithmetische und geometrische Progress-Tabula》의 공간(公刊)은 네이피어의 공표보다 6년 뒤(1620)였고, 그것도 무기명이었다. 또한 1592년 간행된 《산술고본(算術稿本)》에서 소수(小數)를 사용하고 있는데, 케플러는 소수와 대수의 발견을 뷔르기의 것이라고 말하였다. |
브라마굽타는 7세기의 가장 뛰어난 인도 수학자로서 중앙 인도에 있는 우자인(Ujjain)의 천문대에서 일하였다. 그는 628년에 21장으로 된 천문학에 관한 책 <브라마-스푸타-싯단타, Brahma-Sphuta-Sidd'hanta, '브라마의 개정된 체계'라는 뜻>를 저술했는데 그중에서 12장과 18장이 수학을 다루고 있다. 850년경에 활약했던 마하비라는 남부 인도의 마이소르(Mysore)출신으로 기초 수학에 관한 저술을 하였다. 바스카라는 우자인의 바라하미히라와 브라마굽타의 도시에서 살았다. 그의 작품인 <싯단타 쉬로마니, Siddhanta Siromani, '천체계의 왕관'이라는 뜻>는 1150년에 쓰여졌는데 내용은 500년 전의 브라마굽타의 작품보다 더 진보된 것이 거의 없음을 보여 주고 있다. 바스카라의 작품 중에 가장 중요한 수학적 부분인<릴라바티, Lilavati, '아름다운 것'이라는 뜻>와 <비쟈가니타, Vijaganita, '종자산술'이라는 뜻>는 각각 산술과 대수를 다루고 있다 |
브래드워딘(Thomas Bradwardine :1290-13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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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신학자·수학자. 캔터베리 대주교(1348), 에드워드 3세의 교계사(敎誡師) 등을 역임하였으며, 펠라기우스 주의에 대하여 반대입장을 취한 것으로 유명하다. 옥스퍼드의 머튼 학파의 중심이 되어, 운동의 수학적 논구를 진척시켜, 수학적 자연학의 길을 열었다. 역학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 서서 이를 수정·발전시켰고, 비(比)의 법칙을 대수(對數) 관계로 바꾸어 놓았으며, 아벤파케 등의 ‘내재적 동력(內在的動力)’의 생각을 비판하였다.
저서 《비례론(比例論)》(1328)에서는 운동의 기술에 대수(代數) 관계가 처음으로 쓰였으며, 그의 운동법칙은 참다운 아리스토텔레스 역학으로서 G.갈릴레이 이전의 역학을 지배하였다. |
브로워(Luitzen Egbertus Jan Brouwer :1881~19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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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의 직관주의적 견해의 지도자이며 불굴의 옹호자였던 브로워는 수학의 다름 분야에서도 명성을 남겼다. 그는 현대 위상수학의 창시자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지며, 특히 불변정리(invariance theorem)와 부동점정리(fixed-point theorem)로 잘 알려져 있다. 브로워는 1882년에 태어나서 암스테르담 대학교에서 대부분의 교수생활을 하였으며 1966년에 죽었다. 그는 믿음에 대해서는 냉정한 투쟁가였다. 투고된 논문의 허용과 기각을 담당한< Mathematische Annalen>의 편집자로서 그것의 참 또는 거짓이 유한 번의 과정으로 결정될 수 없는 명제에 배중률을 적용한 모든 논문들을 기각함으로써 귀류법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에 대한 포문을 열었다. 그리하여 그 저널의 편집위원회가 모두 사임하는 의기를 맞았으나 브로워만 빼고 모두 재선되었다. 네덜란드 정부는 그들의 지도자적 수학자를 이렇게 냉대한 것에 매우 분개하여 이것과 경쟁하는 수학 잡지를 만들어 브로워에게 책임을 맡겼다. |
비에트(Francois Viete :1540-16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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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의 가장 위대한 프랑스 수학자는 프랑수아 비에트(Francois Viete)로서 흔히 그를 라틴어 이름인 비에타(Vieta)라고도 부르는데 그는 고등법원 판사로 일하면서 대부분의 여가시간을 수학에 몰두했다. 그는 1540년에 퐁테네(Fontenay)에서 태어나서 1603년에 파리에서 죽었다. 비에트에 관한 몇 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한번은 베네룩스제국(현재의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지방)대사가 앙리 4세(Henry Ⅳ)에게 다음과 같이 큰소리쳤다고 한다. 프랑스에는 1593년에 우리나라의 아드리아누스 로마누스(Adrianus Romanus, 1561-1605)가 제시한 45차방정식의 근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그리하여 비에트가 그 자리에 출두되었고 그의 앞에 로마누스의 방정식이 놓아졌다. 기초적인 삼각법을 이해하고 있었던 비에트는 단 몇 분만에 두 개의 근을 찾았고 그 뒤에 21개의 근을 더 찾았다. 그러나 그도 음근은 생각해내지 못했다. 이번에는 비에트가 로마누스에게 아폴로니우스의 문제를 풀어보라는 도전장을 냈다. 그러나 로마누스는 유클리드 도구만을 가지고는 해를 구할 수 없었다. 그는비에트의 우아한 해를 본 후에 비에트를 만나기 위하여 퐁테네를 방문했고 그리하여 그들 사이에 따뜻한 우정이 맺어졌다. 또 비에트는 스페인과 전쟁중에 수백개의 문자로 된 암호문을 해독하는 데 성공하여 프랑스가 2년동안 전쟁에서 유리한 전략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자 스페인의 필립 2세(Philip Ⅱ)는 그 암호문이 절대로 해독될 수 없는 것으로 믿은 나머지 교황에게 프랑스가 "기독교 신앙의 실천을 위배하여" 악마를 고용했다고 불평했다. 비에트는 수학에 일단 몰입하면 서재에서 며칠 동안이고 밖으로 나오지 ㅇ낳았다고 전해진다.. 비에트는 삼각법, 대수, 기하학 등에 관하여 많은 저술을 하였는데, 그중에서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수학 요람, Canon mathematicus seu ad triangula>(1579) <해석학 서설, In artem analyticam isagoge>(1591) <보 기하학, Supplementum geometriae>(1593) <방정식의 수학적 해법, De numerosa potestaum resolutione>(1600) <방정식의 재검토와 수정, De aeguationum recognitione et emendatione>(이는 비에트가 죽은 후 1651년에 출간되었다. 비에트는 뛰어난 대수학자였으므로 그가 기하학에 대수와 삼각법을 응용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는 고대의 3대 잘도문제 중 각의 삼등분과 배적의 문제가 3차방정식의 해법에 의존한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그 문제들의 연구에 진일모를 가져다 주었다. 8절에서 이미 비에트의 n의 계산값과 또 2/π로 수렴하는 흥미로운 무한적에 대하여 언급한 바 있으며 6-4절에서는 그가 아폴로니우스의 분실된 저작<접촉론>의 재현을 시도했었음을 얘기한 바 있다. 1594년에 비에트는 그레고리력(서양신력)에 대한 클라비우스(Clavius)와의 격심한 논쟁으로 인하여 약간의 나쁜 평판을 얻었다. 이문제에서 비에트의 태도는 완전히 비과학적이었다. |
사케리(Saccheri, Girolamo :1667-17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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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수학자. 밀라노의 예수회 신부로 파비아의 예수회 신학교 교수이며 비유클리드기하학의 선구자이다. 18세기 초 유클리드의 《기하학원본》에 의한 기하학의 기초에 대한 불신이 높아져, 유클리드의 공리계, 특히 평행선의 공준에 대해 비판적인 논문을 많이 썼다. 그 중 사케리가 죽은 해에 나온 《모든 결점이 제거된 유클리드》는 J.H.람베르트의 논문 <평행선론> 등에 큰 영향을 주었고 19세기에 들어서자 J.보여이, N.I.로바체프스키 등의 비유클리드기하학으로 발전하였다. |
소피제르맹(Marie-Sophie Germain :1776-18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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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년 4월 1일 파리에서 부호의 딸로 탄생하여, 어려서부터 정규교육을 받았으며, 그녀가 13살 되던 해 우연히도 아버지의 서고에서 수학사에 관한 서적을 읽던 중 아르키메데스의 죽음에 관한 일화를 읽고, 수학이라는 학문의 연구가 한 인간에게, 죽음에 대한 공포마저 잊게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크게 감탄하였다. 이를 계기로 하여 그녀는 수학을 공부하려는 욕망에 불탔지만, 아버지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불타는 욕망을 누를 길이 없어서 그녀는 매일 같이, 모든 가족들이 잠든 심야에 일어나 남몰래 수학공부를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하도 피곤하여 책상에 엎드려 날이 밝도록 깊은 잠에 빠져버린 것이 아버지에게 발각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아버지가 그 열성에 감탄하여 수학공부를 허락해 주었다 한다. 그후 그녀는 완전히 독학으로 수학공부를 계속하였으며, 특히 1794년에 파리공과대학(Ecole Polytechnique)이 나폴레옹에 의하여 개교하게 됨으로써, 수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가 하고 기뻐하였다. 그러나 이 공과대학에서는 여학생의 입학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르멩의 꿈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 말았다. 그래서 제르멩은 궁여지책으로 이 대학의 수학교수인 라그랑주(J. Lagrange, 1736~1813)의 강의록을 손에 넣어가지고 이를 열심히 공부하는 동시에, 이 강의록에다 주석(註釋)을 달고 또 잘 납득이 되지 않는 곳에 대하여는 의심점을 지적하여, 이 대학의 학생이었던 르 블랑(M. Le Blanc)의 이름을 빌어 직접 라그랑주에게 보내곤 하였다. 라그랑주는 그 주석이나 지적된 내용이 너무도 적절하고 훌륭하였으므로 학생 르 블랑에 대하여 많은 감탄을 아끼지 않았는데, 사실을 알고 보니 그것은 르 블랑이 한 일이 아니라, 제르멩이라는 여자가 한 것임을 알고서는 다시 한번 크게 놀랐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안 라그랑주는 곧 그녀의 집을 방문하여 크게 격려를 하여 주는 동시에 당시의 많은 수학자들에게 그녀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그녀가 25세 되던 해(1801)에는, 독일의 대수학자 가우스(C. F. Gauss)의 '정수론 연구(整數論硏究)'가 발간되었는데, 그녀는 역시 이 책을 통하여 정수론을 연구하게 되었으며, 이 경우에도 르 블랑의 이름을 빌어 가우스와 접촉하였다. 가우스와의 접촉을 통하여 제르멩이 이루어 놓은 가장 큰 업적은 그 유명한 페르마(P. de Fermat, 1601~1665)의 마지막 정리를 n<100인 경우에 모두 해결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가우스가 르 블랑의 정체가 제르멩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수년 후 그야말로 우연한 계기에서였다. 그 당시, 곧 1807년에 나폴레옹의 군대가 가우스의 고향인 브라운슈바이크에 진주하게 되었다. 이 프랑스군의 진주로 말미암아, 아르키메데스의 죽음과 같은 것이 가우스의 신변에도 닥쳐오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에, 제르멩은 그녀의 부친의 친구의 진주군의 지휘관에게 서한을 보내어, 가우스의 신변의 안전을 배려해 주도록 부탁한 것이 계기가 되어, 르 블랑의 정체가 제르멩임을 알게 되었다 한다. 이 사실을 안 가우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곧 '내가 존경하며 서한을 교환하여 온 상대자인 르 블랑씨가, 갑자기 그 유명한 여류수학자 제르멩으로 변신한 데 대한 나의 놀라움을 무엇으로 형용할 수 있을까…?' 이와 같이 하여 제르멩은 가우스에 의하여 높이 평가되는 동시에 가우스와 학문적 친구로서 친밀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1810년 이후에는, 제르멩은 순수수학에서 응용수학쪽으로 연구방향을 바꾸었으며, 특히 탄성론(彈性論)의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1816년에는 프랑스 아카데미에서 '아카데미상'을 제르멩에게 수여하였으며, 그녀가 죽은 후에는 가우스의 노력에 의하여 괴팅겐 대학의 명예박사 학위가 수여되기도 하였다. |
쉬케(Chuquet, Nicola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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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수학자. 파리 출생. 1500년경 르네상스시대에 최초로 대수학서를 집필하였다. 파리대학을 나와 리옹에서 의사로 일했다. 《수의 과학에 있어서의 세 부분:Le triparty en la science des nombres》을 저술했다. 이 책은 3부로 되어 있는데, 1부에서는 유리수의 계산을 다루면서 합리적인 계산법과 인도, 아라비아수들을 설명해 놓았다. 2부는 무리수, 3부는 방정식으로, 가장 핵심 부분인 3부는 현대의 대수를 다루고 있다. ‘플러스’, ‘마이너스’라고 말로 표현했던 것을 ‘p??', ‘m’이라는 기호를 사용하였고, 미지수의 거듭제곱에 대한 간편한 표기법을 고안하였다. 또한 명수법의 문제도 해결하였다. |
슈타이너(Jacob Steiner :1796-18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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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영기하학에서의 퐁슬레의 착상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가장 위대한 종합기하학자 중의 한 사람인, 스위자 기하학자 슈타이너가 보다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슈타이너는 1796년 우첸스드르프에서 태어났고, 14세가 되도록 교육을 받지 못해서 글자 하나 제대로 쓰지 못했다. 17세 때 그는 유명한 스위스 교육자 페스탈로치(Johann Heinrich Pestalozzi, 1746-1827)제자가 되었는데, 이때부터 수학에 대한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 후 1818년에 슈타이너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입학하여 수학적 재능을 발휘하였다. 1821년 베를린으로 가서 가정교사를 시작하고 곧이어 공업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그의 이름은 새로 설립된 크렐레 저널에 투고한 논문을 통하여 잘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와 아벨이 그 잡지의 전도적인 기고자였다. 1834년 야코비, 크렐레, 훔볼트의 추천으로 베를린 대락의 교수기되어 나머지 교직 생활을 그 곳에서 하였다. 건강이 나빠서 말년을 스위스에서 보내고 1863년 베른에 죽었다. "아폴로니우스 시대 이래 가장 위대한 기하학자"로 묘사되는 슈타이너는 기하학의 종합적 논법에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 분야에 많은 기여를 하였고, 최고 수준의 수많은 논문을 썼다. 그는 기하학의 해석적 방법을 기하학적으로 의지가 약한 사람들의 목발로 여기며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종종 증명을 적을 시간도 없을 만큼 막대한 속도로 새로운 기하학을 창조하였는데, 그 결과 그의 많은 발견이 수년 동안 증명을 찾는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로 남았다. 그의 <체계적 발전, Systematische Entwickelunger>이 1832년에 발간되자 곧바로 명성을 떨쳤다. 이 책에는 왕복운동의 완벽한 논의, 쌍대의 원리, 상사변환의 치역과 속선형, 조화분할, 다른 꼭지점을 가지는 두 호모그래프적 속선형에 대응하는 직선의 교점의 자취로서 원뿔곡선을 매우 효과적으로 정의한 정의에 기초한 원뿔곡선의 사영기하학이 실려 있다. 그는 공간에서의 n각형의 연구, 곡선과 곡면론, 수족, 곡선, 윤전곡선, 3차곡면상의 27개의 직선에 공헌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연구하던 변분법의 여러가지 지식이 요구되는 극대·극소에 관한 문제를 종합기하학을 써서 공략했다. 그의 이름은 말파티 문제의 슈타이너 해와 일반화, 슈타이너 체인, 슈타이너의 계, 신비한 육선형 성단의 슈타이너 점에서 같은 기하학의 많은 부분에서 마주친다. |
스테빈(Stevin, Simon :1548-16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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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수학자·물리학자·기술자. 스테비누스라고도 불린다. 벨기에의 브뤼주 출생. 브뤼주 시청에 근무하였으며, 후에 네덜란드 군대의 경리부장이 되었다. 그의 과학적 연구는 여러 방면에 걸친 것이었으며, 문학적·군사적인 양면의 기술자로서도 활약하였고, 특히 축성(築城)기사로서의 명성은 매우 높았다. 1582년 이자 계산표의 서적을 출판하여, 상인들에게 편의를 제공하였으며, 얼마 후에 《10분의 1에 관하여:De Thiende》(1585)라는 소책자에서 소수(小數)의 계산에 관한 최초의 조직적인 해설을 하였다. 여기서 소수(십진 분수)의 표기법과 계산법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이것의 사용을 장려하여 계산술 진보에 이바지하였다. 다소 복잡한 이 표기법은 훗날 비에타에 의해서 개량되었는데, 그가 정부에 진언하였던 십진법에 의거한 화폐 및 도량형 제도는 프랑스 혁명에 이르러 겨우 실현되었다. 이러한 내용은 《응용 산술》이라는 저서에 간추려져 있다. 그의 최대의 공헌은 역학 분야의 업적으로서, 이른바 아르키메데스적인 정역학(靜力學)은 스테빈에 의하여 대성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균형의 원리》(86)에서는 고체의 정역학과 유체의 정역학이 다루어졌으며, 또한 도르래의 이론을 전개하여 가상(假想) 변위의 원리에 이르고 있다. 특히 영구 운동이 불가능한 것을 전제로 하여, 빗면에 관한 균형의 조건을 음미하였고, ‘힘의 평행사변형의 법칙’을 발견한 공적은 매우 크다. 이 밖에 정수압(靜水壓)에서 수압기(水壓機)의 가능성을 예상하였고, 부체(浮體)의 균형을 다루기도 하였다. 훗날 네덜란드의 수륙 영선(營繕) 최고 감독관의 지위에 올랐다. |
실베스터(Jamcs Joseph Sylvester :1814-18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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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조지프 실베스터는 1814년 런던에서 여러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가족의 성은 원래 조지프였으나 장손이 미국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성 실베스터를 사칭하여 나머지 가족도 그것을 받아 들였다. 미국에 살던 그의 형은 보험계리사였는데, 미국의 복권청부업회 이사에게 그들이 골치를 석이는 복급조절에 관한 어려운 문제를겨우 16세인 동생 제임스에게 의뢰하기를 제안하였다. 실베스터의 완벽하고 만족스러운 문제 해법에 감탄한 이사는 젊은 수학자에게 상금으로 500달러를 주었다.
실베스터는 1883년에 케임브리지의 성 존스 칼리지에 입학하고, 6년 후 수학 학위시험에서 2등으로 졸업했다. 1838년에서 1840년 까지 런던 대학의 자연철학 교수로 재직하고 나서 1841년에 미국의 버지니아 대학교 수학교수가 되었으나 학생 두명과의 불화로 인해 단 몇 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보험계리사로 일하였으며 1850년에 변호사가 되었다. 캐일리와 사귀게 된 때는 1846년이었다. 실베스터는 1855년에서 1870년까지 울위치의 영국 육군사관학교의 수학교수로 있었다. 1876년에 볼티모어의 존스 홉킨스 대학교의 수학교수로 미국에 돌아와서 1878년 미국수학회지의 초대 편집인이 되어 매우 행복하고 성과가 많은 7년을 보냈다. 그는 존스 홉킨스 대학교 재직시에 알벨함수에 관한 일련의 강의에 캐일리를 초청했는데, 실베스터 자신도 그 강의에 참석하였다. 1884년 실베스터는 올스퍼드 대학교의 기하학 새빌리아 교수직을 얻었다. 그는 1897년 83세의 나이로 런던에서 죽었다. 실베스터의 초기 수학논문은 프레즈넬의 광학이론과 스털의 정리에 관한 것이었다. 그 후 캐일리의 영향을 받아 현대 대수학에 커다란 기여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수학의 아담'(The Adam of Mathematics)으로 알려질 정도로 괸장히 많은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 내면서 수학용어에 광범위한 기여를 하였다 |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287-212 B.C.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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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수학자 중의 한 사람이며 또 가장 위대한 고대인이었던 아르키메데스(Archimedes)는 기원전 287년경 시칠리아 섬에 있던 옛 그리스 도시 시러큐스(Syracuse) 에서 천문학자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로마가 시러큐스를 정복한 가원전 212년에 죽었다. 그는 평소에 시러큐스의 히에론(Hieron)왕의 깊은 총애를 받았다.(어쩌면 두 사람 사이에 어떤 특별한 관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 그가 코논(Conon), 도시테우스(Dositheus), 에라토스테네스(Eratosthenes) 등과 교분을 가졌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앞의 두 사람은 유클리드 후계자들이고 마지막 사람은 알렉산드리아 대학의 사서였는데, 아르키메데스의 많은 연구결과가 이들과의 편지 속에서 발견되었다), 그는 아마도 이집트에 건너가 알렉산드리아 대학에서 공부했던 것 같다. 로마의 역사학자들은 아르키메데스에 관한 많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특히 로마 장군 마르켈루스(Marcellus)가 시러큐스를 공격했을 때 아르키메데스가 시러큐스의 방어를 위하여 고안한 여러 가지 훌흉한 장치에 대한 설명이 있다. 그런 것 중에는 저의 배가 도시 성곽에 가까이 접근했을 때 그 배에 무거운 돌을 떨어뜨릴 수 있는 투석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사정거리를 조정할 수도 있고 이동 발사장치도 갖고 있었다. 또 그는 적의 배를 물에서 끌어올리게 할 수 있는 기중기도 만들었으며 적의 배를 불태우기 위해 커다란 볼록렌즈를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편 많은 사람들이 달라붙어야 간신히 끌어올릴 수 있는 커다란 배를 그는 합성 도르래장치를 이용하여 혼자서 간단히 끌어올린 다음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한다. "나에게 서 있을 자리를 다오. 그러면 지구를 움직여 보일 것이다.!" 아르키메데스는 너무 강력한 정신집중을 했기 때문에 한 문제에 몰두하면 주위에 대하여 망각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 예로서 히에론 왕의 왕관과 수상쩍은 금세공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히에론 왕이 금세공인에게 명령해서 금으로 왕관을 만들게 했는데 금세공인이 왕관을 만들어 가져왔을 때 히에론 왕은 그가 다소의 금을 빼돌리고 그 대신 은을 사용하여 왕관을 만들지 않았을까 의심하였다. 그래서 그는 아르키메데스와 이 문제를 상의하고 아르키메데스는 이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다. 어느 날 공중 목욕탕에서 정수역학의 제 1 법칙(부력에 관한 법칙)- 한 물체가 어떤 액체 속에 잠길 때 그것은 흘러나온 액체의 무게와 똑같은 힘으로 떠오른다- 을 생각해냈다. 아르키메데스는 이것을 발견하고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자신이 발가벗었다는 것도 잊은 채 "Eureka, eureka!(알아냈다, 알냈어!)"라고 외치면서 거리를 달렸다고 한다. 그 즉시 그는 저울의 한 쪽 접시 위에서 왕관을 놓고 또 다른 접시 위에서 똑같은 무게의 금을 얹어놓은 다음 물 속으로 그것을 집어 넣었다. 그러자 왕관을 담은 접시가 위로 떠올랐고 그래서 왕관 속에 금보다 밀도가 작은 어떤 이물질이 들어있다는 것을 보였다고 한다. 아르키메데스는 기하학을 연구할 때 대부분의 그림을 난로의 재나 목욕 후에 바르는 기름을 자기의 몸에 바른 후 그위에다가 그렸다고 한다. 그의 최후는 로마가 시러큐스를 약탈하고 있을 때 맞이 하게 된다. 그가 모래쟁반에 그림을 그려놓고 그것을 몰두하고 있었을 때 한 로마병사가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아르키메데스가 병사에게 "나의 그림을 밟지마오!"라고 외쳤는데, 이에 격분한 병사가 이 위해한 노인을 창으로 찌르고 말았다고 한다. 아르키메데스가 만든 병기 덕택으로 시려큐스는 거의 3 년간 로마의 공격으로부터 저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에 넘친 시러큐스인들이 축제를 벌이느라 경계를 소홀히한 틈을 타 로마는 간신히 시러큐스의 방어벽을 무너뜨릴 수가 있었다. 마르켈루스는 아르키메데스가 비록 적이긴 했지만 그에게 무한한 존경심을 갖고 있었으므로 힘겹게 시러큐스에게 입성한 후, 제일 먼저 이 훌륭한 수학자에게 절대로 손을 대지 말라는 엄한 명령을 내렸었다. 그랬으므로 마르켈루스가 아라크메데스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얼마나 비통에 잠겼을까 하는 것은 상상이 간다. 그는 이 유명한 학자를 그 도시의 공동묘지에 깊은 영광과 존경을 바쳐서 매장했다. 아르키메데스는 평소에 자신이 발견한 한 위대한 기하학적 도형에 대하여 대단한 긍지를 가져서 자기가 죽으면 묘비 위에 직위기둥에 내접하는 구의 그림을 새겨달라고 말했었다. 그래서 마르켈루스는 그의 소원이 이루어 지도고 해 주었다. 아르키메데스는 저작은 수학적 설명의 걸작품이며 놀라울 정도로 현대논문집의 논문들과 우수하다. 그것은 깔금한 표현, 우아한 끝맺음, 위대한 독창성, 계산기술과 논증의 엄격함 등을 보여주고 있다. 약 열 개의 논문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고 그 외에도 많은 논문이 쓰여ㅈㅆ지만 오늘날에는 분실되었다는 흔적이 있다. 이러한 저술 중 수학에서 가장 놀랄 만한 공헌은 아마도 적분법의 초기 개발일 것이다. |
아마다르(Jacques Salomon Hadamard :1865-19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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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수학자. 아다마르는 파리에 있는 콜레주 드 프랑스, 에콜 폴리테크니크, 국립중앙공예학교의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복소변수함소론, 특히 적분함수의 일반이론, 테일러 급수로 나타낸 함수의 틱이성 이론을 연구하여 많은 발전을 이룩하였다. 1896년에는 벨기에의 수학자 샤를 장 드 라 발레 푸셍과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수소정리를 증명했으며, 수리물리학의 편미분방정식에 관련된 중요한 결과를 얻었다. 그의 『변분법 강의』(1910)는 범함수라는 용어를 소개한 것과 관련하여 현대 함수 해석학에 대한 기초를 닦는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또한 행렬식에 대한 그의 연구 가운데 일부는 적분방정식 이론에서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
아벨(Niels Henrik Abel :1802-18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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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은 1802년 노르웨이의 핀도(Findo)에서 시골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크리스티애니어(Christiania:노르웨이의 수도)에 있는 학교에 다닐때, 일반 5차 방정식의 대수적해법을 발견했다고 생각했으나 곧 1824년 발표한 유명한 소논문에서 스스로 정정하였다. 이 초기의 논문에서 일반 5차방정식은 대수적으로 해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으며, 이것이 봄벨리(Bombelli)로 부터 비에트에 이르는 수학자들을 난처하게 했던 어려운 문제를 해결 하였다.이 논문의 결과로 아벨은 작은 장학금을 받았고,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로의 여행이 허용되었다. 이 여행을 다니는 동안에 무한급수의 수렴, 소위 아벨적분, 타원함수 등 여러 분야에 관한 수많은 논문을 썼다. 아벨은 타원함수에 관한 연구로 야코비(Kacobi)의 자극적이고 친숙한 경쟁자로 떠올랐다. 타원함수에 관하여 개척자적인 연구를 해왔던 늙은 르장드르는 아벨의 새로 창간된 (Crelle's Journal로 더 잘 알려짐)에 논문을 발표할 수 있었는데, 1권(1826)에는 아벨의 논문이 5편이상 실렸고 2권(1827)에는 이중주기 함수이론을 낳은 아벨의 논문이 실렸다. 해석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누구나 아벨의 적분방정식과 아벨함수로 유도되는 대수함수들의 적분의 합에 관한 아벨의 정리와 마주치게 된다. 무한급수에 관한 문제에는 아벨의 수렴 판정법과 멱급수에 관한 아벨의 정리가 있고, 추상 대수학에서 교환법칙이 성립하는 군을 오늘날 아벨군이라 부른다. 아벨은 평생 가난에 시달리고 폐병으로 고생하여 교수직을 가질 수 없었다. 그는 1829년 노르웨이의 프롤랜드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그가 죽은 이틀 후 베를린 대학의 교수직에 채용한다는 편지가 뒤늦게 배달되었다. 아벨은 생전에 나라로부터 거의 인정받지 못하였으나, 이제 그는 조국의 소액 우표에 등장한다, 그러나 수학자들은 특유의 방식으로 훨씬 더 오래 지속되는 아벨의 대한 기념비를 세웠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많은 정리와 이론에 아벨의 이름을 영속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에르미트(Hermite)는 아벨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는 수학자를 500년 동안 바쁘게 만든 문제들을 남겼다." 아벨은, 그가 그렇게 빨리 그의 학문 분야에거 최정상으로 나아가게된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가의 제자가 아니라 대가를 살펴보는 것이라 답했다. |
아이젠슈타인(Ferdinand Gotthold Max Eisenstein :1823-18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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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수학자. 베를린 출생. 집안이 가난하여, 프로이센 왕실의 비호로 수학을 공부하였다. 젊었을 때부터 재사(才士)로 소문이 나 1847년에 베를린대학 강사가 되었으나 아깝게도 요절하였다. K.J.야코비, P.G.L.디리클레, J.슈타이너 등과 함께 베를린에 수학 전성시대를 형성하여 B.리만 등 준재를 배출하게 하였다. 스승인 K.F.가우스는 그를 아르키메데스, I.뉴턴에 버금가는 위대한 수학자로 꼽았다고 한다. 짧은 생애에 정수론(整數論), 불변식론(不變式論), 타원함수론 등 많은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거듭제곱 잉여에 관한 ‘아이젠슈타인의 상호법칙’, 정수론이나 타원함수론에 쓰이는 ‘아이젠슈타인의 급수’, 유리정계수(有理整係數)의 다항식의 기약성(旣約性)에 관한 ‘아이젠슈타인의 정리’ 등에는 지금도 그의 이름을 붙여져 있다. |
아폴로니우스(Appolonius :262-190 B.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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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키메데스보다 약 25세쯤 아래인 아폴로니우스(Appolonius)는 기우너전 262년경에 남부 소아시아 지방에 있는 페르가(Peraa)에서 태어났다. 아폴로니우스의 일생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젊었을 때는 알렉산드리아에 유학해서 유클리드의 후계자로부터 배웠고 오랜 동안 그 곳에 남아 있었다. 나중에 서부 소아시아 지바에 있는 페르가뭄(Pergamum)을 방문했는데 그 곳에는 알렉산드리아 대학 이후 가장 최근에 세워진 대학과 도서관이 있었다. 나중에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왔고, 기원전 190년경 그 곳에서 죽었다. 비록 아폴로니우스가 뛰어난 천문학자이고 또 다양한 수학적 주제에 관하여 저술을 했다 하더라고 주요한 업적은 그이 놀랄 만한 저작<원추곡선론, Conic Sections>에 있을 것이다. 이 저작은 동시대인이 그를 '위대한 기하학자'로 부른 원인이기도 하다. 아폴로니우스 이전의 그리스인들은 원추곡선을 원뿔의 꼭지가이 90°보다 작으냐. 같으냐, 크냐에 따라 세 가지 형태의 회전뿔로부터 만들어냈다. 이들 세 원뿔을 원뿔의 한 요소와 수직인 평면으로 자르면 각각 타원, 포물선, 쌍곡선 등이 만들어진다. 이때 상곡선은 단지 한 부분만 나오게 된다. 그러나 아폴로니우스는 논문 제Ⅰ권에서 모든 원추곡선을 오늘날에 흔히 하는 것처럼 이중 직원뿔 또는 이중 빗원뿔로부터 모두 만들어냈다. 타원(ellipse), 포물선(parabola), 쌍곡선(hyperbola)이라는 이름은 아폴로니우스가 만든 것으로서 그것은 초기 피타고라스 학파가 면적에 대하여 사용한 용어로부터 따온 것이다. 피타 고라스 학파는 직사각형은 한 선분 위에 갖다 댈 때(즉 직사각형의 한 변을 선분 위에 갖다 놓을 때 직하각형의 변의 한 끝과 선분의 한 끝이 일치하도록 하는 것), 갖다 댄 직사각형의 변이 선분보다 짧으냐, 일치하느냐, 길으냐에 따라 변을 각각 'ellipsis'('부족하다'는 뜻의 그리스어). 'parabole' ('일치한다'는 뜻의 그리스어), 'hyperbole'(초과한다'는 뜻의 그리스어)의 경우라고 말했다 |
알콰리즈미(Al-Khwarizmi :780-8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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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콰리즈미는 아라비아의 수학자로서 자세한 그의 이름은 무하마드·이븐· 무사· 알·콰리즈미이다. 그는 이란계의 학자인데, 당시의 왕 알· 마문의 치세 시대에 활약하였다. 그는 이슬람 교도이면서 수학자이고 동시에 천문학자, 지리학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인도와 그리스 학문에도 정통하여 인도의 천문학서인 신드힌드를 발췌하여 책을 냈으며, 그리스의 수학자. 천문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의 sin표를 수정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천문 관측을 하여 지구의 자오선의 1도의 길이를 측정하기도 했다. 중세 수학에 커다란 영향을 준 산술책과 대수책을 썼으며 이 산술서에 의해 인도의 수학이 중세 유럽에 전해졌다. 하지만 아쉽게도 산술서의 원본은 전해지지 않고 라틴 어 번역 사본만이 남아 있다. 한편, 대수책에서는 완전한 형태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대수의 어원인 al-jabr(알·자부르), al -muquabala(알·무콰발라)에서 al-jabr는 방정식의 음의 항을 다른 변으로 이항한다는 것이고, al-muquabala는 양변의 동류항을 정리하여 방정식을 간단히 하는 것을 뜻한다. 그는 또한 지금의 판별식에 해당되는 것을 활용하여 이차방정식의 해를 구했으며, 이차방정식의 해법을 기하학적 증명을 통해 계산을 해내는 등 중세 수학사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현재 문제해결을 위한 연산체계를 나타내는 알고리즘(algorithm)은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
야곱 베르누이(Jakob Bernoulli :1654-17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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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 베르누이는 변분법을 연구한 최초의 수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또한 수학적 확률을 최초로 공부한 수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이 분야에 관한 책인 <추측술, Ars conjectandi>은 그가 죽은 후인 1713년에 발간되었다. 현재 야곱 베르누이의 이름을 지닌 수학적 내용들이 여러 개 있다. 이들 중에는 통계학과 확률론의 '베르누이 분포'와 '베르누이 정리'미분방정식의 첫 학기 강의에서 마주치는 '베르누이 방정식' 정수론의 '베르누이 수'와 '베르누이 다항식' 그리고 미적분학의 첫 학기 강의에 나오는 '베르누이의 연주형'(lemniscate) 등이 있다. 1690년 <학술기요, Acta eruditorum>에 발표된 등속상하고선 문제에 대한 야곱 베르누이의 풀이에서 최초로 '적분'(integral)이란 단어가 나온다. 라이프니츠는 적분을 '합분법'(calculus sumrnatorius)이라 불렀는데, 1696년 라이프니츠와 요한 베르누이는 그것을 '적분법'(calcutus integralis)이라 부르기로 동의했다. 야곱 베르누이는 등각나선이 다양한 변화하에서도 그 자체를 재생성하는 것에 영향을 받아 아르키메데스를 모방하여 그의 묘비에 이 나선을 "Eadern mutata resurgo"(나는 변하지만 똑같이 일어설 것이다)라는 비문과 함께 새기기를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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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코비(Carl Gustav Jacobi :1804-18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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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코비는 1804년 포츠담에서 유태인 부모 밑에 태어나 베를린 대학에서 공부하였으며, 그 곳에서 1825년에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2년 후 쾨니히스베르크의 임시 수학 교수에 임명되었고, 2년후 수학과 일반 교수로 진급하였다. 1842년 프러시아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고 쾨니히스베르크의 교수직을 사임하고 베를린으로 가서 1851년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뛰어난 수학 연구자이며 뛰어난 수학 교사는 드물다. 그러나 야코비는 예외적인 인물이었고, 전례 없이 많은 유능학 학생을 배출하고,격려하고, 영향을 준 의심할 바 없는 가장 위대한 수학 교수였다. 그의 가장 각광받는 연구 업적은 타원 함수에 관한 것들이다. 그와 아벨은 동시에 독립적으로 이 함수의 이론을 확립하였고, 야코비는 그것들에 대한 오늘날 표기에 필수적인 것을 소개하였다. 야코비는 아마 코시 다음으로 행렬식 이론에 가장 풍성한 기여를 한 사람일 것이다. '행렬식'(determioant)이란 말을 궁극적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바로 야코비이다. 후에 실베스터가 야코비안(Jacobian)이라 일컫는 함수 행렬식을 사용했는데, 함수론을 공부하는 모든 학생들은 이것을 접하게 된다. 그는 또한 정수록, 상미분 방정식 및 편미분방정식론, 진폭계산, 삼면체 문제, 그 밖에 다른 역학문제에 기여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연구를 하기 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을 우선 숙달해야만 한다고 느낀다. 학생들이 이러한 생각에 너무 얽매이지 않고 독립적인 연구에 처음부터 흥미를 느끼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야코비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해주곤 했다. "만일 너의 아버지가 한 사람과 결혼하기 전에 이 세상의 모든 처녀들을 알아야 한다고 고집했다면 결코 결혼을 하지 못했을 것이고 너 또한 태어날 수도 없었다." 또한 응용분야 연구에 반하여 순수 연구를 지지하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학의 실제적 목표는 인류지성의 명예이다." 야코비는 "신은 늘 기하학을 연구한다."라고 말한 플라톤의 말을 모방하여 "신은 늘 산술을 연구한다."고 말했다. 야코비는 수학분야의 위대한 동시대인에 관하여 말할 때 항상 관대했다. 그는 아벨의 걸적 중의 하나에 관하여 "그것이 내 자신의 논문보다 뛰어나듯이 내 칭찬이 미치지 못한다."라고 했다. |
에라토스테네스(Eratosthenes :BC 273?-BC 1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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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토스테네스(Eratosthenes)는 지중해의 남쪽 연안에 있는 키레네(Cyrene)에서 태어났으며 나이는 아르키메데스보다 몇 살쯤 아래였다.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아테네에서 보내고 약 40세쯤 되었을 때 이집트의 톨레미 3세의 초청으로 알렉산드리아로 와서 그의 아들의 개인교수로 일했고 또 알렉산드리아 대학의 도서관장을 지내기도 했다. 기원전 194년경 노인이 되었을 때 눈병 때문에 거의 장님이 되다시피하여, 결국 스스로 단식하여 자살하고 말았다. 에라토스테네스는 당시의 지식의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는데 수학자, 천문학자, 지리학자, 역사학자, 철학자, 시인, 하물며 운동가로서까지 명성을 날렸다. 알렉사드리아 대학의 학생들은 그를 5종 경기의 침피언인 '펜타슬루스'(Pentathlus) 라고 불렀다. 그는 또 '베타'(Beta)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이 별명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많다. 어떤 사람들은 이 '베타'라는 별명이 그의 광범위하고 뛰어난 지식이 그를 제 2 의 플라톤으로 간주할 만한 것이었지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고 또 한 편으로 그가 많은 분야에서 뛰어나긴 했지만 어떤 한 분야에서도 항상 동시대이늬 1인자가 되지 못하고 2인자였기 때문에 그를 '베타'라고 불렀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에 아폴로니우스(페르가의 아폴로니우스와 동명이인)라는 학자가 '엡실론'(Epsilon)으로 불렸다는 것을 보면 이는 다소 신빙성이 없는 주장처럼 보인다. 그래서 역사학자 제임스 고우(James Gow)는 아마도 베타와 엡실론은 단순히 그리스 숫자(2와5)로부터 유래된 것으로서 그 숫자는 그들 두 사람과 관계된 대학의 사무실이나 강의실 번호일 것이라고 주장 하였다. 한편 헤라에스티오(Ptolemy Hephaestis)는 아폴로니우스가 주로 달을 연구했는데 문제 ε 이 달을 상징하므로 그는 엡실론으로 불렀을 것이라고 주정하기도 했다. 에라토스테네스는 산술분야에서 n보다 작은 모든 소수를 발견하는 다음 방법을 생각해냈는데 흔히 이를 '체'라고 부른다. 우선 3부터 시작하여 n보다 작은 홀수를 다 쓴다. 그런 다음 3으로 부터 매 세 번ㅉㅒ 수를 모두 지우고 다시 5로부터 매 다섯 번째 수를 모두 지우고 다시 7로부터 매 일곱 번째 수를 모두 지우고 또 11로 부터 매 열한 번째 수를 모두 지우고 이런 식으로 계속해 간다. 이 때 어떤 수는 두 번 이상 지워지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남는 수에 2를 첨가하면 n보다 작은 모든 소수를 얻게 된다. |
에르미트(Charles Hermite :1822-1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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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학과 해석학 모두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유능한 프랑스 수학자 에르미트(Charles Hermite)는 캐일리와 실베스터의 연구의 대부분을 계승하고 확장시켰다. 에르미트는 1822년 로렌의 디오제에서 태어나고, 처음에는 루이-르-그랑 중·고등학교에서, 후에는 잠시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공부하는 등 일정하지 않은 교육을 받은 후, 1848년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입학시험관이며 퀴즈 선생이 되었다. 그는 에콜 폴리테크니크 및 소르본에서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1897년 정년 때까지 소르본에 있었다. 그는 1901년 파리에서 죽었다.
에르메트의 업적 중 가장 관심을 끌었던 두 가지 근본적인 수학적 결과는 1858년에 타원함수를 써서 구한 일반적인 5차방정식의 해법과 1873년에 보인 e가 초월수가는 증명이다. 에르미트는 오른쪽 다리가 불구인 채 태어나서 평생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절름발이였다. 이 결함으로 인하여 덕을 본 것은 어떤 형태의 군복부도 면제되었다는 것이고, 손해 본 것은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1년 지난후 그 학교를 졸업한 학생이 제공 받을 수 있는 어떤 직장에도 맞지 않는다는 학교 당국의 주장으로 더 이상의 공부를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불구이고, 일찍이 적당한 직장을 얻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사랑하도록 만든 매우 쾌활한 성품을 지녔다. 수많은 수학자들이 열심히 노력하는 후배에게 커다란 관용을 베풀어 왔는데, 에르미트는 의심할 바 없이 전 수학사를 통틀어 이런 유의 가장 훌륭한 인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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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독소스(Eudoxos of Cnidos :BC408?-BC3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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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수학자· 천문학자. 피타고라스파의 아르키타스와 플라톤에게 배우고, 이집트에서 천문학을 연구하였다. 입방체배적문제에서 무리량을 다루고, 부분구적법에 의하여 물체· 구(球)의 체적을 구하였다. 천동설의 입장에서 26개의 동심천구(同心天球)로 행성의 운동을 설명하고, 1태양년을 365일 6시간으로 계산하였다. |
오렘(Nicole Oresme :1323-13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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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렘은 1323년경에 노르망디에 태어나서 수학 교수직을 맡다가 주교직을 수행한 뒤인 1382년에 죽었다. 오렘은 그의 논문 중 한 곳에서, 작은 변화만이 허락된 독립변수에 대응하는 종속변수를 그래프로 나타냄으로써 어떤 법칙들을 제시했을 때, 해석 기하학의 또 다른 면을 예감했다. 해석 기하학의 발견자로서 오렘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의 논문들에서 직선에 대한 방정식의 최초의 명확한 도입과 이차원 공간에서 삼차원으로 그리고 사차원 공간으로 확장하는 것에 대한 일분 개념들의 최초의 도입과 같은 그이 업적을 꼽는다. 오렘의 논문이 씌어진 뒤 한 세기가 지나서, 여러 번의 재 인쇄가 행해졌고 이와 같은 방법에 의해서 그 뒤의 수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
오일러(Leonhard Euler :1707-19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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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러는 1707년 스위스의 바젤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신학 분야로 발을 디뎠지만 진짜 적성은 수학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수학에 흥미를 가졌던 칼뱅교의 목사인 아버지는 그에게 수학의 기초를 가르쳐 주었다. 아버지는 야곱 베르누이 밑에서 수학을 공부했었지에 아들은 요한 베르 누이 밑에서 공부하기로 정해졌다. 오일러가 겨우 20세 때인 1727년 표트르 대체가 설립한 성페테르부르크 학술원에 관계 하고 있던 두 친구 다니엘과 니콜라스 베르누이가 러시아 학술원에 오일러를 위한 자리를 확보했다. 오일러는 다니엘이 바젤의 수학 교수직을 얻은 후 곧바로 러시아를 떠나서 학술원의 수학주임이 되었다.
성 페테르부르크 학술원에서 14년 동안의 화려한 활동을 한 후 오일러는 베를린으로 와서 프로이센 학술원을 이끌어 달라는 프레디릭 황제의 초청을 수락하였다. 오일러는 프로이센 학술 원에서 25년 동안 있었으나 순진한 성격 때문에 프레더릭 대제에게 더 충성하려는 자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해 오랫동안 사소한 오해 등을 받았다. 오일러를 매운 존경한 러시아인들은 그가 프로이센 으로 떠난 후까지도 약간의 월급을 계속 지급하였다. 프레더릭 황제의 진영의 냉대와는 대조적으로 러시아인들의 그에 대한 온정으로 오일러 는 1766년 성 페테르부르크 학술원으로 돌아오라는 캐서린 황제의 초청을 받아들였다. 거기에서 그는 나머지 17년의 생애를 보낸 후 1783년 7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오일러는 실로 수학사의 역사상 가장 많은 저술을 하였는데 그 결과 수학의 각 분야에 그의 이름이 붙어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성페테르부르크 학술원으로 돌아온 직후 불행하게도 완전히 눈이 멀게 되었지만 그의 놀랄 만한 저술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흥미러롭다. 그는 이미 1735년부터 오른쪽 눈을 실명했기 때문에 왜 그의 초상화가 그런 포즈로 그려졌는지 설명해 준다. 눈이 먼것은 수학자에게 극복할 수 없는 장애인 것처럼 생각되지만 베토벤이 이 청각을 잃은 것처럼 오일러가 시각을 잃은 것도 그의 굉장한 창작 활동을 결코 해치지는 못했다. 그는 큰 장애 속에서도 비상한 기억려과 집중력으로 비서가 받아 쓸 수 있도록 구술하고 큰 석판에 불필로 공식을 써서 창작 활동을 계속했다. 오일러는 생애 동안 530편의 책과 논문을 발간했고 죽을 때 사후 47년 동안 성 페테르부르크 학술원의 회보를 보강하기에 충분한 원고를 남겼다. 886점의 책과 논문 등을 담고 있는 오일러의 저작을 총망라한 기념집을 1909년 스위스 자연과학회에서 만들기 시작했는데, 시절판 73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으로 계획되었다. 그의 소논문 중의 하나에는 다면체의 꼭지점의 개수 v, 변의 개수e, 면의 개수 f사이의 관계식
v-e+f=2
가 나온다. 또 다른 논문에서는 원형곡선(orbiform curves), 즉 원과 같이 일정한 폭을 가지는 볼록 타원 모양의 곡선을 고찰했다. 그는 (쾨니히스베르크의 일곱 개의 다리에서 영감을 얻은) 한붓그리기의 문제, 체스판 위의 요각의 나이트 길 그리고 그리스-라틴 사각형 등의 수학적 오락에 관한 여러 편의 논문을 썼다. 물리학자이며 천문학자인 아라고(Francois Arago, 1786-1853)가 "오일러는, 거의 은유법 을 쓰지 않고 과장도 없이, 말하자면 해석학의 화신이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오일러는 사람이 숨을 쉬듯, 독수리가 공중에 떠 있듯이 어떤 외견상의 노력 없이 계산했다."고 칭찮란 것 등, 열렬한 찬사가 오릴러에게 쏟아졌다. 오일러는 13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의 큰아들 요한 알브레히트 오일러(Johann Albrecht Euler, 1734-1800)는 물리학 분야에서 약간의 명성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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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트레드(William Oughtred :1574-16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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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트레드는 저술을 통하여 150여 가지 수학 기호들을 제시하고, 또 그것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들 중 세 가지만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데, 그것을 곱셈기호[X]와 비에서 자주 사용되는 4점[::] 그리고 두 수 사이의 차를 나타내는 데 자주 사용되는 기호 [~]이다. 그러나 가위표는 곱셈기호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라이프니츠가 제기했듯이 그것은 알파벳의 X와 너무 비슷하기 때문이다. 해리엇은 곱셈기호로 점 [·]을 때때로 사용했지만 라이프니츠가 이 기호를 채댁하기 전까지는 별로 사용되지 않았다. 라이프니츠는 또한 곱셈기호로 모자모양 기호[∩]를 사용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집합론에서 교집합을 나타낸다. 나눗셈기호[÷]도 역시 1659년에 스위스의 란(Johann Heinrich Rahn, 1622-1672)에 의해 쓰여진 대수책에 인쇄되어 처므ㅇ로 나타나면서 17세기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몇 년 후 이 책이 번역되면서 기호가 알려지게 되었다. 이 나눗셈 기호는 유럽대륙에서는 뺄셈을 나타내는 것으로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기하학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닮음기호(~), 함동기호(=)는 라이프니츠가 만들었다. 오트레드는 단순 계산자를 일찍이 1622년경에 만들었으나 1632년에야 비로소 책으로 발간 하였다. 1618년에 라이트에 의하여 발간된 네이피어의 <데스크립티오, Descriptio>의 영국판에 달린 주목할 만한 작자 미상의 16페이지 짜리 부록의 저자는 오트레드일 것으로 여겨지는데, 거기에서 곱셈기호로 가위표가 처음 사용되고 로그값을 계산하는 기를 사용하는 방법이 처음으로 제안되었으며 최초의 자연로그표가 나타났다. 오트레드는 또한 계량학(gauging:통의 용량을 계산하는 과학)에 관한 저술을 하였으며 수학적 오락에 관한 프랑스 책을 번역하여 편집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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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베르누이(Johann Bernoulli :1667-17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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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베르누이는 그의 형 야곱보다도 더 수학에 풍부한 기여를 한 사람이다. 그는 비록 질투심이 많고 심술궂은 사람이기는 했지만 그 시대에서 가장 성공한 선생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미적분학을 많이 보충하였고 유럽 대륙에서 이 새 분야의 유용성을 인정하게 만드는 데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로피탈(de PHospital, 1661-17040) 후작이 요한의 면밀한 재정적 동의 아래 1696년 최초의 미적분학 교재를 만든 것 은 바로 그의 자료였다. 잘 알려진 0/0꼴의 부정형의 계산법이 후에 미적분학 책에서 로피탈의 정리(PHospiral's rule)로 잘못 알려지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였다. 요한 베르누이는 니콜라스(1695-1726), 다니엘(1700-1782)과 요한 2세(1710-1790)의 세 아들을 두었는데 무두 18세기 수학자와 과학자로서 명성을 떨쳤다. 수학분야에 전도가 유망했던 니콜라스는 성 페테르부르크 학술원에 초빙되었는데, 불행하게도 겨우 8개월 후에 그 곳에서 익사하였다. 그는 곡선, 미분방정식, 확률론에 관한 논문을 썼다. 그가 성 페테르부르크에서 제안한 확률론의 한문제가 후에 페테프부르크 역설(Petersburg paradox)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문제는 다음과 같다. "A는 동전을 던졌을 때 첫번째에 앞면이 나오지 않으면 1페니, 두 번째가지 앞면이 나오지 않으면 2페니, 세 번째까지 앞면이 나오지 않으면 4페니 이렇게 계속하여 받기로 하였을 때 A의 기대값은 얼마인가?" 수학적 이론에 의하면 A의 기대값은 무한대인데, 이것은 역설적인 결과이다. 그 문제는 성 페테르부르크의 니콜라스 자리를 계승한 동생 다니엘이 연구하였다. 다니엘은 7년 후 바젤로 돌아왔다. 그는 요한의 세 아들 중 가장 유명하였고 온 정열을 확률론, 천문학, 물리학 및 유체역학에 쏟았다. 확률론에서 개연적 기대값(moral expectation)의 개념을 고안 하였고 1738년에 쓴 <유체역학, Hydrodynamica>에는 현재의 초급 물리학 책에 나오는 그의 이름이 붙은 유체역학의 원리가 들어 있다. 세 아들중 막내인 요한 2세는 법률 공부를 하였으니 인생 후반기를 바젤대학교의 수학 교수로서 보냈다. 그는 특히 열과 빛의 수학적 이론에 관심이 많았다. |
월리스(John Wallis :1616-17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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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6년 태어난 월리스는 그 시대의 가장 유능하고 독창적인 수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여러 분야에 걸쳐 다작의 명석한 필자였고 농아자를 가르치기 위한 제도를 처음으로 고안한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전해진다. 그는 오트레드의 제자였고 1649년에 옥스퍼드에서 기하학의 새빌리아 교수로 임명되었는데 1703년 타계할 때까지 54년 동안 봉직했다. 해석학에의 연구는 위대한 동시대인인 뉴턴의 연구를 준비하는 데 크나큰 공헌을 했다. 월리스는 원추곡선을 원뿔의 단면으로서보다는 2차곡선으로서 검토한 최초의 인물이다.
1656년 오트레드에게 헌정한 <무한의 수론, Arithmetica infinitorum>이라는 책이 발간되었는데 이 책은 약간의 논리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동안 훌륭한 논문으로 남아 있었다. 그의 <대수논문 역사와 실제, De algebra tractatus; historicus & practicus>는 1673년에 쓰여지고 1685년에 영어판으로, 1693년에 라틴어로 출간되었는데, 이 책은 영국에서의 수학사에 대한 최초의 진지한 시도로 평가된다. 바로 이 책에서 우리는 실 이차방정식의 복소근의 그래프적 해석을 주기 위한 최초의 노력을 발견한다. 월리스는 수많은 그리스 수학자의 책을 발간했으며 물리학의 다양한 분야에 관한 글을 썼다. 그는 영국학술원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이었고 수년 동안 암호 해독자로 정부를 위해 일하기도 했다. 미적분학의 발전에 대한 월리스의 주요 공헌이 적분론에 있는 반면에 배로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미분론에 관련된 것이다. 배로는 1630년 런던에서 태어났다. 풍문에 의하면 그는 국민학생 시절에 너무 말썽꾸러기여서, 아버지가 만약 하느님이 자기 자식 중의 하나를 데려가신다면 기꺼이 배로를 내놓겠노라고까지 기도했다고 한다. |
유클리드(Euclid :BC450-BC3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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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클리드(Euclid)의 생애와 인격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는데, 다만 확실한 것은 알렉산드리아 대학의 수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또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수학학교의 설립자였다는 사실이다. 유클리드의 이 알렉산드리아 수학학교는 상당히 오랫동안 존속되었다. 비록 그가 태어난 시기와 장소는 분명하지 않아도 아마도 아데네의 플라톤 학교에서 수학을 배운 것처럼 보인다. 파푸스(Pappus)는 유클리드와 아폴로니우스(Apolonius)를 비교하면서 아폴로니우스를 혹평한 반면에 유클리드 매우 겸손하다고 추겨세우며 그 밖의 여러 가지 면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프로클로스의 <에우데무스 요약>에는 다음과 같은 일호가 실려있다. 한번은 톨레미가 유클리드에게 기하학을 터득하기 위한 지름 길이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지 유클리드는「기하학에는 왕도가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 말은 알렉산더 대왕의 개인교수였던 메나에크무스가 했다는 얘기도 있다. 유클리드가 기하학을 배우던 한 학생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이런 것을 배워서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그러자 유클리드는 즉시 하인을 불러서 일렀다. 「그에게 동전 한 닢을 주어라 그는 자기가 배운 것으로 부터 무엇을 얻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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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수학자. 경력은 확실하지 않으나 한대(漢代)에 완성된 《구장산술(九章算術)》에 주석을 가하였으며, 《해도산경(海島算經)》을 저작하였다. 《구장산술주(九章算術註)》는 단순한 주석서에 그치지 않고 수학자로서의 진가를 발휘한 귀중한 자료서였다. 그는 여기서 원주율(圓周率)을 산출함에 있어 무한등비급수의 극한치를 구하는 방법과 유사한 추리방법을 적용하여 근사치를 구하는 데 성공하였다. 또 여러 가지 모양[形]의 부피를 구하는 데도 뛰어난 기하학적 직관과 극한을 구하는 방법을 이용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
이순지(Lee Soon Ji :1406-14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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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세종 때 과학 기술이 크게 발달했다. 세종은 과학의 기초로 수학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당시수학 교과서는 <산학계몽>으로 지금 고등학교 1학년 수준의 것으로 어려운 편이었다. 세종은 <양휘산법>을 나라에서 인쇄하게 했는데 세종이 얼마나 수학 애호가였나 하면 세종15년에 경상도의 감사가 <양휘산법> 100권을 인쇄해서 세종대왕께 바쳤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지방 관리가 임금에게 바치는 선물이 금은 등의 재물이 아니고 수학책이었다는 것으로 보아서 세종의 수학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었을 것이다.
세종 때는 천문학도 크게 발전했다. 세종 때 가장 대표적인 천문학자가 이순지였다. 이순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1406년에 태어나 1465년까지 살았다고 알려져있다. 그의 집안은 아버지가 공조와 호조 참의를 지냈고 원주 목사와 강원도 관찰사 등을 거친 양반 집안이었다. 당시 천문학자나 산학자는 대부분 중인이었으나 이순지는 당대 명문 집안 출신이었다. 그는 1427년 과거에 급제하여 처음에는 외교 문서를 담당하는 승문원에서 근무했다. 그 뒤 세종이 1432년 경복궁 경회루 연못 북쪽에 높이 8m나 되는 '간의대'라는 천문관측대를 세웠다. 간의대는 매일밤 5명의 천문관이 천문을 관찰했는데 이순지는 이 관측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 이전부터 천문 역산에 관심이 있었던 이순지는 이때부터 천문학에 더욱 심혈을 기울였다. 세종은 그가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에 있을수 없게 되자 믿을만한 관측자를 놓칠까 봐 근심하기도 하였다. 이순지는 어머니가 죽자 당시 관습대로 3년 동안 관직을 떠나려 했다. 이순지의 어머니에 대한 효성은 유별난 것이었다. 5살까지 이순지는 아주 병약했다. 어머니의 극진한 보살핌이 없었더라면 제대로 자라지도 못했을 거라고 뒷날 스스로 회고했다. 그러나 세종은 이순지만한 천문 관측자는 없다고 생각할 만큼 그를 철저히 믿었다. 그래서 세종은 그가 관직을 떠난 지 1년만에 그를 억지로 다시 불러들였다. 3년상을 치르지 않고 관직에 있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세종실록>에 보면 이순지가 서울의 위도를 정확히 계산한 것으로 보이는 기록이 있다. 1430년대의 어느 날 이순지는 서울의 '북극출지'가 38도 남짓이라고 계산했다. 처음에 세종은 그의 계산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중국에서 온 천문학 책에서 그 값을 확인하면서 이순지를 크게 신임하게 되었다. 이순지는 <칠정산> <제가역상집> <천문유초> 등 천문학에 관한 책들을 만드는 데 힘썼다. 그 중에서도 <칠정산>의 완성은 큰 업적이었다. '칠정산'이란 '칠정'의 계산 방법을 가리키는 것이다. 칠정이란 일곱 개의 움직이는 별 즉 해, 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을 말한다. <칠정산>은 바로 해와 달, 그리고 행성의 운동을 계산하는 기술을 완성해 놓은 것이었습니다. 세종은 중국의 천문 역법을 우리 실정에 맞게 고쳐 보려고 했다. 그때는 중국의 천문법을 대부분 사용했다. 중국의 모든 천문 역법을 정리하여 우리 실정에 맞게 수정한 것이 <칠정산 내편>이었다. 또 <칠정산 외편>은 아라비아의 천문 계산법을 우리 실정에 맞게 고쳐 놓은 것이다. 이순지는 특히 <칠정산 외편>의 완성자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칠정산> 내편과 외편 모두에 중요한 몫을 했다. 이렇게 <칠정산>이 완성되어 조선의 천문 역법은 완전히 정비되었다. 또한 우리 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서울을 표준으로 한 역법 체계를 갖추게 되었고, 천체 운동의 계산을 정확히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1445년(세종 27년)에 <제가역상집>이라는 책을 완성했다. 이 책은 주로 천문, 역법, 의상 구루의 4부에 걸쳐 당시의 지식을 정리해 놓은 것이다. 의상이란 천문 기구를 말하고 구루란 해시계와 물시계를 말한다. 세종 때 수많은 천문기구와 해시계, 물시계가 만들어진 것은 바로 이런 연구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자연 과학의 연구에는 수학이 중요한 몫을 차지했다. 이순지는 수학에도 전문가였다. 그래서 토지 측량사업에도 많은 공을 세웠다. 세조 11년(1465년)에 그가 세상을 떠나자 나라에서는 정평군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
제논(Zenon of Elea :BC495?~BC4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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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양을 무한히 쪼갤 수 있거나 또는 그것이 매우 많은 개수의 쪼갤 수 없는 극소량들의 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할 수 있을까? 첫번째 가정은 그냥 받아들일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떤 것을 발견하는데 두 번째 가정을 이용할 때는 자칫 어떤 불합리성을 놓칠 가능성이 있다. 고대 그리스의 수학 학교들이 위의 두 가정을 이용하는 것을 발달시켰다는 증거가 있다. 두 가정 모두가 직면하는 약간의 논리적 문제점이 기원전 5세기경에 엘레아 학파의 철학자 제논이 만든 네 개의 역설에 의하여 충격적으로 제기되었다. 수학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이 역설을 어떤 양을 무한히 쪼갤 수 있다고 가정하든지 또는 많은 개수의 극소량들의 합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고 가정하든지 간에 운동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 역설의 본질을 다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이분법(The Diconotomy):만일 직선을 무한히 쪼갤 수 있다면 운동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직선을 통과하려면 우선 중점을 지나야만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사분점을 지나야 하고 또 그러기 위해서 팔분점을 지나야만 하는 등 무한히 많은 점을 지나야 한다. 따라서 운동은 시작조차 할 수 없다. 화살(The Arrow):만약 시간이 더 이상 쪼개질수 없는 아주 짧은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 다면 움직이는 화살은 항상 정지해 있다. 왜냐하면 매 순간마다 그 화살은 한 고정된 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각 순간에서 이 명제가 참이므로 화살은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 그 후 제논의 역설에 대한 많은 해설이 주어졌는데 그들 대부분의 각 양이 극히 작다 하더라도 양의 무한개의 합은 무한히 크고 (그림생략), 그 크기가 0인 양의 유한 또는 무한개의 합은 0이라는 (nx0=0, ∞x0=0) 통상적인 직관적 믿음에 도전한 것이었다. 그 역설을 만든 동기가 무엇이었든 간에 그것들의 영향으로 무한소가 그리스 논증기하학에서 배제되었다. |
조르당(Jordan, Marie Ennemond Camille :1838-19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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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수학자. 리옹 출생.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공부한 후 모교를 거쳐 1883년 이후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가 되었다. 19세기에 접어든 후부터 서서히 진보해온 군론(群論)을 수학의 넓은 분야에 전개, 진일보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유한차원(有限次元)의 선형군(線型群)의 수에 관한 ‘조르당의 정리(定理)’는 고차원의 정다면체론과 결부되어 고차원공간(高次元空間) 안에서의 이산유한군(離散有限群)의 고찰로 발전하였으며, 또한 대수함수를 해답으로 가지는 선형 미분방정식의 이론과 리만면(面)의 이론에 도입되었다. 저서 《치환론(置換論)과 대수방정식론(代數方程式論)》(1870)은 유한군론을 수론(數論)·함수론·대수기하학에 응용한 성과의 집대성으로서 알려졌으며, 《해석학교정(解析學敎程)》(3권, 82∼87)은 19세기 후반 당시 프랑스의 종합적 교과서의 대표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F.클라인과 M.S.리 등을 지도하였다. |
일제 시대 때 이야기이다. 종로 종각 근처 길거리에서는 저녁때가 되면 항상 수학 수업이 시작되나. 한 수학 선생님이 나와서 칠판에 수식을 써 가면서 거리의 사람들에게 열심히 강의를 하고 있다. 종로 네거리를 오가던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가 하고 기웃거리다가 자리를 잡고 앉는 사람도 생긴다. 오늘은 분수셈을 공부하는가 보다. 수학 선생님은 "콩 두 되반과 좁쌀 한되 반을 더하면 얼마입니까?" 하고 묻는다. 사람들은 금방 당연하다는 듯이 "세 되요." 하고 대답한다. 선생님의 제자들은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어린 소년, 떠꺼머리 총각, 곰방대를 문 할아버지, 행주치마를 두른 아주머니 등 다양하다. 선생님은 이제 콩과 좁쌀의 덧셈을 칠판에 써 가면서 설명한다. 선생님이 칠판에 판서하는 모습은 감탄할 만했다. 양손에 분필을 들고 칠판에 수식을 오른손으로 썼다 왼손으로 썼다 한다. 글씨가 오른손으로 쓰나 왼손으로 쓰나 한결같이 반 듯하다.
'거리의 수학 선생님'이 바로 해방 후 서울대학교에 수학과를 창설하신 최규동 선생님이다. 최규동선생님이 수학의 거두라 하여 붙여진 별명이 바로 최대수이다. 대수학의 대수를 따서 붙은 별칭이다. 최규동 선생님은 바로 민중 교육자라 하겠다. 그 당시에는 신식 교육이 보급되긴 했어도 여전히 읽지도 쓰지도 못할 뿐 아니라 셈도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수학은 특수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만 보급이 되었다. 백성들은 여전히 수학에는 무관심했고 수학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최규동 선생님은 수학은 일반 백성들의 생화과 연관지어 설명하면 쉽게 다가갈 수 있다고 믿고 종로 네거리에서 이렇게 수학 수업을 하게 된 것이다. 종로 네거리를 오가던 사람들이 기웃거리다가 마침내 어떤 사람은 매일 그 시간에 맞춰나오게 되고, 열심히 거리에서 수학 공부를 하게 되었다. 최규동 선생님은 경북 성주의 유교 집안에서 출생하여 한학을 공부했다. 그러다 개화기를 맞아 서울에 가서 근대학문으로 수학을 공부했다. 그때는 대부분 독학으로 공부했는데 선생님도 스무 살이 못 되어 수학 교사가 되었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 중동 고등 보통하교에서 수학을 가르쳤는데 인품도 훌륭해서 많은 제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일제로부터 해방되자 선생님은 서울대학교에 수학과를 창설하고 교수가 되었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수학 전문과정은 연희전문학교의 수물과(1917년 설치)가 유일한 것이었다 |
카르노(Lazare Carnot :1753-18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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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노(Lazare Niclas Marquerite Carnot)는 많은 프랑스 부유층의 자식들처럼 군인이 되려고 준비하여 메지엑 병학교에 들어가 몽주 밑에서 공부하다가 1783년 공병대 대위가 되었다. 1784년 그는 완전하지 않는 탄력성을 가진 물체가 충돌하면 운동에너지는 소멸한다는 것을 최초로 증명한, 역학에 관한 첫번째 수학 논문을 썼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그는 스스로 정계에 들어가서 혁명을 열렬히 환영했다. 그는 수많은 중요한 정치적인 직책을 지냈고, 1793년에는 유럽 연합군이 수십만 대군으로 프랑스를 침입했을 때 불가능하게 보였던 14군단을 편성하여 성공적으로 적군에 대항해서 '승리의 조직자(tie Organizer of Victory)라는 명칭을 얻었다. 1796년에는 나폴레옹의 쿠데타에 반항하여 제네바로 망명했는데 거기에서 미적분학의 형이상학에 관한 반 철학적인 논문을 썼다. 기하학에의 중요한 두 업적, <위치기하학, Geomerrie de transversals>은 각각 1803년과 1806년에 발표되었다. 화해할 수 없는 왕들의 적으로서 그는 러시아 출정 후인 1814년에 프랑스 제국이 아닌 프랑스를 위하여 싸울 것을 제안했다. 왕정이 복고되자, 그는 추방당하여 궁핍한 생활을 하다가 1823년 마그데부르크에서 죽었다. |
카르다노(Girolamod Cardano :1501-15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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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다노는 수학사에서 가장 기묘한 성격의 인물이다. 그는 1501년에 파비아(Pavia)에서 변호사의 사생아로 태어나서 열정적인 이중성격의 소유자로 성장하였다. 그는 의사로서 파란만장한 직업활동을 시작하여 개업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수학을 공부하고 가르치고 저술까지 하였다. 그는 스코틀랜드까지 여행을 하였으며 이탈리아로 돌아온 후에는 계속적으로 파비아와 볼로냐에 있는 대학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그는 또 예수의 생애에 대한 별점을 발표하여 이교도로 물리는 바람에 감옥살이도 하였다. 그는 볼로냐 대학에서 물러난 후 로마로 옮겨와서 뛰어난 점성가가 되었으며 교황청의 점성가로서 연금도 받았다. 그는 1576년에 로마에서 자살하였는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자신이 별점으로 예언한 자신의 죽음의 날을 맞이하여 그렇게 했다고 한다. 그의 성격이 대단히 고약했다는 많은 얘기가 있는데, 한번은 일시적으로 흥분하여 자기의 어린아들의 두 귀를 잘라버렸다고도 한다. 그러나 어떤 얘기들은 그의 적들이 과장시킨 것도 있을 것이고 또 중상모략을 받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물론 그의 자선전이 이러한 관점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아무튼 당시의 가장 뛰어나고 다재다능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있던 카르다노는 산술, 천문학, 물리학, 의학 등 여러 분양에서 많은 저작을 남겼다. 그의 가장 위대한 저작은 <위대한 술법>으로서 이 책은 완전히 대수에 관한 최초의 라틴어 논문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내용은 방정식의 음근을 다루고 있다는 것과 허수와 관련된 계산에 약간 관심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임의의 차수의 방정식의 근의 근사값을 구하는 미완성된 방법도 실려 있다. 그 책을 보면 그가 "데카르트의 부호규칙"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도 있다. 상습 도박꾼이었던 그는 확률에 관한 몇 가지 흥미로운 문제를 다룬 도박사의 안내서도 썼다 |
카발리에리(Bonaventura Cavalieri :1598-16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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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발리에리는 1598년 밀라노에서 태어나 15세에 (흔히 잘못 표현되듯이 예수회 수사(Jesuit)가 아니고) 수도회의 수도사(Jesuat)가 되었고 갈릴레오 아래서 공부하였으며 1629년부터 1647년 49세의 일기로 생을 마칠 때까지 볼로냐 대학교에서 수학교수로 봉직하였다. 그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가장 영향력있는 수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수학, 광학, 천문학 분야에 관한 많은 논문들을 썼다. 그는 이탈리아에 로그를 소개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수학에 대한 최대의 공헌은 1635년에 미적분법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불가분량법(method of indivisibles)을 소개한 논문<불가분량의 기하학, Geometria indivisibilibus>이었다. 방법을 데모크리토스(기원전 410년경)와 아르키메데스(기원전 287-212년경)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도 있겠지만 카발리에리에게 직접 영향을 준 면적과 체적을 구하기 위한 케플러의 시도였음이 거의 확실하다. |
칸토어(Georg Ferdinand Ludwig Philip Cantor :1845-19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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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토어는 1845년 러시아의 성 페테르부르크에서 덴마크인 부모 밑에서 태어나서 1856년에 부모와 함께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로 이주하였다. 아버지는 신교로 개종한 유태인이었고, 어머니는 태어날 때부터 카톨릭 신자였다. 그 아들은 중세신학, 연속성과 무한에 관한 복잡한 논쟁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 결과, 그는 공업 기술사가 되라는 아버지의 제안을 철학, 물리, 수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포기하고 취리히, 괴팅겐, 베를린(이 곳에서 바이어슈트라스의 영향을 받았고, 1867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교에서 공부하다가 1869년부터 1905년까지 할레 대학에서 오랫동안 강의하다가 1918년 할레에 있는 정신병원에서 죽었다.
칸토어의 초기 관심사는 정수론, 부정방정식, 삼각급수에 있었다. 그는 삼각급수의 미묘한 이론에서 영감을 얻어 해석학의 기초로 눈을 돌렸던 것 같다. 그는 수렴하는 유리수 수열을 활용하고, 데데킨트의 기하학적인 견해를 반영한 취급법과는 다른 무리수의 아름다운 취급법을 만들어 내고, 1874년에 집합론과 무한이론에 관한 혁명적인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 후자의 연구로, 칸토어는 수학 연구의 완전히 새로운 분야를 창조하였다. 그는 논문에서 실제적인 무한의 수학적 취급에 기초를 두어 초한수이론을 발전시키고, 유한수들의 계산법과 유사하게 초한수의 계산법을 만들었다. 칸토어는 종교에 깊이 빠져 있었고 어떤 의미에서 제논의 역설과 관련된 논쟁의 연장인 그의 논문은 무한의 실체에 관한 중세 학자의 고찰에 대한 그의 동정적인 경의를 반영하고 있다. 그의 견해는 상당한 반대에 부딪쳤는데. 주로 베를린 대학교의 크로네커로부터였고 베를린 대학교의 교수직을 얻으려는 칸토어의 노력을 확고 부동하게 반대한 사람도 크로네커였다. 오늘날, 칸토어의 집합론은 거의 모든 수학 분야에 스며들었고, 위상과 실함수론의 기초에서 특히 중요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
케일리(Arthur Cayley :1821-18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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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일리는 1821년 서리 주의 리치몬드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하여 1842년 수학 졸업시험에서 수석으로서 졸업하고, 같은 해 보다 어려운 스미스 상의 수상자를 가리는 시험에서도 1등을 차지하였다. 여러 해 동안 변호사 일이 수학 연구에 방해되지 않도록 항상 조심하면서 법률 공부를 하고 변호사 일을 하였다. 법률 공부를 하는 동안에 더블린으로 가서 해밀턴의 사원수 상의를 수강하였다. 1863년에 케임브리지에 새들러 교수직이 설치되었을 때 그 직을 요청받고 수학하였으며, 법률가로서의 화려한 미래를 포기하고 수수한 학문적 생을 택하였다. 그 결과 모든 시간을 수학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캐일리는 수학의 역사상 오일러와 코시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양의 수학적 저술을 남겼다. 그는 케임브리지 학부 재학시절부터 저술을 시작하였고, 변호사 일을 하는 동안 200내지 300편의 논문을 썼고 나머지 생애 동안 많은 양의 저술을 계속하였다.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아마도 불변식론을 만들고 발전시킨 일일 것이다. 캐일리의 논문이 엄격하고, 직접적이고 조직적이고 명확한 것을 보면, 변호사 경력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비상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한 번 보거나 읽은 것은 무엇이든지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또한 대단히 침착하고 점잖은 기질을 지녔다. 그는 '수학자 중의 수학자'로 불려지고 있다. 캐일리의 보통 이상으로 소설을 탐독하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그는 여행중이니 회의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동안과 이따금씩 짬이 날 때 소설을 읽었다. 그는 일생 동안 영어로 쓰여진 것 뿐만 아니라 그리스어, 프랑스어, 독일어와 이탈리아어로 된 소설까지 수천 권의 소설을 읽었다. 그는 그림 그리기(특히 수채화)를 즐겨했으며, 수채화가로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 주었다. 그는 또한 식물학과 일반적인 자연에 대하여 열심히 공부하였다. 캐일리는 순수한 영국 전통의 아마추어 등산가여서 오래걷기와 등산을 하러 대륙으로 자주 여행하였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등산하는 이유를 매우 힘들고 지치지만 정상을 정복했을 때는 어려운 수학문제를 풀거나 복잡한 수학이론을 완성하였을 때에 맛본 매우 상쾌한 느낌을 받기 때문이고, 그러한 느낌은 등산에서 더 쉽게 맛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캐일리는 1895년에 죽었다. 그 직후 에르미트는 학회보에 기고한 글에서 "캐일리의 수학적 재능을 명료함과 해석적 형태의 지극한 우아함으로 특징 지을 수 있는데, 그것은 그가 코시와 견줄 만한 뛰어난 학자가 되게 한 비길 데 ㅇ벗는 능력으로 보강되었다."고 하였다. |
케플러(Johann Kepler :1571-16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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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플러는 1571년 슈투트가르트 근교에서 태어났고 원래 루터교의 목사가 되려고 튀빙겐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천문학에 깊은 관심을 가져 계획을 변경하게 되었으며 20대 초반인 1594년 오스트리아 그래츠 대학교의 강사로 임명되었다. 1599년에 케플러는 유명하나 싸우기 좋아하는 덴마크계 스웨덴 천문학자 브라헤(Tycho Brache)의 조수가 되었는데, 브라헤는 루돌프 2세 황제의 왕실 천문학자로 임명되어 프라하로 이주했다.
얼마 후인 1601년에 브라헤가 갑자기 죽어서 케플러는 그 스승의 지위와 행성 운동에 관한 방대하고 매우 정확한 천문학적인 자료들을 물려받았다. 그는 21년 동안 지칠 줄 모르는 열성과 끈기를 가지고 노력하여 성과 없는 시도를 수없이 하였고, 계산으로 많은 분량의 종이를 사용하였다. 마침내 1609년에 그는 행성운동의 처음 두 법칙을 만들어낼 수 있었고, 10년 후인 1619년에 세 번째 법칙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 행성운동의 법칙은 천문학과 수학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왜냐하면 뉴턴이 그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하던 중에 현대 천체역학을 창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세 가지 법칙은 다음과 같다.
Ⅰ. 행성은 태양을 한 초점으로 하는 타원궤도를 따라 태양의 둘레를 돈다. Ⅱ. 행성과 태양을 잇는 동경은 동일한 시간 동안 같은 면적을 그린다.
Ⅲ. 행성이 자신의 궤도를 완전히 한 바퀴 도는 시간의 제곱은 궤도의
반장축의 길이의 세제곱에 비례한다.
브라헤의 기록으로부터 이 법칙을 경험적으로 발견한 것은 과학에서 지금까지 만들어진 가장 괄목할 만한 귀납법 중의 하나이다. 케플러의 역작들은 종종 매우 신비스러운 공상과 과학적 진리에 대한 깊은 이해의 결합에 의한 산물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의 사생활이 세속적인 불행의 연속에 의해 거의 견딜 수 없도록 만들어졌던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그는 겨우 네 살 때 천연두에 걸려 시력을 대부분 잃었다. 전반적으로 병약한 일생을 보낸 데다가, 환희 없는 청년기를 보냈고 결혼은 끊임없는 불행의 근원이었다. 사랑하는 아들이 천연두로 죽었고, 아내는 미쳐서 죽었다. 도시가 카톨릭(교도들의) 수중으로 들어갔을 때 그래츠 대학교에서 교수직을 박탈당하였으며, 어머니는 마법을 쓴다고 고발, 투옥되어 거의 일 년 동안이나 어머니를 감옥으로부터 구해내려고 노력하였고, 자신은 가까스로 이단 선고를 피하였으며 봉급은 항상 체불되었다. 어떤 소문에 의하면, 그는 두 번째 결혼에서 아내를 잘못 선택하지 않으려고 11명의 처녀들의 장촵단점을 미리 주의깊게 검토 하였지만, 두 번째 결혼은 첫번째 보다 더 불행했었다고 한다. 그는 별점을 쳐주며 생계를 유지하였고, 1630년에 지불 기일을 넘긴 지 오래되는 약간의 봉급을 받으러 가는 도중에 열병으로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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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발레프스키(Sonja Kovalevsky :1850-18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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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소냐 코발레프스키(Senja Kovalevsky>로 알려진 소피아 코르빈 크루코프스키(Senja Korvin-Kovalevsky)는1850년 모스크바의 터시아 귀족 가문에서 티어났다. 그녀는 17세 때 성 페테르부르크에 가서 그 곳 해운학교 선생과 미적분학을 공부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러시아에서 대학교 진학이 금지되자, 부모의 해외유학 반대를 벗어나기 위하여 마음이 맞는 (후에 저명한 고생물학자가 된)불라디미르 코발레프스키와 이름뿐인 결혼을 했다. 1868년 견혼하여 그 이듬해 봄에 부부는 하이델베르크로 갔다. 하이델베르크에서 코발레프스키는 쾨니히스베르거(Konigsber-
ger)와 레이몽드(du Bois-Reymond, 1831-18890)의 수학강좌와 키프히코프(Kirchhoff, 1824-1887)와 헬름홀츠(Helmbolz, 1821-1894)의 물리학강좌을 수강했다. 쾨니히스베르거는 베를린 대학교의 바이어슈트라스의 초기 제자였고, 그의 선생에 대한 상세한 설명으로 코발레프스키는 그 위대한 선생 밑에서 공부하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1870년 베를린에 도착했으나 여학생은 배제한다는 대학교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래서 그녀는 직접 바이어슈트라스와 접촉하였고, 그는 쾨니히스베르거의 강력한 추천 때문에 개인학생으로 받아들였다. 코발레프스키는 곧 바이어슈트라스가 총애하는 학생이 되었고, 그는 그의 대학 강의를 그녀에게 반복하였다. 그녀는 바이어슈트라스의 칭찬을 받으며 4년 동안(1870-1874) 그의 밑에서 공부하여 대학 과정의 수학공부를 다 했을 뿐만 아니라 3편의 귀중한 논문도 썼는데, 한 편은 편미분방정식의 이론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한 편은 제3 종의 아벨적분의 축약에 관한 것이며 마지막 한 편은 새턴 환의 형태에 관한 라플리스의 연구를 보완하는 것이었다. 1874년에 소냐 코발레프스키는 피텅겐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편미분방정식에 관한 신사논문의 질이 매우 높아서 구두 시헙을 면제받았다. 1888년 38세의 나이로 <고정점을 중심으로 한 고체의 회전문제에 관하여, on the Problem of the Rotation of a Sohd Body about & Fixed Point>라는 논문으로 프랑스 학술원으로부터 유명한 보르딘 상을 수상하는 커다란 영광을 안았다. 제출된 15편의 논문 중에서 코발레프스키의 것이 넌연 최고로 판정되었으며, 너무 뛰어난 논문이어서 상금이 3000프랑에서 5000프랑으로 올랐다. 1884년부터 1891년 죽을 때까지 코발레프스키는 스톡홀름 대학교의 고등 수학 교수로 재직했다. 그녀의 좌우명은 "아는 것을 말하라, 만드시 해야 하는 것을 행하라, 가능성 있는 것을 성취하라."였다. |
코시(Augustin-Louis Cauchy :1789-18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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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시는 1789년 파리에서 태어나서, 초기의 교육은 아버지로부터 받았다. 후에 판테온의 에콜 상트랄(Ecole Centrale, 국립공업고등학교)에서는 고전 연구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1805녀에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입학하여 라그랑주와 라플라스의 칭찬을 독차지하였다. 2년 후 토목학교(Ecole des Ponts et Chaussees)에 입학하여 토목기사가 될 준비를 하였다. 라그랑주와 라플라스의 설득으로 토목공학을 포기하고 순수과학을 택하기로 결심하고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강사직을 수락하였다. 코시는 순수와 응용수학 모두에 광범위하고 깊이 있는 논문을 썼는데, 그의 저술의 양은 아마 오일러
다음으로 많을 것이다. 수집된 그의 논문은 여러 권의 책 외에 논문이 789편에 이르렀는데 일부는 매우 방대하여 사절판 책으로 24권 분량이나 되었다. 이 책은 내용의 질이 고르지 못하여 결과적으로 코시는 (가우스의 경우와는 정반대로) 과다한 발표와 경솔한 저작에 대하여 비판받아 오고 있다. 코시의 다작과 관련된 일화가 전해진다. 1835년 과학원은 학술지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코시가 너무 자주 이 학술지에 투고해서 과학원은 늘어나는 인쇄비에 놀라고, 마침내 모든 발표 논문은 4페이지를 넘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 법은 오늘날까지 지켜지고 있다. 그래서 코시는 일부 100페이지를 넘는 긴 논문을 실어줄 다른 간행물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코시는 무한급수의 수렴과 발산에 관한 연구, 실함수와 복소수 함수론, 미분방정식, 행렬식, 확률론, 수리물리 등에서 수학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미적분을 배우는 학생들은 양항 급수의 수렴 발산에서, 소위 코시의 근판정법과 코시의 비율판정법 그리고 주어진 두 급수의 코시 곱 등을 만나게 된다. 또한 복소함수론의 첫학기 강의에서 코시 부등식과 코시 적분공식, 코시의 적분 정리, 기초 코시-리만 미분방정식을 만나게 된다. 18세기 동안에는 일반적으로 적분은 미분의 역으로 취급된 반면, 코시는 정적분을,거의 오늘날 우리가 하는 것처럼, 무시할 만큼 작은 부분들의 무한히 증가하는 집합의 합의 극한으로 정의하고자 했다. 그러고 나서 적분과 역도함수 사이의 관계를 평균값 정리에 의하여 입증하였다. 코시는 1812년 84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논문으로 시작된 행렬식 이론에 대한 업적으로 이 분야에서 가장 기여를 많이 한 사람이 되었다. 코시가 다음의 중요하고 유용한 정리를 처음 증명한 것은 바로 1812년의 논문에서였다. 『만일 Α와Β가 모두 n X n행렬이면 ㅣABㅣ=ㅣAㅣㅣBㅣ이다.』 또한 방정식ⅠΑ-λIㅣ=0을 행렬A의 특성 방정식(characteristic equation)이라고 부름으로써 1840년에 '특성(characteristic)'이란 말을 행렬이론에 도입한 사람이 바로 코시였다. 코시는 논문을 엄밀하게 하려고 많은 주의를 기울였으며, 이 영향으로 다른 수학자들도 분별 없는 형식적인 조작과 직관적인 증명은 없애려고 시도하였다. 코시는 68세인 1857년 3월 23일에 갑자기 죽었다. 그는 쉬면서 기관지 병을 고치기 위하여 시골로 갔으나, 치명적인 발열에 의하여 쓰러졌다. 죽기 직전 파리의 아르키조(Archbishop)와 이야기 하고 있었는데 그가 아르키조에게 한 마지막 말은 "사람은 죽어도 그의 행적은 남는다."였다 |
코페르니쿠스(Nicolas Copernicus :1473-15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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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이 오랜 동안 수학의 발전에 기여해왔다. 사실 한때는 '수학자'하는 이름이 천문학자를 의미하기도 했다. 수학에 공헌한 천문학자 중에 가장 빼어난 인물은 폴란드의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였다. 그는 크라쿠프(Cracow)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고 파두아(Padua)와 볼로냐에서 법학, 의학, 천문학 등을 연구했다. 우주에 관한 그의 이론은 1530년에 완성되었지만 그가 죽은 1543년까지도 발표되지 못했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연구 결과는 삼각법의 개선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고 코페르니쿠스 자신도 삼각법에 관한 논문을 썼다. |
쿠머(Kummer, Ernst Eduard :1810-18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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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수학자. 폴란드의 조라우 출생. 어렸을 때 부모를 잃고, 빈곤 속에서 자랐다. 1828년 할레대학 신학부에 들어갔으나, 셰르크의 영향으로 수학으로 바꾸었다. 31년 대학을 졸업, 조라우의 중학교 교사가 되었다. 이어 리그니츠의 중학교로 옮겼는데, 여기서 L.크로네커를 가르쳤다. 42년 브레슬라우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55년 P.G.디리클레의 후임으로 베를린대학 교수, 베를린학사원(學士院) 회원이 되었다. 연구분야는 해석학·기하학·대수학·정수론(整數論) 및 응용수학 등 광범위한 것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정수론에서의 P.페르마의 문제에 관한 연구가 중요하며, 이 연구에서 ‘이상수(理想數:ideale Zahl)’를 도입하였다. 페르마의 문제는 부분적으로밖에 해결하지 못하였는데, 파리의 과학학사원(科學學士院)은 이 ‘이상수’를 높이 평가하여, 57년 아카데미상을 수여하였다. 이 이상수 개념은 후세의 수학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
클라인(Felix Klein :1849-19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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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인은 1872년 에를랑겐 대학교의 철학교수와 평의원에 임명되자, 관례에 따라 전공분야에 관한 취임강연을 했다. 자신과 리이(Sophus Lie,1842-1899)의 군론에 관한 연구에 기초를 둔 이 강연에서, 당시 존재하던 모든 기하학을 본질적으로 성문화하는 데 기여하였고, 기하학 연구의 새롭고 효과적인 대도에 이르는 방법을 지적한 '기하학'의 유명한 정의를 발표하였다. 이 강연과 여기서 주장하는 기하학 연구 계획은 에를랑겐 프로그램(Erlangen Programm)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것은 군론이 거의 모든 수학 영역에 파고 들고 약간의 수학자들이 모든 수학은 군론의 어떤 국면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을 때 옳다고 여겨졌다.
클라인(Felix Klein)은 1849년 뒤셀도르프에서 태어나서 본, 괴팅겐, 베를린 대학에서 공부하였으며, 본에서 플뤼커의 조교 생활을 하였다. 그는 에를랑겐 대학교(1872-1875)에서 처음으로 교수생활을 시작했는데 여기에서, 위에서 설명한 기하학 프로그램을 발표하는 취임강연을 했다. 그 후 그는 뮌헨, 라이프치히 대학교(1880-1886)에서 가르쳤고, 괴팅겐 대학교(1886-1913)에서 학과장을 역임했다. 그는 의 편집자였고 방대한 수학 백과사전 의 발간 발기인이었으며 명석한 설명자이고 생기를 불어넣는 선생이자 타고난 강사였다. 그는 1925년 괴팅겐에서 죽었다. 클라인이 괴팅겐 대학교 수학과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동안 그곳은 전 세계 수학도의 메카가 되었다. 놀랄 만한 많은 일류 수학자가 이 대학에서 공부하거나 가우스, 디리클레, 리만의 훌륭한 계승자로서 재직하여 수학학파를 현대의 가장 유명한 학파 중의 하나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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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로(Clairaut(Clairault), Alexis Claude :1713-17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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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로(Aiexis Claude Clairaur)는 1713년 파리에서 태어나서 1765년 그 곳에서 죽었다. 그는 11세 때 3차원 곡선에 관한 논문을 쓸 만큼 젊은 수학 천재였다. 이 논문과 공간상에서 꼬인 곳서느이 미분가하학에 관한 후속 논문으로 인해 18세의 비합법적인 나이에 프랑스 과학원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1736년 그는 모페르튀(Merre Louis Moreau de Mauperruis, 1698-1759)와 함께 지구의 자오선 중의 하나에 대한 1도의 길이를 재기 위하여 랩랜드로 탐험을 떠났다. 이 탐험은 지구 모양에 관한 논쟁을 수습할 책임을 지고 있었다. 뉴턴과 호이겐스는 수학적 이론르로부터 지구는 극부분에서 평평해져 있다고 결론을 내린 바 있다. 랩랜드에서 얻은 측정치는 의심할 말없이 뉴턴 호이겐스의 확신을 확인시켜 주었고 모페르튀는 '지구를 평평하게 한 사람'이라는 별명 이 붙었다. 프랑스로 돌아온 후인 1743년에 클레로는 <지구의 형태론, Theorie de la figure de la Terre>을 발간하였다. 클레로는 겨우 16세에 천연두로 죽었으나 14세 때 기하학에 관한 논문을 읽고 15세 때 기하학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 수학사에서 단지 "막내 클레로"(le cader Clairart, 1716-1732)로만 알려진, 그보다 세 살 어린 동생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 장 바티스 클레로(Jean Baptise Clairaut,1765년에 죽었다)는 수학 교사이자 베를린 학술원의 통신원이었고 기하학에 관한 글을 썼다.그는 20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단 한 명만 급조다 오래 살았다. |
타르탈리아(Tartaglia Nicolo Fontana :1499-15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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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르탈리아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1499년에 브레시아에서 가난한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512년에 브레시아가 프랑스의 침략을 받았을 때 그 곳에서 지내고 있었다. 이 침략과 더불어 만행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 타르탈리아와 아버지(당시에 브레시아에서 우편배달부를 했다)는 신변의 안전을 위하여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성당으로 피신하였으나 병사들이 끝까지 그들을 쫓아들어와 대학살극을 벌였다.
그 때 아버지는 죽었고 그는 모숨은 건졌지만 머리가 깨지고 턱이 갈라졌다. 어머니가 나중에 가족을 찾기 위하여 성당에 도착했을 때 아들이 아직 살아 있는 것을 발견하곤 가까스로 아들을 빼내어 왔다. 그러나 의료시설이 부족하여 치료를 제대로 받을 수 없었으므로 어머니는 상처난 개가 항상 상처난 곳을 혀로 핥는다는 것을 생각해내고 아들에게 그렇게 해주었는데, 나중에 타르탈리아는 자신의 회복이 바로 어머니의 이러한 치료법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어쨌든 그 때 입은 턱의 상처 때문에 일생 동안 말을 완전하게 할 수 없었으며, "말더듬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어머니는 돈을 모아서 간신히 아들을 보름 동안 학교에 보냈는데 타르탈리아는 그 때 습자본 하나를 훔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었고 그 후에 그것을 가지고 읽고 쓰는 법을 독학으로 공부했다. 또 종이를 살 돈이 없어서 공동묘지의 묘비를 이용하여 공부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서 수학과 과학을 가르치며 생계를 유지했으며 1557년에 베니스에서 죽었다. 타르탈리아는 재능 있는 수학자였다. 우리는 이미 3차방정식에 대한 그의 연구를 살펴본 바 있다. 또 그가 처음으로 수학을 포술학에 응용했던 것으로 믿어진다. 일반적으로 그가 16세기의 가장 훌륭한 이탈리아 산술서를 쓴 것으로 간주되는데 그것은 당시의 수치계산과 통상관세에 관한 충분한 논의를 싣고 있는 두 권의 논문으로 되어 있다. 그는 또한 유클리드와 아르키메데스의 저작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
탈레스(Thales :BC 624?-BC 5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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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스는 젊은 시절에는 상인으로서 돈을 많이 벌었지만 그 이후에는 연구와 여행으로 여생을 보낸 듯하다. 한때 그는 이집트에도 머문 적이 있으며 그 곳에서 그림자를 이용하여 피라미드의 높이를 계산하여 주위의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밀레투스로 돌아온 그는 다방면의 천재성에 의하여 정치가, 고문, 공학자, 실업가, 철학자, 수학자, 천문학자로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탈레스는 수학적 발견과 관련되어 알려진 최초의 인물이다. 기하학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기본결과들을 밝혔다.
1. 원은 임의의 직경에 의하여 이등분된다. 2. 이등변삼각형의 두 밑각은 같다. 3. 두 직선이 만나서 생긴 맞꼭지각은 같다. 4. 두 삼각형에서 각각 두 각과 한 변이 서로 같으면 그들은 서로 같다.[탈레스는 아마 해변에서 배까지의 거리를 계산하는데 이 결과를 이용했을 것이다] 5. 반원에 내접하는 각은 직각이다. [바빌로니아인들은 이보다 1400년 전에 이미 이 결과를 알고 있었다.]
위 결과에 대한 가치는 정리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탈레스가 이를 직관과 실험 대신에 논리적 추론에 의해서 입증했다는 데 있다. 탈레스에 관한 재미있는 많은 일화는 다른 위인들이 경우처럼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럴싸한 얘기들이다. 그는 얼마나 쉽게 부자가 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 적이 었었다. 올리브 대풍작을 예견한 그는 그 지역의 모든 착유기에 대한 전매권을 얻은 다음 나중에 착유기를 빌려주어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또 말을 잘 안듣는 노새에 관한 일화가 있는데 이 노새는 소금을 운반할때 냇물에 이르면 그 냇물에 뒹굴어 소금을 물에 녹게 한 다음 보다 가볍게 운반하곤 했다. 그래서 탈레스는 한번은 이 노새에게 스펀지를 운반하게 해서 골치아픈 노새의 습관을 없애버렸다는 것이다. 또 솔론이 탈레스에게 "그대는 왜 결혼하지 않았느냐?"고 물었을 때 탈레스는 그 다음 날 솔론의 사랑하는 아들이 갑자기 사고로 죽었다는 거짓 전갈을 가지고 솔론을 찾아갔다. 그런 다음에 탈레스는 비통에 잠긴 솔론을 진정시키며 자초지종을 털어놓으면서 "나는 단순히 내가 왜 결혼하지 않았는가를 그대에게 말하고 싶었을 뿐이오."라고 말했다. |
테일러(Brook Taylor :1685-17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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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적분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매우 유용한 함수의 케일러 전개와 매클로린 전개을 통하여 영국의 수학자 테일러(Brook Taylor. 1685-1731)와 스코틀랜드 수학 매크로린(Colin Maclaurin, 1698-1746)의 이름을 잘 알고 있다. 테일러가 (수령성의 고찰 없이)잘 알려진 전개 정리를 발표한 때가 1715년이다. 1717년에 테일러는 다음과 같이 수치 방정식의 해에 그의 급수를 적용하였다. "a를 f(x)=0의 근의 근사값이라고 하고 f(a)=k , f'(a)=k', f"(a)=k", x=a+b라 놓자. 0=f(a+b) 를 급수 전개하여 b의 2차 이상의 항을 무시하고 k, k', k"의 값을 대입하면 b를 구할 수 있다. 이 과정을 계속 되풀이하여보다 근접한 근사값을 얻을 수 있다." 원근법에 관한 테일러의 일부 논문은 오늘날 비행기에서 찍은 사진으로 측량하는 사진 측량법의 수학적 처리에 응용되고 있다. 테일러 급수의 중요성이 완전히 인정받게 된 것은 오일러가 그 것을 미분법에 적용한 1755년의 일이며 라그랑주가 잉여량을 첨가한 급수를 함수론의 기초로 이용한 것은 훨씬 후의 일이다. 테일러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성 존스 칼리지에서 공부하였으며 일찍부터 수학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다. 그는 영국 학술원 회원으로 허락 받았으며, 그 곳의 간사가 되었으나 저술에 전념하기 위해서 서른네 살의 나이에 사임하였다. 매클로린 전개라 불리는 것은 단지 케일러 전개에서 a=0인 경우이며, 매클로린이 <유율법 연구, Treartise Fluxions>(2vols., 1742)에서 그 것을 사용하기 수 년 전 테일러에 의하여 또한 스털링(James Stirling, 1692-1770)에 의하여 실제적으로 명백히 주어졌다. |
튜링(Turing, Alan Mathison :1912~19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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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수학자·물리학자. 런던 출생. 특히 계산기의 연구로 알려졌으며, 계산기가 어디까지 논리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처음으로 지적인 실험을 시도한 학자로 유명하다. 오늘날 튜링의 기계로 불리고 있는 것은 아직 현대의 계산기가 출현하지 않았을 때에 그가 고안해 낸 상상의 기계로 일종의 수학적 모델이었다. 케임브리지대학을 마친 후 1935년 이 대학의 특별연구원이 되었고, 39∼45년에는 외무부에 근무하였다. 45∼48년 국립 물리학연구소에서 계산기의 제작 계획에 참가하였다. 46년 훈공장(勳功章)을 수상하였고, 51년 영국학사원 회원을 지냈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다가 음독자살하였다. |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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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은 1623년 프랑스의 오베르뉴 지방에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수학에 비상한 능력을 보였다. 그가 젊었을 때의 여러 이야기들이 후에 페리에 부인이 된 누이 질베르트에 의해 전해지고 있다. 그는 허약한 체질 때문에 과로하지 않도록 집에만 갇혀 있었다. 아버지는 아이들 교육은 처음에는 언어 공부에 한하여야 하며, 어떠한 수학도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고 결정하였다. 학습에서 수학을 배제시킨 것이 오히려 소년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가정교사에게 기하학의 특성에 관하여 질문을 하도록 했다. 가정교사는 그것은 정밀한 도형과 그것의 다른 부분의 성질을 공부하는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가정교사의 설명과 아버지의 금지 명령에 자극받아서 그는 노는 시간을 포기하면서까지 몇 주 만에 스스로 기하학적 도형의 많은 성질, 특히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평각과 같다는 사실을 은밀히 발견하였다. 어느 날 기하학을 공부하고 있는 아들과 우연히 마주친 아버지는 소년의 능력에 매우 놀라서 아들에게 유클리드<원론>의 복사본을 주었는데, 그 어린애는 그것을 탐욕스럽게 읽어서 빠르게 숙달하였다. 14세 때 파스칼은, 나중에 프랑스 학술원이 된 프랑스 수학자 단체의 매주 한 번 모이는 모임에 참여하였다. 16세 때 그는, 데카르트가 소년의 작품으로 도저히 믿을 수 없고 아버지의 것임이 틀림이 없다고까지 추측한, 원추곡선에 관한 소론을 썼다. 18세 땐가 19세 때에는 최초의 계산기를 발명하였는데, 그것이 르왕에서 정부의 회계감사를 하고 있었던 부친을 돕기 위하여 고안했다. 파스칼은 50여 개의 계산기를 만들었는데, 그중 몇 개는 파리에 있는 한 발물관에 여전히 보존되어 있다. 21세 때 기압에 관한 토리첼리의 책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의 비범한 재능을 물리학에 사용하기 시작한 결과 유체역학의 '파스칼이 법칙'이 오늘날 고등학교에서 물리를 배우는 모든 학생들에게 알려지고 있다. 몇 년 후인 1648년에 그는 원추곡선에 관한 포괄적인 미발표 원고를 썼다. 이렇게 놀랍고 조숙한 활동은 파스칼이 건강이 나빠져 고생하면셔 수학과 과학의 연구활동을 포기하고 종교적인 명상에 몰두하기로 결심했던 1650년에 돌연 막을 내렸다. 그러나 3 년 후 그는 짧은 기간 수학으로 되돌아왔다. 이때 그는 <수삼각형론,Traite du triangle arithmetique>을 저술하였고 유체압에 관한 여러 실험을 행했으며, 페르마와 서신 왕래를 통하여 확률의 수학적 이론의 기초를 세우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1654년 말에 그는 재개된 활동들이 신을 기쁘게 하지 않는다는 강한 암시를 받게 된다. 신의 암시는 그의 고삐풀린 말이 뉘일르의 다리 난간으로 돌진했으나 그 자신은 봇줄이 기적적으로 끊어져 겨우 목숨을 건졌을 때 나타났다. 그리하여 종교적 명상에로 충실하게 되돌아갔다. 파스칼은 1658년에 단 한 차례 수학으로 다시 돌아왔다. 치통으로 고통받고 있던 중 약간의 기하학적 착상이 떠올랐고 치통은 갑자기 사라졌다. 이것을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여 8일 동안 온 힘을 기울여 착상을 발전시켰는데, 이 기간에 사이클로이드의 거의 완전한 기하학적 설명을 만들어냈다. 오늘날 초기 프랑스 문학의 모델로서 읽혀지는 그의 유명한<시골사람에 대한 편지, Provincial Letters>와 <명상록,Pensees>은 짧은 생애의 끝무렵에 쓰어졌다. 그는 1662년 파리에서 죽었다. 데자르그와 파스칼은 같은 해에 죽었는데, 데자르그는 69세였으나 파스칼은 불과 39세였다. |
파치올리(Luca Pacioli, :1445-15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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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4년에 이탈리아의 수도사 파치올리의 <산술 기하 비 및 비례요약집, Summa de arithmetica,geometrica, proportioni er proportionalita>의 제 1판이 출간되었는데 혼히 이 책을 간단히 <요약집, Suma>이라고 부른다. 이 저작은 당시의 산술, 대수, 기하에 관한 요약집을 만들기 위해 많은 원전으로부터 자유롭게 편집된 것이다. 이 <요약집>에는 피보나치의<산반서>에 나오는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거의 없지만 훌륭한 표기를 이용하고 있다는 데 특징이 있다. 파치올리는 여러 곳을 여행하며 공부를 했으며 많은 저술을 하였지만 모두 인쇄되지는 못하였다. 1509년에 출간된 그의 <신성한 비례에 관하여, De diuina propotione>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가 그린 것으로 생각되는 정다면체의 그림이 실려 있다 |
파푸스는 유클리드의 <원론>, <자료론> 및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 <평면천체도, Planispherium> 등에 대한 주석을 썼으며 이는 그 후의 주석가들의 저작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파푸스가 실제로 쓴 거작인 <수학집성,Mathematical Collection>은 당시까지 알려져 있던 기하학의 연구에 대한 주석 및 안내서로서 많은 독창적인 명제, 개정, 확장, 역사적 내용 등이 실려 있다. 모두 여덟 권으로 된 이 저작에서 제I권과 III권의 일부가 분실되고 말았다.
파푸스의 <수학집성>은 풍부한 기하학적 금괴가 묻힌 진정한 광산이다. 여기에 나오는 역사적 참고문은 믿을 만한 가치가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스 기하학에 관한 우리의 지식이 바로 이 위대한 논문으로부터 추출해낸 것이다. 이 논문은 무려 30명 이상의 고대 수학자의 작품을 인용하거나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수학집성>이 그리스 기하학의 만가라고까지 불리는 것은 당연하다. |
페르마(Fermat, Pierre de :1601-16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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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나의 취미는 수학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를 다시 한 번 쳐다 볼 것이다. 수학이란 어렵고 따분한 학문이라고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7세기에 취미가 수학연구인 페르마라는 사람이 있었다. 취미라고 하기에는 그의 업적이 너무나 뛰어나기 때문에 그를 '아마추어의 왕자' 라고 부른다. 페르마는 폴란드의 가죽장수인 아버지 도미니끄 페르마와 의회법학자 가문의 딸인 어머니 루이.드.롱 사이에서 프랑스의 보몽 드 로마뉴란 곳에서 태어났다. 초등 교육은 태어난 마을에서 받았지만 해정관으로서의 교육은 툴르스에서 받아 법률가와 향정관으로 툴르스의 지방회의에서 근무하였다. 페르마는 수학에 대한 특별한 교육을 받지 않았고, 30세가 되기전까지는 수학 연구에 취미를 가졌었는지도 분명하지 않으나, 바쉐에 의해 번역된 디오판토스가 저술한 '정수론' 이란 책에 자극되어 단지 한가한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수학을 연구한 것으로 알려진다. 또한 그는 바쁘다는 이유로 수학의 추상 개념에 관한 논쟁을 피하였다. 페르마는 명성보다는 수학 연구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대신 편지를 통해 동료들과 연구 내용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편지에서도 증명은 본인이 간직하고 있고 극히 간단한 서술로 그 결과만을 보냈었다. 페르마는 의회에서 근무를 하면서 한가한 시간에 발견한 연구 결과를 그가 사용하고 있었던 '디오판토스의 정수론' 책의 여백에 적어두곤 했다. 그의 책 여백에 써 둔 것 중 가장 유명한 것은 1637년에 썼다고 추측되는 다음 문장이다. '한 세제곱수를 두 세제곱수의 합으로 나타낼 수도 없다. 또 그이상의 거듭제곱에 대해서도 성립하여 일반적으로 인 3이상의 정수 n에 대하여 부정방정식 x^n + y^n = x^n 의 정수해는 없다.' 이것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또는 페르마 대정리라고 한다. 그의 이 추측은 수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문제 중의 하나이다. 페르마 자신이 과연 증명하고 있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유명한 수학자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풀려고 시도했지만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다. n이 특별한 자연수일 때에 대하여는 제각기의 방법으로 증명되어 있으나, 일반적인 증명은 발견되지 못했다. 1908년 독일의 파울 - 웰스켈이 남긴 유언에 의하여. 2007년까지 이 증명을 완성한 사람에게는 10만 마르크의 상금이 주어지게 되어 있다. 1986년 Miyaoka가 이 정리를 풀었다고 주장했으나, 그의 증명에 무리가 있음이 밝혀졌다. 결국, 1993년 5월, 영국 Cambridge 대학에서 미국의 Princeton 대학에 있는 Andrew Wiles는 "Elliptic curves, modular forms and Galois representations" 라는 강연에서 그가 페르마 마지막정리을 풀었다고 주장하였고, 그의 증명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수백년 동안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 있던 "페르마의 대정리" 못지 않게 수수께끼였던 것은, 과연 페르마가 그것을 정말로 증명했겠느냐는 것이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당시의 수학발달의 정도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
페아노(Peano, Giuseppe :1858-19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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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수학자· 논리학자. 1890년 토리노대학 교수를 지냈다. 기하학· 불변식론· 미분방정식론 등을 연구하였으며, 페아노 곡선의 실례를 처음으로 소개하였다. 근대 기호논리학의 개척자로 오늘날 쓰고 있는 논리기호를 도입하였다. 저서로 《미분학과 적분학의 원리》 《기하계산법》 등이 있다. |
퐁슬레(Jean Victor Poncelet :1788-18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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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슬레는 1788년 메츠에서 태어나서 그 곳의 리세(프랑스의 대학 예비교)에 다닌 후 1807년부터 1810년까지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등록하여 몽주 밑에서 공부하였다. 메츠 사관학교에서 학생으로 정식 교육을 마친 후 1812년 공병 중위로 군에 입대하여 나폴레옹의 치명적인 러시아 원정에 종군하였다. 퐁슬레는 모스크바에서 프랑스로 후퇴할 때 클랄스노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버려진 채 포로로 붙잡혀 거의 5개월이나 끌려다니다가 볼가 강 근처의 사라토프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 곳에서 아무 책도 없이 위대한 <도형의 사영적 성질에 관하여, Traite des proprietes projectives des figures>를 계획하였는데, 그 후 석방되어 1814년 후반 메츠로 돌아와 그것을 편집하여 1822년 파리에서 발행하였다. 퐁슬레는 만년을 띄엄띄엄 역학, 수리학, 무한급수, 기하학에 관한 저술을 하면서 군대에 전념하였다. 그는 응용역학에 관한 논문(1826), 물레방앗간에 관한 재미있는 연구 보고서(역시 1826),1851년의 런던 세계박람회에 전시된 영국 기계와 공구의 보고서, 1822년(1862,1865)의 초기 논문을 두 권 분량으로 확장한 것, 크렐레의 저널에 실린 수많은 기하학 기사를 발표했다. 오랜 생애 동안에 건강이 나빴음에도 불구하고 퐁슬레는 군임무에서 항상 성실하고 유능하였으며 죽을 때까지도 수학적 창조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79세의 일기로 1867년 파리에서 죽었다. 퐁슬레의 <도형의 사영적 성질에 관하여>는 기하학적 이정표이다. 그것은 사영기하학 연구에 커다란 자극을 주었고 이 분야 역사에 있어서 이른바 '위대한 시기'를 열었다 |
푸리에(Jean Baptiste Joseph Fourier :1768-18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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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리에는 1768년 오세르(Auxerre)에서 태어나서, 1830년 파리 에서 죽었다. 1830년 파리에서 죽었다. 재단사의 아들인 그는 여덟 살 때 고아가 되었고, 베네딕트회사가 운영하는 군사학 교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후에 여기에서 수학 강사를 하였다. 그는 프랑스 혁명을 촉진 시키는 데 일조를 하였으며 이 공로 로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교수가 되었다. 그는 몽주와 함께 나 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을 수행하기 위하여 이 직을 사임하였다. 1789년에 그는 이집트(Lower Egypt) 지역의 총독에 임명되었 다. 1801년 영국이 승리하고 프랑스가 항복함에 따라 푸리에 는 프랑스로 돌아와서 그르노블(Grrenoble)의 지사가 되었다.
열에 관한 실험을 시작한 때가 바로 그르노블에 있던 때이다. 1807년 푸리에는 수학사에 있어서 새롭고 결실이 풍부한 장을 여는 논문을 프랑스 과학원에 제출하였다. 이 논문은 금속 막기기, 판, 덩어리에서의 열의 흐름에 관한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었다. 이 논문에서 푸리에는 유한 폐구간에서 정의된 임의의 함수는 사인과 코사인함수의 합으로 분해될 수 있다는 매우 놀라운 주장을 하였다. 보다 명확하게 말하면, 임의의 함수는 구간[-π,π]에서 어떻게 변화하도록 정의되었든 간에 적당한 실수 a,b에 대하 여 그 구간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 식 생략.이미지삽입> 이 급수가 현재 삼각급수(trigonometric series)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당시 수학자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성질이 좋은 몇몇 함수들이 이런 급수에 의하여 표현될 수 있 음이 이미 알려졌었다. 그러나 푸리에는 [-π,π]에서 정의된 임의의 함수가 그와 같 이 표현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과학원의 석학들은 푸리에의 주장에 대하여 매우 회의 적이었으며 리그랑주, 라플라스, 르장드르에 의하여 심사된 이 논문은 기각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과학원은 푸리에가 그의 착상을 좀더 사려 깊게 발전시키도록 격려하 기 위하여 열전달 문제를 1812년의 대상의 주제로 선장하였다. 푸리에는 수정된 논 문을 1811년 제출하였는데, 전의 세 사람과 다른 사람으로 구성된 심의관에 의하여 심사를 받은 결과 상은 받았으나 엄밀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아 과학원의 논문집에 실리도록 추천받지는 못하였다. 푸리에에 관한 흥미로운 일화가 전해진다. 이집트에서의 경험과 열에 관한 연구로부터 그는 사막의 열이 건강에 좋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많은 옷을 껴입고 견딜수 없을 정도로 더운 방에서 살았다. 일부 사람들은 그가 열에 대한 망상 때문에 죽음을 재촉하여, 63세의 나이로 완전히 녹초가 되어 심장병으로 죽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아마도 가장 인용이 많이 되는 푸이에의 말은 (열의 수학적 이론에 관한 그의 초기의 논문에 나오는) "자연을 깊이 연구하는 것이 수학적 발견의 가장 풍요로운 원천이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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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아송(Simeon Denis Poisson :1781-18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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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아송은 1781년 피티비에(Pithiviers)에서 태어나 1840년 파리에서 죽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교육을 받았으며 친척들은 어린 푸아송에게 본인의 희망과는 동떨어진 의학을 공부하도록 강요하였다. 어린 푸아송의 교육은 삼촌이 맡았는데, 그는 란셋으로 양배추잎의 옆맥을 찌르는 것부터 시켰다. 그는 이 일에 완벽하게 숙달되고 나서 물집을 따는 자격을 받았다. 그러나 혼자 이 일을 하게 된 첫 수술에서 환자가 수시간 만에 죽었다. 의사들이 그런 일은 매우 흔하다고 위로했지만 더 이상 이 직업에 종사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강한 수학적 흥미로 인해 푸아송은 1798년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입학하여 수학을 공부하게 되었는데, 라그랑주와 라플라스에게 능력을 인정받았고 졸업과 동시에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강의를 맡게 되었다. 그는 나머지 생애를 여러 행정직과 교수직으로 보냈다. 다소 사회주의자였던 그는 1815년 정통주의자와 합류하기까지 완고한 공화주의자로 남아 있었다. 푸아송의 수학적 저술은 300에서 400을 헤아릴 정도로 많았다. 그의 대표적인 논문은 1811년과 1833년에 발표된 두 편의 <역학론, Traite de meacnique>과 1831년의 <모세관 현상의 새 이론, Theorie nouvelle de l'action capillalre>, 1835년의 <열에 관한 수학적 이론, Theorie mathematique de la chaleur>, 1837년의<재판에 관한 확률연구, Recherches sur la probabilite des jugements>이다. 푸아송이 전문적인 관심 중의 하나를 갖게 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어렸을 때 간호사가 그를 돌봐주고 있었다. 어느날 어버지가 보러 왔을 때, 간호사는 외출중이었고 그 아이는 벽에 있는 못에 끈으로 매달린 채 있었다. 말하기를 질병과 더러운 바닥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푸아송은, 그처럼 매달려 있을 때 앞뒤로 흔들리게 한 덕분에 후에 그가 많은 시간 동안 공부한 진자운동과 일찍부터 친숙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푸아송이 언젠가 "나의 인생은 오직 두 가지, 수학을 연구하는 것과 수학을 가르치는 것에 적합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 두가지 목표 모두에서 탁월했다. |
푸앵카레(Jules Henri Poincare :1854-19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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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그의 시대에서 가장 뛰언난 수학자로 알려진 앙리 푸앵카레는 1854년 프랑스의 낭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제 1차 세계대전 동안 프랑스 공화정의 대통령을 지낸 유명한 정치가 레이몽 푸앵카레의 사촌이었다. 1875년 에콜 폴리테크니크를 졸업한 후 앙리는 1879년 광산학교에서 채광기사 자격을 취득하였으며, 같은 해에 파리 대학교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광산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는 카엥 대학교의 강사로 임명되었으나, 2년 후 파리 대학교로 옮겨 1912년 죽을 때까지 수학과 과학의 여러 교수직을 가졌다. 푸앵카레는 수학 분야에서 전반적으로 능통한 마지막 학자로 묘사되고 있다.
확실히 그는 이 분야의 놀랄 만한 영역에 능통했고 발전시켰다. 그는 매년 소르본에서 순수 또는 응용 수학의 다른 주제에 관하여 명쾌한 강의를 하였는데, 이 강의의 대부분은 곧 바로 발행되었다. 그는 30여 권의 책과 500편의 전문 논문을 쓴 다작의 학자였다. 그는 또한 수학과 과학을 대중에게 보급시키는 데 가장 능력 있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비싸지 않은 보급판 해설서는 날개 돋친 듯 팔렸고, 모든 직업의 사람이 널리 읽었으며, 그것은 명쾌한 설명과 매력적인 스타일의 최고의 걸작이고, 많은 외국어로 번역되었다. 사실상 푸앵카레의 인기 있는 책은 문학적으로도 매우 뛰어나서 프랑스 작가의 최고의 영예인 프랑스 학술원의 문학부분 회원으로 뽑혔다. 푸앵카레는 한 분야에 결코 오래 머물려고 하지 않았고, 이 영역 저 영역으로 재빠르게 옮겨다니길 좋아했다. 그래서 그의 동시대인 중의 한 사람은 그를 '식민지 개척자가 아닌 정복자'로 묘사했다. 미분방정식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은 그것의 존재 정리에 관한 것이었다. 이 논문으로 해서 그는 자기동형함수, 특히 소위 제타-푸크스 함수의 이론을 발전시켰는데 푸앵카레는 이것이 대수적 계수를 가지는 2계 선형미분방정식을 푸는 데 이용될 수 있음을 보였다. 푸앵카레는 라플라스처럼 확률론 분야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그는 또한 20세기의 관심분야인 위상수학에 참여하여 오늘날 수열적 위상수학의 푸앵카레군에 그의 이름이 나타난다. 응용 수학에서 이 다재다능한 천재는 광학, 전기학, 전신, 모세관현상, 탄성, 열역학, 전위이론, 양자이론, 상대성이론, 우주진화론 같은 다양한 분야에 기여했다. 푸앵카레는 전 생애 동안 어눌하고 근시이며 맹추같았지만, 무엇이고 한 번 읽은 것은 거의 완벽하게 기억하고 즉각 상기해 내는 사람이었다. 그는 안정하지 못하고 서성거릴 때 수학을 머릿속에서 연구하고, 생각이 완성되면 반드시 새로 쓰거나 삭제 없이 재빨리 논문으로 만들었다. 그의 성급함과 많은 저작에 대비하여, 우리는 신중하게 준비한 가우스의 저술과 가우스의 좌우명 '적지만 익은'을 회자하곤 한다. 푸앵카레의 손재주 없음에 관한 일화가 있다. 그는 어느 손으로도 똑같이 못 쓰기 때문에, 양손잡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그리는 데는 재주가 없어서 이 분야의 학교 성적은 일률적으로 영점을 받았다. 졸업할 때 그의 급우들이 장난으로 그의 예술적 걸작을 일반에게 전시하기로 계획했다. 그들은 각 작품에 그리스어로 쓴 '이것은 집입니다..'이것은 말입니다." 등의 꼬리표를 조심스럽게 붙였다. 푸앵카레가, 모든 수학이 그의 학문범위였다고 주장할 수 있는 마지막 사람일 것이다는 말은 적절하다. 수학이 현대에 믿을 수 없을 만큼 다른 속도로 커왔기 때문에 그런 영예를 다시 얻기는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 |
프레게(Friedrich Ludwig Gottlob Frege :1848~19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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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논리학자·수학자·철학자. 메클렌부르크슈베린 출생. 명제논리(命題論理)와 술어논리(述語論理)를 공리체계(公理體系)로 해서 조직화하여 기호논리학(記號論理學)에의 길을 열었고, 1879∼1918년 예나대학 교수를 지냈다. 논리학을 기초로 하여 수학의 구성·도출을 시도, 논리주의를 처음으로 주창하였다. 그는 또한 개념에 대한 전통적인 외연(外延)과 내포(內包)의 구별을 명제로까지 확장, 전자를 명제의 진리치(眞理値), 후자를 그 의미라고 생각하고, 또한 표현에 대하여는 문장적인 규칙으로서 결정되는 그 의의와 대상과의 지시관계에서의 의미를 구별하였다. 그리고 후의 ‘언어의 계층의 구별’을 이미 확인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그의 생각은 그 특이한 기호표기 때문에 그다지 주목되지 않았는데, J.러셀에 의해서 발견된 이래 현대논리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주요저서에는 《산술의 기초》(1884) 《산술의 원리》(1893∼1903) 등이 있다 |
프톨레마이오스(PTOLEMY, C. :85-16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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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에 관한 뛰어난 그리스 저작은 150년경에 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쓰여졌다. <수학대계, Syntaxis mathematica>라고 불리는 이 논문은 후대에 대단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서 히파르쿠스의 저작 위에 기초하고 있으며 치밀함과 우아함에서 매우 놀라운 작품이다. 후대의 주석가들은 이 논문을 천문학에 관한 그 밖의 다른 논문과 구분시키기 위해서 그것에 가장 '위대한'(그리스어로 'magiste')이라는 최고의 형용사를 갖다 붙였다. 그 이후에도 여전히 아라비아의 번역가들은 아라비아식 관사 'al'을 그의 논문 제목 앞에 붙였는데 그 이후로 줄곧 이 저작이 <알마게스트, Almagest>로 알려져 왔다. <알마게스트>는 코페르니쿠스와 케프러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천문학의 표준서로 간주되어 왔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지도투영, 광학, 음악 등에 관해서도 저술했고 또 유클리드의 제 5 공준(평행에 관한 공준)을 유클리드 최초의 가정에서 빼버리기 위하여 <원론>에 있는 그 밖의 다른 공리나 공준으로부터 이를 유도해보려고 노력하기도 했는데 이는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
그는 아테네에서 귀족 가문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Ariston은 아테네의 초기 왕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으며 어머니인 Perictione은 기원전 6세기경에 법을 만들었던 솔론과 먼 친척이었다고 한다. 플라톤이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어머니는 정치가인 Pericles의 동료였던 Pyrilampes와 결혼했다. 기원전 387년, 플라톤은 아테네에 최초로 설립된 유럽의 대학교라 불려지는 '아카데미'를 세웠다. 이 곳에서는 천문학, 생물학, 수학, 정치론, 철학과 같은 과목들을 포함해 광범위한 교육 과정을 제공하고 있었다. 플라톤은 오늘날 우리가 수학에서 사용하고 있는 '형상'에 관한 이론을 세우는데 많은 공헌을 했다. 예를 들어, 원은 고정된 어떤 한 점에서 같은 거리에 있는 모든 점들로 이루어진 평면도형이라고 정의 내렸다. 그러나 실제로 어느 누구도 이를 본 적은 없다. 수학자들이 원을 정의할 때 연관되는 점들은 공간의 점이 아니라 논리상의 점들이다. 이것은 공간에서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수학자들과 여러 다른 사람들은 원이 무엇인지 정의 내릴 수 있기 때문에 원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그러므로 플라톤은 원형이라는 형상이 존재함을 알았다. 따라서 이것은 형상 또는 생각의 세계에서는 변하지 않는 주제로 남아 있다. 원형, 네모모양, 삼각형모양을 그가 형상으로 여겼던 예들이다.물리학의 세계에서의 대상들은 원형, 네모모양, 삼각형모양이라는 형상을 가장 닮은 원, 사각형, 삼각형으로 불려지는 것뿐이다 |
피보나치(Leonardo Fibonacci :1170?-12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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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사(Pisa)의 레오나르도라고도 알려진 피보나치는 피사의 상업 중심지에서 태어났으며 어버지는 상업과 관련된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의 큰 상인들은 지중해 연안의 여러 곳에 상점을 두고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관세 관리인으로 아프리카의 북부 연안에 위치한 보기(Bougie)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어린 레오나르도는 그 곳에서 교육을 받게 되었다.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소년시절부터 일찍이 산술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으며 이후 이집트, 시칠리아, 그리스, 시리아 등으로 여행을 하면서 동부와 아라비아의 수학을 접하였다.
인도-아라비아의 계산술의 실용적 우수성에 완전한 확신을 가지게 된 피보나치는 1202년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마침내 그의 유명한 저서<산반서,Liber abaci>를 출간하였다. 1220년에 출간된 피보나치의 <싱용기하학, Practica geometriae>은 유클리드적 엄밀함과 약간의 독창성을 가지고 능숙하게 기하학과 삼각법을 다룬 방대한 자료집이다. 1225년경에는 <제곱근서, Liber quadratorum>가 나왔는데 이는 부정해석학에 관한 뛰어난 독창적 작품으로서 이 책이 피보나치를 이 분야에서 디오판투스와 페르마 사이의 가장 뛰어난 수학자로 일컬어지게 만든 작품이다. 이들 책들은 모두 당대 학자들의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작품이었다. |
피타고라스(Pythagoras :BC 582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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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인 에우데무스(Eudemus)가 쓴 망라하는 역사에 대한 <에우데무스 요약>(기원전 335년 이전의 그리스 기하학을 모두 망라하는 역사에 대한 요약)은 피타고라스(Pythagoras)를 탈레스 이후의 가장 뛰어난 그리스 수학자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피타고라스의 추종자들이 신비의 안개로 그를 감쌌기 때문에 확실하게 알려진것이 거의 없다. 그는 기원전 572세기경 에게 해의 사모스(Samos)섬에서 태어난것 같다. 탈레스 보다 50세쯤 아래이고 또 밀레투스에 있는 탈레스의 고향 근처에서 살았던 것으로 미루어 탈레스
밑에서 공부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 그는 이집트와 그 밖의 여러 곳을 여행했는데 고향으로 돌아 왔을때 이오니아(Ionia)지방은 페르시아의 지배 아래 있었고 사모스는 폴리크라테스(Polycrates)의 압제정치 밑에 있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남부 이탈리아에 위치한 그리스의 항구도시인 크로톤(Crotona)으로 이주하였다. 그 곳에서 유명한 피타고라스 학교를 세웠는데 이 학교는 철학, 수학, 자연과학의 아카데미로서 비밀을 지키고 어떤 의식을 행하는 매우 단단하게 결속된 단체로 발전하게 되었다. 멀지않아 이 단체의 영향과 귀족적 경향이 너무나 대단해져서 남부 이탈리아의 민주세력이 그 학교의 건물을 파괴하고 단체를 해산시키에 이르렀다. 한 기록에 따르면 피타고라스는 메타폰툼(Metapontum)으로 피신을 했으나 아마 그 곳에서 살해된 듯하다. 이때 나이가 75-80세쯤 되었다. 그리하여 피타고라스학파는 흩어지지만 그 후 적어도 2세기 동안 계속 존속하였다. |
하디(Hardy, Godfrey Harold :1877-19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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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수학자. 잉글랜드 서리주 출생. 옥스퍼드대학에서 기하학을 강의하고,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순수수학 교수로 있었다. 해석적 정수론에 많은 업적이 있고, 가법적 수론(加法的數論)에서의 오일러법의 개량, 제타함수에 관한 ‘리만의 예상’의 연구 등이 알려져 있다. 푸리에급수에 대한 기여도 중요하다. 1908년에는 독일의 의사 W.바인베르크와 동시에 하디-바인베르크의 법칙을 제시했다. |
해리엇(Thomos harriot :1560-16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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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엇(Thomas Harriot, 1560-1621)은 대부분의 생애를 16세기에 살았지만 위대한 저서가 17세기에 발간된 또 한 사람이 수학자이다. 그는 미국인에게 특별한 관심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1585년에 롤리 경에 의해서, 현재는 노스캐롤라이나라 불리지만 그 당시 버지니아라 불렸던 곳의 지도 제작을 위해 측량사로서 그렌빌경의 탐험대와 함께 신대륙으로 보내졌기 때문이다. 수학자로서 해리엇은 흔히 대수학자들의 영국학파의 설립자로 간주되고 있다. 이 분야의 위대한 책인 <해석술의 연습, Artis analyticae praxis>은 그가 죽은 후 10년까지 발간되지 않았는데, 그것은 주로 방적식 이론을 다루고 있다.
거기에는 1, 2, 3, 4차방정식에 관한 연구가 포함되어 있는데, 주어진 근을 갖는 방정식의 형태, 방정식의 근과 계수와의 관계, 원래 방정식의 근과 어떤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는 근을 가지는 또 다른 방정식에로의 변환, 방정식의 수치해석 등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이 내용의 대부분은 비에트의 논문에서 발견될 수 있지만, 해리엇의 책에서는 더 완벽하고 훌륭하게 체계적으로 취급하였다. 해리엇은 미지수는 모음 문자, 상수는 자음 문자를 사용하는 비에트이 방식을 따랐지만 대문자보다는 소문자를 사용하였다. 그는 비에트의 지수 표기법을 개선하여 aa를 a2 으로 aaa를 a3 등으로 나타내었다. 그는 또한 "...보다 크다" "...보다 작다"는 의미의 기호 >와 <를 처음 사용하였는데, 이 기호를 사람들이 즉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해이엇은 대략 같은 시기에 갈릴레오와는 독립적으로 태양의 흑점을 발견했고, 목성의 위성을 관찰하는 등 천문학자로서도 명성을 떨쳤다. 그는 1621년에 암으로 죽었다. 해리엇의 대수에 관한 유저가 출판된 같은 해(1631)에, 영국에 수학지식을 전파하는 데 많은 역할을 했던 오트레드의 유명한 책 <수학의 열쇠, Clavis mathematicae>의 초판이 출간되었다. 오트레드(William Oughtred, 1574-1660)는 가장 영향력 있는 17세기 영국의 수학 저술가 중의 한 사람 이었다. 그는 영국 성공회의 직업 목사였으나 수학에 흥미를 지닌 학생들을 자유롭게 개인지도하였고 그 학생들 중에는 후에 각각 수학자, 건축가, 천문학자로 잘 알려진 월리스, 렌, 워드 등이 있다. |
해밀턴(William Rowan Hamilton :1805-18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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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점으로 보아 수학분야에서 아일랜드의 가장 위대한 명성을 지닌 해밀턴은 1805년 더블린에서 태어나서,잠깐씩 다른곳을 방문한 것을 제외하면, 전 생애를 그 곳에서 보냈다. 그는 일찍이 고아가 되었으나, 겨우 한 살 때 그를 열심히 그러나 언어에 치중되게 교육시켰던 삼촌에게 양육이 맡겨졌었다. 해밀턴은 천재임이 판명되었고, 13세가 되었을 때에는 나이만큼이나 많은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였다. 그는 실제적인 성과는 없었으나, 고전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갔고, 일생의 열망이 된 시 쓰기에 빠져있었다. 그는 위대한 시인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와 절친한 친구이며, 서로 존경하는 사이가 되었다.
해밀턴은 15세가 되어서야 수학에 열중하게 되었다. 그 변화는 더블린의 박람회에서 어리지만 자신의 능력을 시범보인 미국 암산 학자 콜번(Zerah Colburn)을 만남으로써 일어났다. 얼마후 해밀턴은 우연히 뉴턴의 <보편산수, Arithmetica universalis> 한 권을 얻었다. 그는 이 책을 매우 열심히 읽어 해석기하학과 미적분학을 숙달하였다. 그 다음에 4권의 <프린키피아, Principa>를 읽고, 유럽 대륙의 위대한 수학적 저서를 공부하였다. 라플라스의 <천체 역학,Mecanique celeste>을 읽으며 수학적인 오류를 지적하였고, 1823년 상당한 관심을 끌었던 그것에 관한 논문을 썼다. 이듬해 그는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였다. 해밀턴은 겨우 21세이며 대학 재학시절인 1823년에 아일랜드 왕립 천문학자, 던싱크 천문대장과 대학교 천문학 교수에 만장일치로 임명되었다. 그 직후 수학적 이론만으로 축이 두 개 있는 결정체에서의 원추형의 굴절을 예견하였는데, 그 후 이것은 물리학자들의 실험을 통하여 극적으로 확인되었다. 1833년 복소수의 대수가 실수의 순서쌍의 대수로 나타나는 중요한 논문을 아일랜드 학술원에 제출했다. 1835년 그는 나이트 작위를 맏았다. 1833년의 논문에 따르면, 해밀턴은 수 년 동안 때때로 실수의 순서 3쌍과 순서 4쌍의 대수에 관하여 생각했으나, 연산의 잘 알려진 법칙을 보존하고 그 연산을 자신의 물리적 고찰에 맞도록 곱셈을 정의하는 문제에서 항상 난관에 부딪혔다. 마침내 1843년 번개같이 스치는 영감으로 자신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었고, 교환법칙을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최초의 비가환대수인 사원수대수를 돌연 탄생시켰다. 물리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소위 해밀턴 함수와 동역학의 해밀턴-야코비 미분방정식에서 해밀턴의 이름을 만난다. 행렬이론에서 해밀턴-캐일리 정리, 방정식, 다항식이 존재하고, 수학적 오락으로 정12면체에 관한 해밀턴의 게임이 있다. 병과 가정불화로 인한 비극적인 말년에, 새로 설립된 미국의 국립 과학원이 그를 최초의 외국 준회원으로 선출하였던 일을 상기 하는 것은 아마 미국 사람들을 기분좋게 할것이다. 또 다른, 해밀턴에게 주는 드물게 보는 명예와 경의의 한 예는 1845년 그가 케임브리지에서 열린 제2회 영국 학회에 참석했을 때 뉴턴이 <프린키피아>를 저술했다고 전해지는 트리니티 칼리지의 신성한 방에서 일주일 동안 묵게 한 것이다. |
그가 살았던 정확한 시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대체로 기원전 150년경부터 250년 사이에 산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 들어와서는 그가 1세기의 약75년경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수학과 물리학 분야에서의 저작은 너무 많고 다양해서 흔히 그를 이 분야에서의 백과 사전적 작가라고 일컫기도 한다. 그가 이집트인으로서 그리스 고육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되는 이유가 여러 가지 있다. 아무튼 이론적인 완전성보다는 실용적인 이용에 목적을 크게 둔 그의 저작은 그리스 문명과 오리엔트 문명의 진기한 혼합체라고 할 수 있다.그는 공학과 측지에 대한 많은 과학적 기초를 제공해
주었다. 14편쯤 되는 그의 논문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긴 하지만 그중 몇 가지는 약간 편집된 듯하다. 그 외에도 분실된 저작에 관한 많은 언급이 있다. 헤론의 저작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하나는 기하학에 관한 것으로서 주로 측정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또 하나는 역학에 관한 것으로서 기계적 고안품에 관한 설명으로 되어 있다. 기하학에 관한 헤론의 작품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측정론,Metrica>으로서 세 권의 책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최근 1896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쇠네(R.Schone)가 발견한 것이다. |
호이겐스(Christiaan Huygens :1629-16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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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네덜란드의 천재 호이겐스는 두드러지게 공헌을 많이 한 삶을 살았다. 그는 1629년 헤이그에서 태어나 라이덴에 있는 소 스호텐(Frans van Schooten the Youngers) 밑에서 공부했다. 그는 22세때인 1651년 성 빈센트가 원적문제에 관한 책에서 범한 오류를 지적하는 논문을 썼다. 이것이 뒤이어 원추곡선의 구적법과 π를 계산하는 고전적 방법을 개선한 스넬의 삼각법을 다룬 수 많은 그의 업적이 나온다. 1654년에 그와 동생은 렌즈를 연마하고 세척하는 새롭고 더 좋은 방법을 고안했고 그 결과 토성의 고리의 성질과 같은 천문 관찰의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는 몇년 후 추시계를 발명하여 시간을 재는 좀더 정확한 기구를 갖게 되었다.
호이겐스가 파스칼과 페르마간의 서신 왕래에 기초한 확률에 관한 첫 공식 논문을 쓴때가 1657년 이었다. 호이겐스는 많은 흥미있는 난제를 풀고, '수학적 기대값' 이라는 중요한 개념을 소개했다. 만일 p가 어떤 사람이 상금s를 받을 확률이라면 sp를 그것의 수학적 기대값(mathematical expection)이라 부른다. 호이겐스는 p가 어떤 사람이 상금 a를 받을 확률이고q 는 상금b를 받을 확률이면, 그는 상금ap+bq를 받을 것을 기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였다. 1673년 파리에서 호이겐스의 가장 위대한 저술 <전자시계,Horologiun oscilarium>가 나왔다.
호이겐스는1681년에 네델란드로 돌아와서 초점길이가 매우 큰 몇개의 렌즈를 만들고 망원경에 쓰이는 무색의 대안렌즈를 발명하였다. 1689년에 영국을 방문하여 뉴턴과 친교를 맺었는데 그곳에서 뉴턴의 업적에 매우 감탄하였다. 이듬해 네덜란드로 돌아온 직후 빛의 파동현상을 상세히 설명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이론에 기초하여 반사와 굴절의 법칙을 기하학적으로 추론하고 이중 굴절현상을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뉴턴은 빛의 방사이론을 지지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위대한 명성 때문에 과학자들은 파동 이론 보다는 방사이론을 선호하였다. 호이겐스는 수 많은 소책자를 썼다. 그는 디오클레스(Diocles)의 시소이드(cissoid)의 길이를 구하고 현수선의 기하학적 성질을 연구하고, 대수적 곡선에 관한 논문을 썼으며,다항식의 현대 형태, 페르마의 극대, 극소 법칙에 관한 결과를 발표하였고 수학을 물리학에 수없이 응용하였다. 뉴턴이 제시한 많은 증명처롬 호이겐스의 증명도 그리스 기하학의 방법을 써서 매우 정확하고 완전하게 완성되어 있다. 그의 논문을 읽으면 강력한 새 방법인 해석기하학과 미적분학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호이겐스는 1695년 그가 태어난 마을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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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퍼(Grace Brewster Murray Hopper :1906-19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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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호퍼는 뉴욕에서 태어나 Vassar대학과 예일 대학교에서 교육받았다. Vassar에서 수학 부교수였던 호퍼는 1943년 해군에 합류했다. 그녀는 하버드 대학교에 있는 Howard Aiken 전산 연구소에서 최초의 대형 U.S.컴퓨터인 Mark 1의 프로그래머로서, 전기 컴퓨터의 선구자로서 일했다. 1950년에서 1960년에 걸쳐 Eckert - Mauchly Computer Corporation에서의 그녀의 업적이 알려지면서 호퍼는 최초의 컴파일러를 발명해 냈다. 이 컴파일러는 영어를 기계어로 컴퓨터에 대한 명령을 번역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녀는 Flow - Matic 프로그래밍 언어와 일반 상업 중심 언어를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녀는 경영과 프로그래머를 오가며 컴퓨터에 대한 산업과 사업에서 흑자를 보았다. 그녀는 미국 해군 연구소에서 퇴임했으나 컴퓨터 프로그램과 언어를 표준화하는 해군의 프로그램의 감독을 위하여 다시 기용되기도 했다. 1973년 그녀는 영국 회의 특별 조치로 해군대령이 되었으며 1983년에는 해군 소장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호퍼는 1986년 해군에서 전역하여 Digital Equipment Corporation (디지털 장치 회사)의 수석 고문으로서 봉사했다. 그 후 1992년에 타계했다 |
홍대용(Hong Dae Yong :1731~17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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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용은 조선 시대 실학파 학자 가운데에서도 가장 진취적인 사상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중국의 북경에서 서양 문물을 견학하면서 유럽 과학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래서 동양의 음양오행설을 부정하고 지구 자전설을 논하기도 했다. 경제 정책에서는 균전제, 부병제를 토대로 농민의 생활을 보장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학문과 재주가 많은 사람을 신분에 관계없이 등용하고 과거제를 폐지하고 하급 교육 기관에서 재능이 있는 사람을 추천하는 제도를 제창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마을마다 학교를 설치하고 8세이상의 어린이 모두 취학시켜야 한다는 혁명적인 의무 교육제를 주장했다. 또 신분에 관계없이 청소년은 모두 노동에 종사해야 한다는 것과, 공평한 발언권을 보장하고 언론의 평등을 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대용은 그의 집안에 사설천문대까지 꾸며놓을 정도로 실천적인 과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수학자라기보다는 진보적인 과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쓴 책들을 보면 수학에 대한 관ㅅ심과 연구가 대단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홍대용의 가장 대표적인 저서인 <담헌서>의 외집 4~6권 <주해수용>에서는 수학과 천문학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주해수용>의 서문을 보면 그의 수학관이 잘 나타나 있다. 까지의 수학책이 <구장산술>의 범위와 방법을 벗어나지 못한 것을 비판하면서 수학이 새로운 창조와 경험에 의해서 새롭게 풍부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해수용>에서 그는 수학을 배우는 목적은 사고 능력을 길러 품성을 형성하는데 있다고 하면서 특히 수학을 창조적으로 학습해야 한다고 말했다. 홍대용은 <수학계몽> <수학통종> <수법전서> <구장산술>이외의 많은 책을 참고로 하여 정리하고 연구하여 당시 수학을 집대성했다. 우리 나라와 중국 수학의 성과와 서양수학의 성과를 수집하여 정리, 발전시켰다. 홍대용의 수학수준은 대단히 높았다. 당시 수학의 거의 모든 부분을 망라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결점까지 발견하고 분석했다. 그 내용도 비율법, 약분법, 면적 체적 등 근대적인 표현들을 썼다. 또한 그것은 실제로 필요로 하는 지식만을 대상으로 하는 그의 현실주의적이고 합리적인 기본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 head :1861-19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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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는 1861년 영국의 램스게이트에서 태어나서 셰르본느 스쿨과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하였다. 1885년부터 1911년까지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을 강의하였고, 그 후 런던 대학교의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응용수학과 역학을 강의하였다. 1914년부터 1924년까지 런던 대학교 과학기술대학의 수학교수를 지냈고, 미국으로 가서 하버드 대학교의 철학교수가 되어 1936년 정년할 때까지 그 직에 있었다. 그는 1947년 매사추세트 주의 케임브리지에서 죽었다. 가장 뛰어난 제자인 러셀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화이트헤드는 수학의 입장에서 철학을 고찰하였으며, 두 사람이 함께 1910-1913년에 획기적인 <수학의 원리>를 저술하였다. |
4세기 말에 살았던 테온(Theon)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에 대한 11권으로 된 주석집의 저자이다. 테온의 딸 히파티아(Hypatia)는 수학, 의학. 철학분야 등에서 이름을 떨쳤는데 디오판투스의 <산학>, 아폴로니우스의 <원추곡선론>에 대한 주석집을 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녀가 바로 수학사에서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수학자이다. 킹슬리(Charles Kingsley)의 한 소설에서 그녀의 일생과 더불어 그녀가 415년 3월에 광신적인 기독교도의 손에 의해 야만스럽게 죽임을 당하는 상황이 재현되고 있다. |
힐베르트(David Hilbert :1862-19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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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베르트는 1862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나 그 곳의 대학교에서 1885년에 박사학위를 받았고 쾨니히 베르크 대학교에서 처음에는 무급강사(1886-1892) 로 나중에는 교수(1893-1894)로 강의하였다. 1895년에 쾨팅겐 대학의 교수가 되어 1930년 퇴임할 때까지 그 직에 있었다. 그는 1943년 괴팅겐에서 죽었다. 힐베르트는 폭넓은 수학자였으며, 많은 분야에서 매우 중요한 공헌을 하였는데 대개 다음 분야로 넘어가기 전에 각 분야를 우아하게 완성하였다. 이 분야에는, 대수적 불변량정리(1885-1892), 대수적 수론(1893-1899), 공리론으로 연구를 시작했던 기하학의 기초(1898-1899),디리클레 문제 변분법(1900-1905).
스펙트럼 정리와 힐베르트 공간개념을 포함한 적분 방정식(1912년까지), 수리 물리학의 공헌에 뒤이은 기체의 운동이론과 상대성 이론, 끝으로 수학의 기초와 수리논리에 대한 비판적 연구가 포함되어 있다. 그의 자극적인 강의는 세계 곳곳에서 학생을 끌어들였다. 그는 괴팅겐 대학교의 원동력이었으며 기라성 같은 위대한 동료들과 함께 괴팅겐 대학을 1930년대의 파멸적인 정치적 사건이 있기 전까지 수학자들의 메카로 만들었다. 힐베르트는 많은 상을 받았고, 1902년 의 편집자가 되었다. 1900년 파리에서 열린 국제 수학 회의에서 그는 23개의 중요한 미해결 수학문제를 제시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수학에 대한 연구가 더욱 살찌워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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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등 편집 출처 : 네이버 지식인 김순권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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