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베르스(Karl Garbers :1898-) |
독일의 수학자 및 자연과학자. |
가생디(Pierre Gassendi :1592-1655) |
프랑스의 철학자·물리학자·수학자. 프로방스 출생. 에크스대학에서 신학을 공부, 이 대학의 신학·철학 교수가 되었으나, 자연과학 연구에 전념하기 위하여 교수직을 사임하고, 1645년에 파리의 콜레주 루아얄의 수학교수가 되었다. 최초의 역작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에 대한 역설적 연구》(24)에서 명백히 밝힌 바와 같이, 사상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스콜라 철학 제파(諸派)에 대해 격렬한 비판적 입장을 취하였으며, 수학을 비롯한 자연과학 방면의 활약에서는 유물론적 세계관을 기조로 하였다. 그는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의 유물론적 원자론(唯物論的原子論)에 입각하여 물질과 독립된 시간과 공간의 존재를 논증하고, 이의 불멸(不滅)을 주장하였으며, 더 나아가서는 경험 지식을 모든 인식의 원천이라고 선언하여 R.데카르트의 합리주의와 형이상학적 개념에 반대하였다. 그가 주장한 원자론은 18세기 프랑스 계몽기의 감각론자(感覺論者)나 백과전서파(百科全書派)에게 큰 영향을 줌으로써 근대원자론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과학자로서는 천체의 관측과 지중해의 수로도(水路圖)작성에 업적을 남겼다. |
가우스(Carl Friedrich Gauss :1777-18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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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랄만한 수학적 재능을 지닌 가우스는 18세기와19세기에 걸쳐 수학의 거상으로 버티고 서 있다. 그는 19세기의 가 장 위대한 수학자이며 아르키메데스.뉴턴과 더불어 3대 수학자로 꼽힌다. |
갈루아(Evariste Galois :1811-18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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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년 파리 근교에서 작은 마을의 시장의 아들로 태어나 그는 15세 때부터 비상한 수학적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두번이나 에콜 폴리네크니크에 입학하려 했으나, 그의 천재성을 전혀 감지못한 시험관의 형식적인 요구를 채울수 없어 입학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 후 또 다른 충격을 받았는데, 성직자로 부터 박해를 받고 있다고 느낀 아버지가 자살한 것이었다. 참을성 있는 갈루아는 결국 1829년 교사가 될 준비를 하려고 에콜 노르말(사범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민주주의에 찬동하여 1830년 혁명의 소동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수 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하였다. 그는 석방 직후 21세가 채 안 된 1832년에 애정문제로 인한 권총결투에 유인 되어 살해되었다. |
갈릴레오(Galileo Galilei :1564-164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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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는 1564년 미켈란젤로가 죽은 날에 피사에서 가난한 플로렌스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17세 되던 해, 부모는 의학을 공부시키려고 그를 피사 대학으로 보냈다. 하루는 피사의 성당에서 예배를 보던 중 높은 천장에 매달린 큰 청동 램프에 정신을 빼앗겼다. 램프는 불을 켜기 쉽게 하려고 옆으로 끌어당겨져 있었는데 놓았을 때 그것은 점차로 진폭이 작아지면서 앞뒤로 진동하였다.그는 자신의 맥박수를 이용하여 시간을 재었는데 진동주기가 진폭의 크기와 관계없음을 발견하고 놀랐다. 그 후에 실험을 통해서 진자의 길이에만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
골드바흐(Christian Goldbach :1690-1764) |
골드바흐의 추측'을 비롯해 정수론의 발전에 공헌한 수학자이다. 1725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제국 아카데미에서 수학, 역사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2년 뒤 표트르 2세의 개인 교사가 되어 모스크바로 갔고, 1742년부터는 러시아 외무부에서 일했다. |
괴델(Godel, Kurt :1906-1978) |
오스트리아 태생의 미국 수학자. |
구르사(Goursat, Edouard-Jean-Baptiste :1858-1936) |
프랑스의 수학자. 랑자크 출생. 툴루즈 이과대학 강사(1881∼85) |
굴베르그(Cato Maximilian Guldberg :1836-1902) |
노르웨이의 화학자·수학자. 크리스티아니아(지금의 오슬로) 출생. |
그라스만(Hermann Gunther Grassmann :1809-18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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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스만은 독일의 슈테틴에서 1809년에 태어나서 1877년 그곳에서 죽었다. |
그레고리(James Gregory :1638-1675) |
스코틀랜드의 수학자·발명가. |
그로탕디에크(Alexander Grothendieck :1928-) |
수학자. 유년시절은 독일에서 지냈으나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하여 프랑스로 건너온 후로는 주로 그곳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국적이 없다. |
그린(George Green :1793-1841) |
영국의 수학자. 가업을 이어 빵 제조업에 종사하는 한편 수학을 독학했다. |
남병길(Nam Byoung Kil :1820-1869) |
남병길은 조선 시대 철종 때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이다. 그의 형인 남병철(1817~1863)과 함께 조선 후기 수학자 형제로 유명하다. |
내시(John F. Nash :1920-) |
미국의 수학자. 웨스트버지니아주(州) 블루필드 출생. |
네이피어(John Napier :1550-16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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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버지가 겨우 16세 때 태어난 네이피어는 귀족 가문의 대저택인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근교의 머쉬스톤 성에서 대부분의 생애를 보냈으며 그 시대의 정치와 종교적 논쟁에 대부분의 정열을 쏟았다. 그는 격렬한 반천주교주의자였고 녹스 (John Knox)와 제임스 1세의 주장을 옹호하였다. |
노이만(독일)(Franz Ernst Neumann :1798-1895) |
독일의 물리학자·광물학자·수학자. 브란덴부르크 출생. |
노이만(헝가리)(Johann Ludwing von Neumann :1903-1957) |
헝가리 출신의 미국 수학자.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생. |
뇌더(Amalie Emmy Noether :1882-1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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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여자 수학자 중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여겨지는 뇌더(Amalie Emmy Noether)는 1882년 독일의 에를랑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막스 뇌더(Max Noether, 1844-1921)는 에를랑겐 대학교의 뛰어난 수학자였다. 막스 뇌더는, 같은 대학교에 속해 있으며 뇌더가족의 절친한 친구인 고르돈(Paul Gordon, 1837-1921)과 마찬가지로 대수학자였다. 그 대학교에서 공부한 에미 뇌더도 대수학자가 된 것은 당연하다. 그녀는 1907년 고르돈의 지도 아래 박사논문<삼항쌍 이차형식에 대한 완전한 불변계에 관하여, on Complote System of lnvarianta for Ternary Brquadratic Porns>썼다. 1910년 고르돈이 퇴임하자 소거이론과 불변량 이론에 특히 관심을 가진 다른 대수학자 피셔(Ernst Fischer, 1875-1959)가 1년 후 그 자리를 계승하였다. |
뉴만(John von Neumann :1903-19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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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만은 게임이론이라는 유명한 수학의 한 분야를 발전시킨 미국의 수학자였다( 903 - 1957 ). |
뉴턴(Issac Newton :1642-17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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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은 갈릴레오가 죽은 해인 1642년 성탄절에 울즈돕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뉴턴이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농부였으며 그래서 그도 농사에 전념해야 했다. 그러나 어린 그는 기계 모형을 고안하는 것과 실험하는 것에 뛰어난 재능과 즐거움을 나타냈다. 그래서 생쥐의 힘으로 동력을 얻어 밀을 빻아 밀가루를 만드는 장난감 방앗간과 물의 힘으로 작동하는 나무시계를 만들었다. 그 결과 학교 교육을 더 받게 되어 18세 때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였다. 이 시기에 스타우브리지 박람회에서 우연히 산 점성술에 관한 책을 읽고 수학에 관심을 집중하게 되었다. 그는 유클리드의 <원론>을 읽었는데 그것이 너무 명백하다는 것을 알았고, 그러고 나서 데카르트의 <기하학 ,La geometrie>을 보았는데 다소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또한 오트레드의 <수학의 열쇠, Clavis>, 케플러와 비에트의 책, 그리고 월리스의 |
니코마코스 (Nikomachos :50-150?) |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아라비아의 게라사 출생. 신(新)피타고라스 학파이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산술서 《산술입문》을 저술하였다. 이 책에서 수론(數論)의 기초, 특히 수의 성질과 분류를 취급하고 있다. 중요한 것으로는, 세제곱수는 연속되는 모든 홀수의 합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법칙의 발견이 있다. 즉, |
다르부(Jean Gaston Darboux :1842-1917) |
프랑스의 수학자. 파리에서 공부하며 C.에르미트의 지도를 받았다. |
달랑베르(Jean Le Rond d Alembert :1717-1783) |
프랑스의 수학자·물리학자·철학자. |
데데킨트(Dedekind, Julius Wilhelm Richard :1831-1916) |
독일의 수학자. 괴팅겐대학교를 졸업하고, 여러 대학의 교수를 거쳐 브라운슈바이크고등기술학교에서 강의하였다. |
데자르그(Gerald Desargue :1593-1662) |
캐플러가 죽은 지 9년 후인 1639년에 대단히 독창성이지만 거의 주목받지 못했던 원추곡선에 관한 논문이 파리에서 발표되었다.그것은 공학자이며 건축가이고 한때 프랑스 육군 장교였으며 1593년에 리용에서 태어나 1662년경 그 논문은 다른 수학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채 잊혀졌고 모든 발행본들은 사라졌다.두 세기 후 프랑스 기하학자 샤슬레 (Michel Chasles, 1793-1880)가 지금까지 표준처럼 되어 있는 그의 기하학의 역사를 집필할 때, 데자르그의 논문의 가치를 평가할 방법이 없었다.그러나 6년 후인 1845년에 샤슬레는 데자르그의 제자인 라 이르(Philippe de la Hire, 1640-1718)에 의하여 |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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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1596년 루트(Tours) 근교에서 태어나서 여덟 살 때라 플레쉬에 있는 예수회 학교로 보내졌다. 바로 거기에서 (처음에는 몸이 약해서)그의 평생 습관이 된 아침에 늦게 까지 침대에 누워 있는 버릇이 길러졌다. 후에 데카르트는 아침 휴식중의 명상시간을 가장 생산적인 시간으로 여겼다. 1612년 데카르트는 학교를 떠나 곧장 파리로 가서 메르센과 미도르주와 더불어 얼마간 수학연구에 전념했다. 1617년 그는 오렌지공 모르스 왕자의 군대에 입대하여 몇 년간의 군생활을 시작했다. |
드 모르간(Augustus De Morgan :1806-18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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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 모르간은 1806년 마드라스에서 (한쪽 눈이 먼 상태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동인되 주식회사와 관련하고 있었다. 그는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공부했으며 수학 학위시험에서 4등으로 졸업한 후 1828년 새로 설립된 런던 대학교(후에 유니버시티 칼리지로 개명된)의 교수가 되었는데, 그곳에서 논문과 제자를 통하여 영국수학계에 큰 영항을 미쳤다.그는 철학과 수학사에 관한 책을 많이 탐독하고, 대수학의 기초, 미분학, 논리학, 확률론에 관한 논문을 썼다. 그는 매우 명쾌한 해설가였다.그의 재치있고 재미있는 책 <역설 모음집, A Budger of Paradoxes>은 여전히 재미 있는 읽을거리이다. 그는 집합론에서의 쌍대의 원리를 밝히면서 집합의 대수에 관한 부울의 연구를 계승하였는데, 소위 드 모르간 법칙이 이것의 한 예이다. |
드 무아브르(Abraham De Moivre :1667-1754) |
확률론에 기여한 사람들 가운데 중요한 한 사람이 1685년 낭트 칙령이 폐지된 후 보다 정치적 환경이 좋은 런던으로 이주한 프랑스 신교도인 드 무아브르(Abraham De Moivre, 1667-1754) 이다. 그는 영국에서 가정교사로 생활하였고 뉴턴과 친한 친구가 되었다. i=√-1 은 n이 자연수인 경우에 잘 알려진 드 무아브르 공식이다. 이 공식은 해석적 삼각법의 시금석이 되었다. 드 무아브르의 죽음에 관해 전해지는 재미있는 우화가 하나 있다. 이야기에 따르면 드 무아브르는 매일 전날보다 15분씩 더 자야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 등차수열이 24시간에 이르렀을 때 드 무아브르는 죽었다. |
드로비슈(Moritz Wilhelm Drobisch :1802-1896) |
독일의 철학자·수학자. 라이프치히 출생. |
디리클레(Peter Gustav Lejeunc Dirichlet :1805-18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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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클레는 1805년 뒤렌에서 태어났고, 브레슬라우와 베를린 교수직을 계속해서 역임했다. 1855년 가우스가 세상을 떠나자 가우스 후임으로 괴팅겐의 교수로 인명되었는데, 이것은 전에 가우스의 제자였고 평생 스승을 존경한 매우 재능 있는 수학자에 대한 알맞은 예우였다. 괴팅겐에 재직하는 동안 가우스의 미완성 연구를 끝내려 했으나, 1859년에 요절함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
디오판토스(Diophantus :3세기경) |
대수의 발전에서 대단히 중요하고 또 그 이후의 유럽 수론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준 사람이 바로 알렉산드리아의 디오판수스(Diophantus)이다. 헤론처럼 대오판투스도 그 출생시기와 장소가 분명하지 않다. 물론 그가 헤론과 동시대인일 것이라는 약간의 증거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그를 3세기경의 인물로 보는 경향이 있다. |
디외도네(Dieudonne, Jean :1906-) |
프랑스의 수학자. 릴 출생. |
딩글러(Hugo Dingler :1881-1954) |
독일의 철학자·수학자. 뮌헨 출생. |
라그랑쥬(Joseph Louis Lagrange :1736-18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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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는 이탈리아 튜린의, 전에는 부유했던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배경을 가진 가문에서 태었으며, 11명의 형제중 막내였고, 성년이 되도록 생존이 유일한 아이였다. 튜린에서 공부하고 젊은 나이에 그 곳 시관학교에서 수학 교수로 복무했다. 1766년 오일러가 베를린을 떠났을 때 프레더릭 대체가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 그의 궁정에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수학자'가 있기를 희망한다고 라그랑주에게 편지를 보냈다. 라그랑주는 그초청을 받아들여서 오일러가 혼란스러운 정치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라그랑주는 새로 설립된 에콜 노르말, 그 후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교수직을 수락했다. |
라마누잔(Srinivasa Ramanujan :1887-1920) |
인도의 수학자. |
라메(Lam? Gabriel :1795-1870) |
프랑스의 수학자·물리학자. |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rm Leibniz :1646-17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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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의 위대한 세계적 천재였으며 미적분법의 발명에서 뉴턴의 경쟁자였던 고트프리드 빌헬름 라이프니츠(Gottfried Wilberm Leibniz)는 1646년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독학하여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보통교과서를 다 공부하여 수학, 신학, 철학, 법학의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일반 특성, characteristica generalis> 의 첫번째 착상을 벌전시키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훗날 부울(George Boole, 1815-1864)의 기호 논리로 꼬츄피우고, 또 훨씬 후인 1910년에는 화이트헤드와 러셀의 <수학의 원리, Principia mathematica>를 꽃피운 뿌리가 되었다. |
라플라스(Pierre-Simon Laplacc :1749-18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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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플라스(Pierre-Simon Laplace)는 1749년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그는 수학적 능력이 뛰어나서 일찍이 좋은 교사직을 얻었고, 정치적인 기회주의자로서 프랑스 혁명의 불확실한 기간 동안 정권을 잡는 어떤 정당에라도 비위를 맞추었다. 그의 가장 뛰어난 업정은 천체역학, 활률론, 미분방정식, 측지학 분야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기념비적인 두 작품, <천체 역학론, Traite de mecenique Celeste>(5권 1799-1825)과 <활률의 해석적 이론, Theorie analytique des probailites> (1812)을 발표하였는데, 각각 해박한 비전문가적인 해설이 붙어 있다. |
란다우(Edmund Landau :1877-1938) |
독일의 수학자. 베를린 출생. |
람베르트(Jhoann Heinrich Lambert :1728-177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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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베르트(Jhoann Heinrich Lambert, 1728-1777)는 당시 스위스의 영토였던 뮐루즈(일사스)에서 태어났다. 람베르트는 매우 재능 있는 수학자였다. 가난한 재단사의 아들인 그는 대부분 독학으로 공부했다. 훌륭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결과들을 매우 주의를 기울여 엄밀하게 입증하였다. 사실상 람베르트는 π가 무리수인 것을 엄밀하게 증명한 최초의 수학자였다. |
램지(Frank Plumpton Ramsey :1903-1930) |
영국의 수학자·철학자. |
러셀(Be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197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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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집안의 자손인 러셀(Berrand Atrand Arthur William Russell)은 1872년 웨일즈의 트렐렉 근교에서 태어났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라니티 칼리지에서 공모 장학금을 받은 그는 수학과 철학에서 명성을 크게 떨쳤으며 공모 장학금을 받은 그는 수학과 철학에서 명성을 크게 떨쳤으며 화이트헤드 밑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주로 미국의 대학교에서 강의하였고 수학, 논리, 철학, 사회학, 교육학에 관한 책을 40권 이상 저술하였다.그는 실베스터, 드 모른간과 공동 수상한 영국학술원상 (1934), 메릿 훈장(1940), 노벨 문학상(1950)과 같은 많은 상을 수상하였다. |
레기오몬타누스(Regiomontanus :1436-1476) |
독일의 천문학자·수학자. 쾨니히스베르크 출생. |
레비치비타(Levi-Civita, Tullio :1873-1941) |
이탈리아의 수학자. 파도바 출생. 1898년 파도바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1918~38년 로마대학 교수를 지냈다. 무솔리니가 이탈리아의 대학교수에게 파시스트당 정부에 대한 선서를 요구하였지만 과학자로서의 양심 때문에 선서를 할 수 없다고 거부하였다. 스승인 리치와 함께 절대미분학(絶對微分學)을 창시하고 그 결과를 《절대미분학의 방법과 그 응용》(1900)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다. 유클리드공간에서의 평행의 정의를 리만공간으로 확장하였다. 텐서 해석(解析)은 리만기하학의 연구에 적절한 방법이고 아인슈타인에 의한 일반상대성이론, 그리고 중력장의 이론에도 사용되었다. |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 |
이탈리아의 화가· 조각가. 회화· 조각· 건축 외에 과학· 음악 등 다방면에 재능을 발휘하였다. |
레코드(Robert Recorde :약1510-1558) |
로버트 레코드는 산술책 이외에도 천문학, 기하학, 대수, 의학 등에 관한 많은 저술을 하였는데 그중 몇가지 저작은 분실되고 말았다. 1551년에 출간되 천문학에 관한 저서 <지식의 성, Castle of Knowledge>은 영국의 독자들에게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처음으로 소개한 책이었고 역시 같은 해에 출간된 <지식의 오솔길, Pathewaie to Knowleage>은 유클리드의 <원론>의 초록집이었다. 특히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은 1557년에 출간된<지혜의 숯돌, whestone of Wittle>이라는 이름이 붙은 대수책으로 이 책에서 처음으로 오늘날의 등식기호가 사용되어 있다 |
로바체프스키(Nicolai Ivanovitch Lobache :1792-18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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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바체프스키는 카잔 대학교에서, 대부분의 생애를 처음에는 학생으로서 후에는 수학 교수로서 마지막에는 학장으로 보냈고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관한 최초의 논문은 보야이의 논문이 인쇄되기 2,3년 전인 1829-1830년에 Kasan Bulletin 에 발표했다. 이 논문은 러시아에서는 거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러시아어로 쓰여졌기 때문에 실제로 다른 곳에서도 아무런 관심을 끌지 못했다. 로바체프스키는 이 최초의 논문을 다른 곳에 소개시키려 하였다.예를 들어 좀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려고 1840년 <평행 이론에 관한 기하학적 연구, Geoinetrische Untersuchungen zur Theorie der Parallellinien>라는 제목의 독일어로 소책자를 발간하고, 죽기 1년 전이며 장님이된 1년 후인 1855년에 <범기하학, Pangeometrie.이라는 제목의 프랑스어로 쓰여진 최종적이며 전선된 논문을 발간하였다. |
르장드르(Adrien-Marie Legendre :1752-18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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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장드르(Adrien-Marie Legendre, 1752-1833)는 많은 명제를 상당히 단순화하고 재정리 하여 유클리드의 <원론>을 교육적으로 개선하려 시도했던 매우 유명한 그의 책 <기하학의 원리, Elemen ts de geomerrie>로 기초 수학사에 이름이 알려졌다. 이 논문은 미국에서 매우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져서 금세기 기하학 교과서의 표준이 되었다. 실제로 1819년 하버드 대학교의 파라(Johe Parrar)가 르장드르의 기하학을 처음 영역하였다. |
리(Lee :1842-1899) |
노르웨이의 수학자. 노르드피오르데이드 출생. 크리스티아니아대학(현 오슬로대학)에서 수학한 후, 1869년 독일의 베를린으로 갔다. 그곳에서 F.클라인(1849∼1925)과 친교를 맺고 공동으로 수학연구를 하고 논문도 썼다. 그 후 71년 크리스티아니아대학으로부터 학위를 받고 이듬해에 이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
리만(Geoorg Friedrich Bernhard Riemann :1826-1866) | |
리만은 1826년 하노버의 조그만 마을에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수줍음이 많고 허약했다. 그는 아버지의 검소하ㅈ 환경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대학과 괴팅겐 대학에서 좋은 교육을 받았다. 그는 후자의 학교에서 복소함수론 분야의 뛰어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
매클로린(Colin Maclaurin :1698-17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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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클로린은 기하학 특히 고차원 곡선에 관하여 매우 유명한 논문을 썼으며, 고전 기하학을 물리 문제들에 응용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
메나이크모스(Menaechmus :BC380-BC320) |
BC 4세기 후반에 활약한 그리스의 수학자. |
메넬라우스(Menellaus :) |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천문학자·물리학자. |
몽주(Gaspard Monge :1746-18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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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주는 그가 태어난 도시인 본(Beaunne )에 있는 오라토리오외의 대학에서, 또 16세에 물리학 강사가 되었던, 리용에 있는 그들의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고향의 대규모 지도를 정교하게 만든 덕분에 메지엘에 있는 병학교에 제도공으로 취직하게 되었다. 공급된 자료로부터, 계획된 요새의 포 위치를 찾아내라는 요청을 받고 몽주는 당시의 길고 지루한 산술적 과정을 빠른 기하학적 방법을 매체하였다. 3차원 물체를 2차원 평면에 적절히 사용하여 현명하게 표현한 것 중의 하나인 그의 방법은 군에서 채택하여 일급비밀로 분류하였다. 후에 그것은 화법기하학(iescriptive geometry) 으로 널리 가르쳐졌다. 몽주는 1768년 메지엘의 수학 교수, 1771년에 물리학 교수가 되었으며 1780년에는 파리 학원의 수리학 교수에 임명되었다. |
뫼비우스(August Ferdinand Mobius :1790-1868) |
뫼비우스 띠는 1865년 발견된 이래로 전문가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매력적인 관심사가 되어 왔다. |
민코프스키(Minkowski :1864-1909) |
독일에서 활동한 러시아 출신의 수학자. |
바이어 슈트라스(K.T.W. Weierstrass :1815-18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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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시절을 법학과 경제학의 공부로 보내 방향을 잘못 잡은 바이어슈트라스는 늦게 수학공부를 시작하였고, 4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베를린 대학교의 강사직을 얻어 중.고등학교 수업에서 벗어났으며, 1864년 그 대학교의 전암교수가 되어 마침내 모든 시간을 고등학교 수학에 전념할 수 있기까지는 또 8년이 걸렸다. 바이어 슈트라스는 중등교육에 바쳤던 세월을 전혀 후회하지 않았고, 후에 대학교 재직시 뛰어난 교수 능력을 발휘하여 이제까지 알려진 고등수학의 가장 훌륭한 강의자가 되었다. |
배로(Isaac Barrow :1603-16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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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로는 케임브리지에서 교육을 마쳤으며 그리스어에 가장 능숙한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수학, 물리, 천문학, 신학에 걸쳐 두루 인정을 받은 매우 학구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육체적 강인성, 용감성, 반짝이는 재치와 꼼꼼한 성실성에 대한 재미있는 얘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그는 케임브리지에서 루카스 교수직에 임명된 최초의 사람이었는데 1669년 위대한 제자 뉴턴을 위해 관대하게 이 자리를 사임했다. 그는 1677년 케임브리지에서 일생을 마쳤다. |
베비지(Charles Babbage :1791-1871) |
그는 현대의 전자 컴퓨터를 내다보았던, 원칙적으로는 공학적 계산 기계를 고안하고 만들어 냈던 영국의 수학자이자 발명가였다. |
보야이(Janos Bolyai :1802-18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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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야이는 1832년 아버지의 수학책 부록에 그의 발견을 발표했다. 후에 로바체프스키가 1829-1830년경에 비슷한 발견을 발표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지만 언어의 장애와 새로운 발견에 대한 정보의 전파가 느렸기 때문에 로바체프스키의 논문이 서유럽에 알려지는 데는 몇 년이 걸렸다. |
볼테라(Volterra, Vito :1860-1940) |
이탈리아의 수학자·물리학자. 안코나 출생. |
부울(George Boole :1815-18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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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울은 1815년 영국의 링컨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하찮은 소매 상인이었고, 따라서 부울은 단지 국민학교 교육만을 받았으나 독학으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익혔다. 후에 국민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는 동안에 라플라스와 라그랑주의 저서를 통하여 형식 논리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1847년에 부울은 <놀리와 수학적 해석, The mathematical Analysis of Logie>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발간하였는데, 드 모르간은 이것을 획기적인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
뷔르기(Brgi, Jobst :1552-1632) |
스위스의 수학자·천문학자. 라틴어로는 Justus Byrgius이다. |
브라마굽타(Brahmagupta :7세기경) |
브라마굽타는 7세기의 가장 뛰어난 인도 수학자로서 중앙 인도에 있는 우자인(Ujjain)의 천문대에서 일하였다. |
브래드워딘(Thomas Bradwardine :1290-1349) |
영국의 신학자·수학자. 캔터베리 대주교(1348), 에드워드 3세의 교계사(敎誡師) 등을 역임하였으며, 펠라기우스 주의에 대하여 반대입장을 취한 것으로 유명하다. |
브로워(Luitzen Egbertus Jan Brouwer :1881~1966) |
수학의 직관주의적 견해의 지도자이며 불굴의 옹호자였던 브로워는 수학의 다름 분야에서도 명성을 남겼다. |
비에트(Francois Viete :1540-16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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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의 가장 위대한 프랑스 수학자는 프랑수아 비에트(Francois Viete)로서 흔히 그를 라틴어 이름인 비에타(Vieta)라고도 부르는데 그는 고등법원 판사로 일하면서 대부분의 여가시간을 수학에 몰두했다. 그는 1540년에 퐁테네(Fontenay)에서 태어나서 1603년에 파리에서 죽었다. |
사케리(Saccheri, Girolamo :1667-1733) |
이탈리아의 수학자. |
소피제르맹(Marie-Sophie Germain :1776-1831) |
1776년 4월 1일 파리에서 부호의 딸로 탄생하여, 어려서부터 정규교육을 받았으며, 그녀가 13살 되던 해 우연히도 아버지의 서고에서 수학사에 관한 서적을 읽던 중 아르키메데스의 죽음에 관한 일화를 읽고, 수학이라는 학문의 연구가 한 인간에게, 죽음에 대한 공포마저 잊게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크게 감탄하였다. |
쉬케(Chuquet, Nicolas :?~?) |
프랑스의 수학자. 파리 출생. |
슈타이너(Jacob Steiner :1796-18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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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영기하학에서의 퐁슬레의 착상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가장 위대한 종합기하학자 중의 한 사람인, 스위자 기하학자 슈타이너가 보다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슈타이너는 1796년 우첸스드르프에서 태어났고, 14세가 되도록 교육을 받지 못해서 글자 하나 제대로 쓰지 못했다. 17세 때 그는 유명한 스위스 교육자 페스탈로치(Johann Heinrich Pestalozzi, 1746-1827)제자가 되었는데, 이때부터 수학에 대한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 후 1818년에 슈타이너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입학하여 수학적 재능을 발휘하였다. 1821년 베를린으로 가서 가정교사를 시작하고 곧이어 공업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그의 이름은 새로 설립된 크렐레 저널에 투고한 논문을 통하여 잘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와 아벨이 그 잡지의 전도적인 기고자였다. |
스테빈(Stevin, Simon :1548-1620) |
네덜란드의 수학자·물리학자·기술자. |
실베스터(Jamcs Joseph Sylvester :1814-18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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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조지프 실베스터는 1814년 런던에서 여러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가족의 성은 원래 조지프였으나 장손이 미국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성 실베스터를 사칭하여 나머지 가족도 그것을 받아 들였다. 미국에 살던 그의 형은 보험계리사였는데, 미국의 복권청부업회 이사에게 그들이 골치를 석이는 복급조절에 관한 어려운 문제를겨우 16세인 동생 제임스에게 의뢰하기를 제안하였다. 실베스터의 완벽하고 만족스러운 문제 해법에 감탄한 이사는 젊은 수학자에게 상금으로 500달러를 주었다. |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287-212 B.C.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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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수학자 중의 한 사람이며 또 가장 위대한 고대인이었던 아르키메데스(Archimedes)는 기원전 287년경 시칠리아 섬에 있던 옛 그리스 도시 시러큐스(Syracuse) 에서 천문학자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로마가 시러큐스를 정복한 가원전 212년에 죽었다. 그는 평소에 시러큐스의 히에론(Hieron)왕의 깊은 총애를 받았다.(어쩌면 두 사람 사이에 어떤 특별한 관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 그가 코논(Conon), 도시테우스(Dositheus), 에라토스테네스(Eratosthenes) 등과 교분을 가졌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앞의 두 사람은 유클리드 후계자들이고 마지막 사람은 알렉산드리아 대학의 사서였는데, 아르키메데스의 많은 연구결과가 이들과의 편지 속에서 발견되었다), 그는 아마도 이집트에 건너가 알렉산드리아 대학에서 공부했던 것 같다. 로마의 역사학자들은 아르키메데스에 관한 많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특히 로마 장군 마르켈루스(Marcellus)가 시러큐스를 공격했을 때 아르키메데스가 시러큐스의 방어를 위하여 고안한 여러 가지 훌흉한 장치에 대한 설명이 있다. 그런 것 중에는 저의 배가 도시 성곽에 가까이 접근했을 때 그 배에 무거운 돌을 떨어뜨릴 수 있는 투석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사정거리를 조정할 수도 있고 이동 발사장치도 갖고 있었다. 또 그는 적의 배를 물에서 끌어올리게 할 수 있는 기중기도 만들었으며 적의 배를 불태우기 위해 커다란 볼록렌즈를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편 많은 사람들이 달라붙어야 간신히 끌어올릴 수 있는 커다란 배를 그는 합성 도르래장치를 이용하여 혼자서 간단히 끌어올린 다음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한다. "나에게 서 있을 자리를 다오. 그러면 지구를 움직여 보일 것이다.!" |
아마다르(Jacques Salomon Hadamard :1865-1963) |
프랑스의 수학자. |
아벨(Niels Henrik Abel :1802-18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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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은 1802년 노르웨이의 핀도(Findo)에서 시골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크리스티애니어(Christiania:노르웨이의 수도)에 있는 학교에 다닐때, 일반 5차 방정식의 대수적해법을 발견했다고 생각했으나 곧 1824년 발표한 유명한 소논문에서 스스로 정정하였다. 이 초기의 논문에서 일반 5차방정식은 대수적으로 해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으며, 이것이 봄벨리(Bombelli)로 부터 비에트에 이르는 수학자들을 난처하게 했던 어려운 문제를 해결 하였다.이 논문의 결과로 아벨은 작은 장학금을 받았고,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로의 여행이 허용되었다. 이 여행을 다니는 동안에 무한급수의 수렴, 소위 아벨적분, 타원함수 등 여러 분야에 관한 수많은 논문을 썼다. |
아이젠슈타인(Ferdinand Gotthold Max Eisenstein :1823-1852) |
독일의 수학자. 베를린 출생. |
아폴로니우스(Appolonius :262-190 B.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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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키메데스보다 약 25세쯤 아래인 아폴로니우스(Appolonius)는 기우너전 262년경에 남부 소아시아 지방에 있는 페르가(Peraa)에서 태어났다. 아폴로니우스의 일생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젊었을 때는 알렉산드리아에 유학해서 유클리드의 후계자로부터 배웠고 오랜 동안 그 곳에 남아 있었다. 나중에 서부 소아시아 지바에 있는 페르가뭄(Pergamum)을 방문했는데 그 곳에는 알렉산드리아 대학 이후 가장 최근에 세워진 대학과 도서관이 있었다. 나중에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왔고, 기원전 190년경 그 곳에서 죽었다. |
알콰리즈미(Al-Khwarizmi :780-846) |
알· 콰리즈미는 아라비아의 수학자로서 자세한 그의 이름은 무하마드·이븐· 무사· 알·콰리즈미이다. |
야곱 베르누이(Jakob Bernoulli :1654-17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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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 베르누이는 변분법을 연구한 최초의 수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또한 수학적 확률을 최초로 공부한 수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이 분야에 관한 책인 <추측술, Ars conjectandi>은 그가 죽은 후인 1713년에 발간되었다. 현재 야곱 베르누이의 이름을 지닌 수학적 내용들이 여러 개 있다. 이들 중에는 통계학과 확률론의 '베르누이 분포'와 '베르누이 정리'미분방정식의 첫 학기 강의에서 마주치는 '베르누이 방정식' 정수론의 '베르누이 수'와 '베르누이 다항식' 그리고 미적분학의 첫 학기 강의에 나오는 '베르누이의 연주형'(lemniscate) 등이 있다. 1690년 <학술기요, Acta eruditorum>에 발표된 등속상하고선 문제에 대한 야곱 베르누이의 풀이에서 최초로 '적분'(integral)이란 단어가 나온다. 라이프니츠는 적분을 '합분법'(calculus sumrnatorius)이라 불렀는데, 1696년 라이프니츠와 요한 베르누이는 그것을 '적분법'(calcutus integralis)이라 부르기로 동의했다. 야곱 베르누이는 등각나선이 다양한 변화하에서도 그 자체를 재생성하는 것에 영향을 받아 아르키메데스를 모방하여 그의 묘비에 이 나선을 "Eadern mutata resurgo"(나는 변하지만 똑같이 일어설 것이다)라는 비문과 함께 새기기를 요청했다. |
야코비(Carl Gustav Jacobi :1804-18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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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코비는 1804년 포츠담에서 유태인 부모 밑에 태어나 베를린 대학에서 공부하였으며, 그 곳에서 1825년에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2년 후 쾨니히스베르크의 임시 수학 교수에 임명되었고, 2년후 수학과 일반 교수로 진급하였다. 1842년 프러시아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고 쾨니히스베르크의 교수직을 사임하고 베를린으로 가서 1851년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
에라토스테네스(Eratosthenes :BC 273?-BC 192?) |
에라토스테네스(Eratosthenes)는 지중해의 남쪽 연안에 있는 키레네(Cyrene)에서 태어났으며 나이는 아르키메데스보다 몇 살쯤 아래였다.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아테네에서 보내고 약 40세쯤 되었을 때 이집트의 톨레미 3세의 초청으로 알렉산드리아로 와서 그의 아들의 개인교수로 일했고 또 알렉산드리아 대학의 도서관장을 지내기도 했다. 기원전 194년경 노인이 되었을 때 눈병 때문에 거의 장님이 되다시피하여, 결국 스스로 단식하여 자살하고 말았다. |
에르미트(Charles Hermite :1822-1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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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학과 해석학 모두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유능한 프랑스 수학자 에르미트(Charles Hermite)는 캐일리와 실베스터의 연구의 대부분을 계승하고 확장시켰다. 에르미트는 1822년 로렌의 디오제에서 태어나고, 처음에는 루이-르-그랑 중·고등학교에서, 후에는 잠시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공부하는 등 일정하지 않은 교육을 받은 후, 1848년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입학시험관이며 퀴즈 선생이 되었다. 그는 에콜 폴리테크니크 및 소르본에서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1897년 정년 때까지 소르본에 있었다. 그는 1901년 파리에서 죽었다. |
에우독소스(Eudoxos of Cnidos :BC408?-BC355?) |
그리스의 수학자· 천문학자. |
오렘(Nicole Oresme :1323-1382) |
오렘은 1323년경에 노르망디에 태어나서 수학 교수직을 맡다가 주교직을 수행한 뒤인 1382년에 죽었다. |
오일러(Leonhard Euler :1707-19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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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러는 1707년 스위스의 바젤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신학 분야로 발을 디뎠지만 진짜 적성은 수학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수학에 흥미를 가졌던 칼뱅교의 목사인 아버지는 그에게 수학의 기초를 가르쳐 주었다. 아버지는 야곱 베르누이 밑에서 수학을 공부했었지에 아들은 요한 베르 누이 밑에서 공부하기로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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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트레드(William Oughtred :1574-1660) |
오트레드는 저술을 통하여 150여 가지 수학 기호들을 제시하고, 또 그것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들 중 세 가지만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데, 그것을 곱셈기호[X]와 비에서 자주 사용되는 4점[::] 그리고 두 수 사이의 차를 나타내는 데 자주 사용되는 기호 [~]이다. 그러나 가위표는 곱셈기호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라이프니츠가 제기했듯이 그것은 알파벳의 X와 너무 비슷하기 때문이다. 해리엇은 곱셈기호로 점 [·]을 때때로 사용했지만 라이프니츠가 이 기호를 채댁하기 전까지는 별로 사용되지 않았다. 라이프니츠는 또한 곱셈기호로 모자모양 기호[∩]를 사용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집합론에서 교집합을 나타낸다. 나눗셈기호[÷]도 역시 1659년에 스위스의 란(Johann Heinrich Rahn, 1622-1672)에 의해 쓰여진 대수책에 인쇄되어 처므ㅇ로 나타나면서 17세기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몇 년 후 이 책이 번역되면서 기호가 알려지게 되었다. 이 나눗셈 기호는 유럽대륙에서는 뺄셈을 나타내는 것으로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기하학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닮음기호(~), 함동기호(=)는 라이프니츠가 만들었다. 오트레드는 단순 계산자를 일찍이 1622년경에 만들었으나 1632년에야 비로소 책으로 발간 하였다. |
요한 베르누이(Johann Bernoulli :1667-17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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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베르누이는 그의 형 야곱보다도 더 수학에 풍부한 기여를 한 사람이다. 그는 비록 질투심이 많고 심술궂은 사람이기는 했지만 그 시대에서 가장 성공한 선생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미적분학을 많이 보충하였고 유럽 대륙에서 이 새 분야의 유용성을 인정하게 만드는 데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로피탈(de PHospital, 1661-17040) 후작이 요한의 면밀한 재정적 동의 아래 1696년 최초의 미적분학 교재를 만든 것 은 바로 그의 자료였다. 잘 알려진 0/0꼴의 부정형의 계산법이 후에 미적분학 책에서 로피탈의 정리(PHospiral's rule)로 잘못 알려지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였다. |
월리스(John Wallis :1616-17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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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6년 태어난 월리스는 그 시대의 가장 유능하고 독창적인 수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여러 분야에 걸쳐 다작의 명석한 필자였고 농아자를 가르치기 위한 제도를 처음으로 고안한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전해진다. 그는 오트레드의 제자였고 1649년에 옥스퍼드에서 기하학의 새빌리아 교수로 임명되었는데 1703년 타계할 때까지 54년 동안 봉직했다. 해석학에의 연구는 위대한 동시대인인 뉴턴의 연구를 준비하는 데 크나큰 공헌을 했다. 월리스는 원추곡선을 원뿔의 단면으로서보다는 2차곡선으로서 검토한 최초의 인물이다. |
유클리드(Euclid :BC450-BC3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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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클리드(Euclid)의 생애와 인격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는데, 다만 확실한 것은 알렉산드리아 대학의 수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또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수학학교의 설립자였다는 사실이다. 유클리드의 이 알렉산드리아 수학학교는 상당히 오랫동안 존속되었다. 비록 그가 태어난 시기와 장소는 분명하지 않아도 아마도 아데네의 플라톤 학교에서 수학을 배운 것처럼 보인다. 파푸스(Pappus)는 유클리드와 아폴로니우스(Apolonius)를 비교하면서 아폴로니우스를 혹평한 반면에 유클리드 매우 겸손하다고 추겨세우며 그 밖의 여러 가지 면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
유휘(You Hwe :) |
중국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수학자. |
이순지(Lee Soon Ji :1406-1465) |
조선 시대 세종 때 과학 기술이 크게 발달했다. 세종은 과학의 기초로 수학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
제논(Zenon of Elea :BC495?~BC4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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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양을 무한히 쪼갤 수 있거나 또는 그것이 매우 많은 개수의 쪼갤 수 없는 극소량들의 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할 수 있을까? 첫번째 가정은 그냥 받아들일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떤 것을 발견하는데 두 번째 가정을 이용할 때는 자칫 어떤 불합리성을 놓칠 가능성이 있다. 고대 그리스의 수학 학교들이 위의 두 가정을 이용하는 것을 발달시켰다는 증거가 있다. |
조르당(Jordan, Marie Ennemond Camille :1838-1922) |
프랑스의 수학자. 리옹 출생. |
최규동(Cho Kyou Dong :) |
일제 시대 때 이야기이다. |
카르노(Lazare Carnot :1753-18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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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노(Lazare Niclas Marquerite Carnot)는 많은 프랑스 부유층의 자식들처럼 군인이 되려고 준비하여 메지엑 병학교에 들어가 몽주 밑에서 공부하다가 1783년 공병대 대위가 되었다. |
카르다노(Girolamod Cardano :1501-15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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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다노는 수학사에서 가장 기묘한 성격의 인물이다. 그는 1501년에 파비아(Pavia)에서 변호사의 사생아로 태어나서 열정적인 이중성격의 소유자로 성장하였다. 그는 의사로서 파란만장한 직업활동을 시작하여 개업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수학을 공부하고 가르치고 저술까지 하였다. 그는 스코틀랜드까지 여행을 하였으며 이탈리아로 돌아온 후에는 계속적으로 파비아와 볼로냐에 있는 대학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그는 또 예수의 생애에 대한 별점을 발표하여 이교도로 물리는 바람에 감옥살이도 하였다. |
카발리에리(Bonaventura Cavalieri :1598-16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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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발리에리는 1598년 밀라노에서 태어나 15세에 (흔히 잘못 표현되듯이 예수회 수사(Jesuit)가 아니고) 수도회의 수도사(Jesuat)가 되었고 갈릴레오 아래서 공부하였으며 1629년부터 1647년 49세의 일기로 생을 마칠 때까지 볼로냐 대학교에서 수학교수로 봉직하였다. |
칸토어(Georg Ferdinand Ludwig Philip Cantor :1845-19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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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토어는 1845년 러시아의 성 페테르부르크에서 덴마크인 부모 밑에서 태어나서 1856년에 부모와 함께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로 이주하였다. 아버지는 신교로 개종한 유태인이었고, 어머니는 태어날 때부터 카톨릭 신자였다. 그 아들은 중세신학, 연속성과 무한에 관한 복잡한 논쟁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 결과, 그는 공업 기술사가 되라는 아버지의 제안을 철학, 물리, 수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포기하고 취리히, 괴팅겐, 베를린(이 곳에서 바이어슈트라스의 영향을 받았고, 1867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교에서 공부하다가 1869년부터 1905년까지 할레 대학에서 오랫동안 강의하다가 1918년 할레에 있는 정신병원에서 죽었다. |
케일리(Arthur Cayley :1821-18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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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일리는 1821년 서리 주의 리치몬드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하여 1842년 수학 졸업시험에서 수석으로서 졸업하고, 같은 해 보다 어려운 스미스 상의 수상자를 가리는 시험에서도 1등을 차지하였다. 여러 해 동안 변호사 일이 수학 연구에 방해되지 않도록 항상 조심하면서 법률 공부를 하고 변호사 일을 하였다. 법률 공부를 하는 동안에 더블린으로 가서 해밀턴의 사원수 상의를 수강하였다. 1863년에 케임브리지에 새들러 교수직이 설치되었을 때 그 직을 요청받고 수학하였으며, 법률가로서의 화려한 미래를 포기하고 수수한 학문적 생을 택하였다. 그 결과 모든 시간을 수학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
케플러(Johann Kepler :1571-16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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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플러는 1571년 슈투트가르트 근교에서 태어났고 원래 루터교의 목사가 되려고 튀빙겐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천문학에 깊은 관심을 가져 계획을 변경하게 되었으며 20대 초반인 1594년 오스트리아 그래츠 대학교의 강사로 임명되었다. 1599년에 케플러는 유명하나 싸우기 좋아하는 덴마크계 스웨덴 천문학자 브라헤(Tycho Brache)의 조수가 되었는데, 브라헤는 루돌프 2세 황제의 왕실 천문학자로 임명되어 프라하로 이주했다. |
코발레프스키(Sonja Kovalevsky :1850-18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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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소냐 코발레프스키(Senja Kovalevsky>로 알려진 소피아 코르빈 크루코프스키(Senja Korvin-Kovalevsky)는1850년 모스크바의 터시아 귀족 가문에서 티어났다. 그녀는 17세 때 성 페테르부르크에 가서 그 곳 해운학교 선생과 미적분학을 공부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러시아에서 대학교 진학이 금지되자, 부모의 해외유학 반대를 벗어나기 위하여 마음이 맞는 (후에 저명한 고생물학자가 된)불라디미르 코발레프스키와 이름뿐인 결혼을 했다. 1868년 견혼하여 그 이듬해 봄에 부부는 하이델베르크로 갔다. |
코시(Augustin-Louis Cauchy :1789-18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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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시는 1789년 파리에서 태어나서, 초기의 교육은 아버지로부터 받았다. 후에 판테온의 에콜 상트랄(Ecole Centrale, 국립공업고등학교)에서는 고전 연구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1805녀에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입학하여 라그랑주와 라플라스의 칭찬을 독차지하였다. 2년 후 토목학교(Ecole des Ponts et Chaussees)에 입학하여 토목기사가 될 준비를 하였다. 라그랑주와 라플라스의 설득으로 토목공학을 포기하고 순수과학을 택하기로 결심하고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강사직을 수락하였다. |
코페르니쿠스(Nicolas Copernicus :1473-15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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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이 오랜 동안 수학의 발전에 기여해왔다. 사실 한때는 '수학자'하는 이름이 천문학자를 의미하기도 했다. 수학에 공헌한 천문학자 중에 가장 빼어난 인물은 폴란드의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였다. 그는 크라쿠프(Cracow)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고 파두아(Padua)와 볼로냐에서 법학, 의학, 천문학 등을 연구했다. 우주에 관한 그의 이론은 1530년에 완성되었지만 그가 죽은 1543년까지도 발표되지 못했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연구 결과는 삼각법의 개선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고 코페르니쿠스 자신도 삼각법에 관한 논문을 썼다. |
쿠머(Kummer, Ernst Eduard :1810-1893) |
독일의 수학자. 폴란드의 조라우 출생. 어렸을 때 부모를 잃고, 빈곤 속에서 자랐다. |
클라인(Felix Klein :1849-19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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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인은 1872년 에를랑겐 대학교의 철학교수와 평의원에 임명되자, 관례에 따라 전공분야에 관한 취임강연을 했다. 자신과 리이(Sophus Lie,1842-1899)의 군론에 관한 연구에 기초를 둔 이 강연에서, 당시 존재하던 모든 기하학을 본질적으로 성문화하는 데 기여하였고, 기하학 연구의 새롭고 효과적인 대도에 이르는 방법을 지적한 '기하학'의 유명한 정의를 발표하였다. 이 강연과 여기서 주장하는 기하학 연구 계획은 에를랑겐 프로그램(Erlangen Programm)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것은 군론이 거의 모든 수학 영역에 파고 들고 약간의 수학자들이 모든 수학은 군론의 어떤 국면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을 때 옳다고 여겨졌다. |
클레로(Clairaut(Clairault), Alexis Claude :1713-17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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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로(Aiexis Claude Clairaur)는 1713년 파리에서 태어나서 1765년 그 곳에서 죽었다. 그는 11세 때 3차원 곡선에 관한 논문을 쓸 만큼 젊은 수학 천재였다. 이 논문과 공간상에서 꼬인 곳서느이 미분가하학에 관한 후속 논문으로 인해 18세의 비합법적인 나이에 프랑스 과학원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1736년 그는 모페르튀(Merre Louis Moreau de Mauperruis, 1698-1759)와 함께 지구의 자오선 중의 하나에 대한 1도의 길이를 재기 위하여 랩랜드로 탐험을 떠났다. 이 탐험은 지구 모양에 관한 논쟁을 수습할 책임을 지고 있었다. 뉴턴과 호이겐스는 수학적 이론르로부터 지구는 극부분에서 평평해져 있다고 결론을 내린 바 있다. |
타르탈리아(Tartaglia Nicolo Fontana :1499-15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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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르탈리아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1499년에 브레시아에서 가난한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512년에 브레시아가 프랑스의 침략을 받았을 때 그 곳에서 지내고 있었다. 이 침략과 더불어 만행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 타르탈리아와 아버지(당시에 브레시아에서 우편배달부를 했다)는 신변의 안전을 위하여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성당으로 피신하였으나 병사들이 끝까지 그들을 쫓아들어와 대학살극을 벌였다. |
탈레스(Thales :BC 624?-BC 5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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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스는 젊은 시절에는 상인으로서 돈을 많이 벌었지만 그 이후에는 연구와 여행으로 여생을 보낸 듯하다. 한때 그는 이집트에도 머문 적이 있으며 그 곳에서 그림자를 이용하여 피라미드의 높이를 계산하여 주위의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밀레투스로 돌아온 그는 다방면의 천재성에 의하여 정치가, 고문, 공학자, 실업가, 철학자, 수학자, 천문학자로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탈레스는 수학적 발견과 관련되어 알려진 최초의 인물이다. 기하학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기본결과들을 밝혔다. |
테일러(Brook Taylor :1685-17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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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적분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매우 유용한 함수의 케일러 전개와 매클로린 전개을 통하여 영국의 수학자 테일러(Brook Taylor. 1685-1731)와 스코틀랜드 수학 매크로린(Colin Maclaurin, 1698-1746)의 이름을 잘 알고 있다. 테일러가 (수령성의 고찰 없이)잘 알려진 전개 정리를 발표한 때가 1715년이다. |
튜링(Turing, Alan Mathison :1912~1954) |
영국의 수학자·물리학자. 런던 출생. |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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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은 1623년 프랑스의 오베르뉴 지방에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수학에 비상한 능력을 보였다. 그가 젊었을 때의 여러 이야기들이 후에 페리에 부인이 된 누이 질베르트에 의해 전해지고 있다. 그는 허약한 체질 때문에 과로하지 않도록 집에만 갇혀 있었다. 아버지는 아이들 교육은 처음에는 언어 공부에 한하여야 하며, 어떠한 수학도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고 결정하였다. 학습에서 수학을 배제시킨 것이 오히려 소년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가정교사에게 기하학의 특성에 관하여 질문을 하도록 했다. 가정교사는 그것은 정밀한 도형과 그것의 다른 부분의 성질을 공부하는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
파치올리(Luca Pacioli, :1445-1509) |
1494년에 이탈리아의 수도사 파치올리의 <산술 기하 비 및 비례요약집, Summa de arithmetica,geometrica, proportioni er proportionalita>의 제 1판이 출간되었는데 혼히 이 책을 간단히 <요약집, Suma>이라고 부른다. 이 저작은 당시의 산술, 대수, 기하에 관한 요약집을 만들기 위해 많은 원전으로부터 자유롭게 편집된 것이다. 이 <요약집>에는 피보나치의<산반서>에 나오는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거의 없지만 훌륭한 표기를 이용하고 있다는 데 특징이 있다. |
파푸스(Pappus :) |
파푸스는 유클리드의 <원론>, <자료론> 및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 <평면천체도, Planispherium> 등에 대한 주석을 썼으며 이는 그 후의 주석가들의 저작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파푸스가 실제로 쓴 거작인 <수학집성,Mathematical Collection>은 당시까지 알려져 있던 기하학의 연구에 대한 주석 및 안내서로서 많은 독창적인 명제, 개정, 확장, 역사적 내용 등이 실려 있다. 모두 여덟 권으로 된 이 저작에서 제I권과 III권의 일부가 분실되고 말았다. |
페르마(Fermat, Pierre de :1601-1665) |
어떤 사람이 "나의 취미는 수학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를 다시 한 번 쳐다 볼 것이다. 수학이란 어렵고 따분한 학문이라고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
페아노(Peano, Giuseppe :1858-1932) |
이탈리아의 수학자· 논리학자. |
퐁슬레(Jean Victor Poncelet :1788-18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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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슬레는 1788년 메츠에서 태어나서 그 곳의 리세(프랑스의 대학 예비교)에 다닌 후 1807년부터 1810년까지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등록하여 몽주 밑에서 공부하였다. 메츠 사관학교에서 학생으로 정식 교육을 마친 후 1812년 공병 중위로 군에 입대하여 나폴레옹의 치명적인 러시아 원정에 종군하였다. 퐁슬레는 모스크바에서 프랑스로 후퇴할 때 클랄스노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버려진 채 포로로 붙잡혀 거의 5개월이나 끌려다니다가 볼가 강 근처의 사라토프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
푸리에(Jean Baptiste Joseph Fourier :1768-18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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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리에는 1768년 오세르(Auxerre)에서 태어나서, 1830년 파리 에서 죽었다. 1830년 파리에서 죽었다. 재단사의 아들인 그는 여덟 살 때 고아가 되었고, 베네딕트회사가 운영하는 군사학 교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후에 여기에서 수학 강사를 하였다. 그는 프랑스 혁명을 촉진 시키는 데 일조를 하였으며 이 공로 로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교수가 되었다. 그는 몽주와 함께 나 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을 수행하기 위하여 이 직을 사임하였다. 1789년에 그는 이집트(Lower Egypt) 지역의 총독에 임명되었 다. 1801년 영국이 승리하고 프랑스가 항복함에 따라 푸리에 는 프랑스로 돌아와서 그르노블(Grrenoble)의 지사가 되었다. |
푸아송(Simeon Denis Poisson :1781-18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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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아송은 1781년 피티비에(Pithiviers)에서 태어나 1840년 파리에서 죽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교육을 받았으며 친척들은 어린 푸아송에게 본인의 희망과는 동떨어진 의학을 공부하도록 강요하였다. 어린 푸아송의 교육은 삼촌이 맡았는데, 그는 란셋으로 양배추잎의 옆맥을 찌르는 것부터 시켰다. 그는 이 일에 완벽하게 숙달되고 나서 물집을 따는 자격을 받았다. 그러나 혼자 이 일을 하게 된 첫 수술에서 환자가 수시간 만에 죽었다. 의사들이 그런 일은 매우 흔하다고 위로했지만 더 이상 이 직업에 종사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
푸앵카레(Jules Henri Poincare :1854-19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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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그의 시대에서 가장 뛰언난 수학자로 알려진 앙리 푸앵카레는 1854년 프랑스의 낭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제 1차 세계대전 동안 프랑스 공화정의 대통령을 지낸 유명한 정치가 레이몽 푸앵카레의 사촌이었다. 1875년 에콜 폴리테크니크를 졸업한 후 앙리는 1879년 광산학교에서 채광기사 자격을 취득하였으며, 같은 해에 파리 대학교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광산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는 카엥 대학교의 강사로 임명되었으나, 2년 후 파리 대학교로 옮겨 1912년 죽을 때까지 수학과 과학의 여러 교수직을 가졌다. |
프레게(Friedrich Ludwig Gottlob Frege :1848~1925) |
독일의 논리학자·수학자·철학자. 메클렌부르크슈베린 출생. |
프톨레마이오스(PTOLEMY, C. :85-16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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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에 관한 뛰어난 그리스 저작은 150년경에 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쓰여졌다. <수학대계, Syntaxis mathematica>라고 불리는 이 논문은 후대에 대단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서 히파르쿠스의 저작 위에 기초하고 있으며 치밀함과 우아함에서 매우 놀라운 작품이다. 후대의 주석가들은 이 논문을 천문학에 관한 그 밖의 다른 논문과 구분시키기 위해서 그것에 가장 '위대한'(그리스어로 'magiste')이라는 최고의 형용사를 갖다 붙였다. |
플라톤(Platon :B.C.428~347) |
그는 아테네에서 귀족 가문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
피보나치(Leonardo Fibonacci :1170?-12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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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사(Pisa)의 레오나르도라고도 알려진 피보나치는 피사의 상업 중심지에서 태어났으며 어버지는 상업과 관련된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의 큰 상인들은 지중해 연안의 여러 곳에 상점을 두고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관세 관리인으로 아프리카의 북부 연안에 위치한 보기(Bougie)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어린 레오나르도는 그 곳에서 교육을 받게 되었다.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소년시절부터 일찍이 산술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으며 이후 이집트, 시칠리아, 그리스, 시리아 등으로 여행을 하면서 동부와 아라비아의 수학을 접하였다. |
피타고라스(Pythagoras :BC 582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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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인 에우데무스(Eudemus)가 쓴 망라하는 역사에 대한 <에우데무스 요약>(기원전 335년 이전의 그리스 기하학을 모두 망라하는 역사에 대한 요약)은 피타고라스(Pythagoras)를 탈레스 이후의 가장 뛰어난 그리스 수학자로 기술하고 있다. |
하디(Hardy, Godfrey Harold :1877-1947) |
영국의 수학자. 잉글랜드 서리주 출생. |
해리엇(Thomos harriot :1560-16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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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엇(Thomas Harriot, 1560-1621)은 대부분의 생애를 16세기에 살았지만 위대한 저서가 17세기에 발간된 또 한 사람이 수학자이다. 그는 미국인에게 특별한 관심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1585년에 롤리 경에 의해서, 현재는 노스캐롤라이나라 불리지만 그 당시 버지니아라 불렸던 곳의 지도 제작을 위해 측량사로서 그렌빌경의 탐험대와 함께 신대륙으로 보내졌기 때문이다. 수학자로서 해리엇은 흔히 대수학자들의 영국학파의 설립자로 간주되고 있다. 이 분야의 위대한 책인 <해석술의 연습, Artis analyticae praxis>은 그가 죽은 후 10년까지 발간되지 않았는데, 그것은 주로 방적식 이론을 다루고 있다. |
해밀턴(William Rowan Hamilton :1805-18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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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점으로 보아 수학분야에서 아일랜드의 가장 위대한 명성을 지닌 해밀턴은 1805년 더블린에서 태어나서,잠깐씩 다른곳을 방문한 것을 제외하면, 전 생애를 그 곳에서 보냈다. 그는 일찍이 고아가 되었으나, 겨우 한 살 때 그를 열심히 그러나 언어에 치중되게 교육시켰던 삼촌에게 양육이 맡겨졌었다. 해밀턴은 천재임이 판명되었고, 13세가 되었을 때에는 나이만큼이나 많은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였다. 그는 실제적인 성과는 없었으나, 고전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갔고, 일생의 열망이 된 시 쓰기에 빠져있었다. 그는 위대한 시인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와 절친한 친구이며, 서로 존경하는 사이가 되었다. |
헤론(Heron :2세기경) |
그가 살았던 정확한 시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대체로 기원전 150년경부터 250년 사이에 산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 들어와서는 그가 1세기의 약75년경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수학과 물리학 분야에서의 저작은 너무 많고 다양해서 흔히 그를 이 분야에서의 백과 사전적 작가라고 일컫기도 한다. 그가 이집트인으로서 그리스 고육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되는 이유가 여러 가지 있다. 아무튼 이론적인 완전성보다는 실용적인 이용에 목적을 크게 둔 그의 저작은 그리스 문명과 오리엔트 문명의 진기한 혼합체라고 할 수 있다.그는 공학과 측지에 대한 많은 과학적 기초를 제공해 |
호이겐스(Christiaan Huygens :1629-16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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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네덜란드의 천재 호이겐스는 두드러지게 공헌을 많이 한 삶을 살았다. 그는 1629년 헤이그에서 태어나 라이덴에 있는 소 스호텐(Frans van Schooten the Youngers) 밑에서 공부했다. 그는 22세때인 1651년 성 빈센트가 원적문제에 관한 책에서 범한 오류를 지적하는 논문을 썼다. 이것이 뒤이어 원추곡선의 구적법과 π를 계산하는 고전적 방법을 개선한 스넬의 삼각법을 다룬 수 많은 그의 업적이 나온다. 1654년에 그와 동생은 렌즈를 연마하고 세척하는 새롭고 더 좋은 방법을 고안했고 그 결과 토성의 고리의 성질과 같은 천문 관찰의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는 몇년 후 추시계를 발명하여 시간을 재는 좀더 정확한 기구를 갖게 되었다. |
호퍼(Grace Brewster Murray Hopper :1906-1992) |
그레이스 호퍼는 뉴욕에서 태어나 Vassar대학과 예일 대학교에서 교육받았다. |
홍대용(Hong Dae Yong :1731~1783) |
홍대용은 조선 시대 실학파 학자 가운데에서도 가장 진취적인 사상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 head :1861-1947) |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는 1861년 영국의 램스게이트에서 태어나서 셰르본느 스쿨과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하였다. 1885년부터 1911년까지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을 강의하였고, 그 후 런던 대학교의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응용수학과 역학을 강의하였다. 1914년부터 1924년까지 런던 대학교 과학기술대학의 수학교수를 지냈고, 미국으로 가서 하버드 대학교의 철학교수가 되어 1936년 정년할 때까지 그 직에 있었다. 그는 1947년 매사추세트 주의 케임브리지에서 죽었다. 가장 뛰어난 제자인 러셀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화이트헤드는 수학의 입장에서 철학을 고찰하였으며, 두 사람이 함께 1910-1913년에 획기적인 <수학의 원리>를 저술하였다. |
히파티아(Hypatia :) |
4세기 말에 살았던 테온(Theon)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에 대한 11권으로 된 주석집의 저자이다. |
힐베르트(David Hilbert :1862-19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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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베르트는 1862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나 그 곳의 대학교에서 1885년에 박사학위를 받았고 쾨니히 베르크 대학교에서 처음에는 무급강사(1886-1892) 로 나중에는 교수(1893-1894)로 강의하였다. 1895년에 쾨팅겐 대학의 교수가 되어 1930년 퇴임할 때까지 그 직에 있었다. 그는 1943년 괴팅겐에서 죽었다. |
출처..내지식외전사이트열람
사진등 편집 출처 : 네이버 지식인 김순권님.
다음 사진 업로드 후 재편집 : 아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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