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문학(프랑스어: Littérature française, 영어: French literature)은 프랑스와 프랑스어권 지역에서 프랑스어로 씌어진 문학작품의 총체를 말한다.
중세 이래 프랑스는 유럽의 지적 생활에 있어 특별한 지위를 누렸다. 어느 시대나 프랑스 문학작품과 프랑스어는 국경 너머 멀리까지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는 고대 그리스·라틴 문학의 모방에 바탕을 둔 문화 전통을 발전시켰다. 프랑스의 이 고전주의 전통은 이성, 형식의 완전성, 언어의 순수성을 존중했다. 1820년대부터 고전주의적 이상은 낭만주의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낭만주의는 이성에 대해서 상상력의 주장을, 사회적 규범에 대해서 개인을 옹호했다. 시의 영역이 빅토르 위고, 샤를 보들레르, 아르튀르 랭보에 의해 넓혀졌고, 20세기 모더니즘 혁명의 결과로서 모든 시 형식이 다시 정의되었다. 소설 부분에서는 오노레 드 발자크의 〈인간 희극 Comédie Humaine〉으로부터 에밀 졸라의 사회적 사실주의에 이르기까지, 이 장르의 가능성의 탐구와 개척이 이루어졌다. 20세기 초반까지 유럽의 지적·예술적 생활의 중심이었던 파리는 제2차 세계대전 후 그 지위가 쇠퇴하고, 프랑스어의 국제적 지위도 크게 약해졌다. 그러는 가운데도 '누보 로망'의 제창자들은 이 장르의 관례에 철저한 공격을 가했으며, 1960년대 이후 프랑스 작가들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합리적인 탐구에의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 <레 미제라블>, <노트르담의 꼽추> 등을 쓴 프랑스의 문학가 빅토르 위고.
<- 현대 프랑스 작가 중 한 명인 베르나르 베르베르.
중세
-프랑스어의 기원
프랑스의 옛 땅인 갈리아가 BC 51년에 로마 제국에 완전히 정복당할 때까지 갈리아족은 갈리아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후 갈리아어는 통속 라틴어로 바뀌고 그것이 전와하여 갈로로망어(galloroman)가 되었다. 이 언어는 대략 9세기까지 두 그룹의 언어, 즉 루아르 강 북부의 랑그도일과 남부의 랑그도크로 나누어졌다. 랑그도일 지역에는 여러 가지 방언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파리 지역인 일드프랑스 지방에서 사용되던 프랑시앵어가 다른 방언보다 더 발달하여 오늘날의 프랑스어가 되었다.
갈로로망어로 씌어진 최초의 문헌은 〈스트라스부르의 서약 Serments de Strasbourg〉(842)인데, 이것은 샤를마뉴 대제가 제국을 분할할 때 그의 손자인 루이(루트비히)와 샤를(카를) 형제가 맏형 로테르에 대항해서 맺은 서약이다. 이 서약으로부터 시작하여 13세기까지의 프랑스어를 고대 프랑스어 시대라 하고, 14~16세기를 중기 프랑스어 시대라고 하며, 17세기부터 오늘날까지를 현대 프랑스어 시대라고 한다.
-무훈시(武勳詩)
1200년까지 거의 모든 프랑스 문학은 운문이었고 구두로 청중에게 전달되었다. 종글뢰르라 고 불리는 유랑 가수들이 트루베르라고 불리는 북프랑스의 시인들로부터 작품을 사서 악기에 맞추어 노래 부르며 방방곡곡을 다녔던 것이다. 중세 봉건 사회가 특히 좋아했던 작품은 무훈시라는 서사시로서 80여 편이 알려져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된 것은 〈롤랑의 노래 Chanson de Roland〉(1100경)이다. 작가 미상의 〈롤랑의 노래〉는 샤를마뉴가 스페인의 이교도들과 싸워 이기고 돌아올 때, 후위군의 지휘관이던 롤랑이 피레네의 협곡 롱스보에서 적군의 기습을 받았으나 뿔피리를 불어 구원군을 청하기를 거절하고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한다는 이야기이다. 봉건사회의 2대 원리, 즉 명예(군주에 대한 충성)와 신앙(그리스도교)이 잘 조화되어 있다.
<-<롤랑의 노래> 삽화.
-브르타뉴 설화
중세의 설화문학은 12세기 중엽에 절정에 달했다. 어떤 이야기들은 그 기원을 십자군 원정에서 끌어왔고 또 어떤 것들은 고대 문학에서 끌어 왔다. 그러나 사람들의 상상력을 가장 사로잡은 것은 켈트족 전설인 브르타뉴 설화였다.
중세에 널리 인기 있었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숙명적인 사랑 이야기는 토마(12세기)의 프랑스어 고본(稿本)에 의해 전해진다. 원탁의 기사들의 모험담은 아서(아르튀르) 왕 전설을 줄거리로 삼고 있다. 이 장르의 대 작가는 크레티앵 드 트루아로 그는 1165~82년에 이 글을 썼다. 그는 켈트족의 전설을 주제로 ' 궁정연애', 즉 신비롭고 기사다운 연애, 귀부인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과 헌신적인 연애를 그렸는데, 이 연애관은 남프랑스의 시인들, 즉 트루바두르로부터 직접 빌려온 것이다. 그의 작품 〈랑슬로:수레 탄 기사 Lancelot, le chevalier à la charrette〉(1172경)는 아서 왕비 귀네비어에게 반한 주인공이 납치된 왕비를 구출하는 이야기이고, 〈이 뱅:사자를 이끄는 기사 Yvain, le chevalier au lion〉(1173)는 성주의 미망인에게 반한 주인공이 온갖 모험을 다 겪은 뒤 마침내 사랑을 받는다는 이야기이다. 또 그의 〈페르스발 Perceval〉은 '성배(聖杯) 탐색' 설화의 길을 열어놓았다. 브르타뉴 설화는 프랑스 문학 속에 연애의 지상권(至上權)과 여성의 상좌권(上座權)이라는 관념을 끌어들였다.
-〈여우 이야기〉·파블리오·뤼트뵈프
위에서 본 장르들이 봉건 귀족의 감정과 동경에 부합한 기사도 문학이라고 한다면, 도시의 발달과 함께 부르주아가 사회적 중요성을 획득함에 따라, 13세기에는 풍자와해학이 넘치는 부르주아 문학이 크게 발달했다. 그것을 대표하는 것이 운문 설화체인 〈여우 이야기 Roman de Renart〉와 파블리오, 서정시인 뤼트뵈프이다. 사자 노블 왕이 군림하는 동물 왕국에서 여우 르나르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우스꽝스런 이야기들은 봉건사회에 대한 신랄한 풍자이다. 파블리오는 가까운 일상생활에서 끌어낸 우스꽝스런 이야기들인데 부도덕과 상스러움이 특징이다. 프랑스 최초의 위대한 서정시인 뤼트뵈프(13세기)는 격분한 어조로 부르주아·귀족·성직자의 부패를 고발했다.
-〈장미 이야기〉
프랑스의 알레고리 문학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작품은 〈장미 이야기 Roman de la Rose〉였다. 전편(1230?)은 기욤 드 로리스, 후편(1277경)은 장 드 묑에 의해 각각 씌어졌다. 기욤 드 로리스는 우의적인 인물들을 등장시켜 명예에 대한 심리를 분석했다. 장 드 묑은 그의 미완성 작품을 완성하고자 우주·인생·종교·도덕 등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는데, 이 두 작가의 정신은 전혀 달랐다.
-14·15세기 서정시인
음악가이자 시인인 기욤 드 마쇼(1300~77) 는 발라드·롱도·비를레 등 새로운 시형을 보급·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외스타슈 데샹(1346경~1406경)은 그의 제자로서 다작(多作) 시인이었다. 25세에 과부가 된 크리스틴 드 피장(1363경~1430경)의 시에는 애수가 어려 있으며, 알랭 샤르티에(1385경~1433경)는 〈매정한 미희 La Belle Dame sans merci〉로 유명한 궁정시인이다. 샤를 도를레앙(1391~1465)은 백년전쟁의 희생자로 25년간이나 영국의 포로가 된 적이 있으며 우아한 시를 쓴 최상의 작가이다. 그러나 중세 최대의 서정시인은 프랑수아 비용(1431~63?)이다. 그는 사기꾼이고 방탕아이며 살인자였지만, 감정의 성실성으로 가득 찬 〈소유언집 Petit Testament〉(1456)과 〈대유언집 Grand Testament〉(1461)을 남겼다.
-산문문학
1200년 이래 산문이 문학 매체로 번창했다. 성배 탐색, 아서 왕, 트리스탄 등의 전설이 산문으로 다시 씌어졌다. 그밖에도 새로 꾸며낸 이야기들이 산문으로 등장했다. 15세기초의 〈결혼의 15가지 즐거움 Quinze joies de mariage〉, 앙투안 드 라 살의 〈소년 장 드 생트레 Petit Jehan de Saintré〉(1456), 〈신100편 Cent nouvelles nouvelles〉(1465경)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특히 흥미 있는 것은 연 대기들이다. 조프루아 드 빌라르두앵(1150경~1212경)이 지은 〈콘스탄티노플 정복 Conquête de Constantinople〉은 제4차 십자군원정(1199~1204)의 이야기이고, 장 드 주앵빌(1224~1319)의 〈루이 성왕전 Histoire de Saint Louis〉은 그가 84세에 완결한 루이 9세의 전기이다. 장 프루아사르(1337~1410)의 〈연대기 Chroniques〉는 그 시대의 기사도적 광기로 가득 차 있으며, 필리프 드 코민(1447~1511)의 〈회고록 Mémoires〉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Il Principe〉에 견줄 만한 '제왕의 애독서'이다.
-연극
연극의 기원은 종교극과 속극(俗劇)의 2가지가 있다. 종교극은 처음에는 종교의식, 즉 전례극으로서 교회에서 연출되었다. 그후 무대가 교회 밖으로 나가고 주제도 점차 세속화되고 다양해졌으며 폭도 더 넓어졌다. 주제가 세속화된 예로는 장 보델(12세기)의 〈성 니콜라 극 Jeu de Saint Nicolas〉이 있으며, 주제가 더 다양해진 예로는 14세기에 활발해진 성모 기적극(Miracles de Notre-Dame)이 있는데 이 극에서는 대단원에 으레 성모가 출현한다(기적극). 규모가 더 커진 예로는 〈성사극(聖史劇) Mystères〉이 있는데, 이 극의 상연은 흔히 며칠 또는 몇 주일씩 계속되었고, 등장인물이 수백 명에 달하는 때도 있었으며, 동시적(同時的) 장치를 써서 전 종교사를 펼쳐보였다. 〈성사극〉 작가로는 외스타슈 마르카데와 아르눌 그레방(1420경~71경)이 알려져 있다.
속극으로는 아당 드 라 알의 〈녹음극(綠陰劇) Le Jeu de la feuillée〉(1275 이후)과 〈로뱅·마리옹 극 Le Jeu de Robin et Marion〉이 있지만, 최고의 작품은 〈피 에르 파틀랭 선생의 소극(笑劇) La Farce de Maistre Pierre Pathelin〉(1464~69)이다. 교활한 변호사가 우둔한 나사(羅紗) 상인을 속이지만 꾀 많은 양치기에게 도리어 속아넘어간다는 줄거리로서, 몰리에르의 해학을 방불케 한다. 속극은 그 자체의 극단을 가지고 있었다. 파리에는 ' 바조슈'(법률가와 서기들의 단체)와 ' 레 장팡 상 수시'라는 극단이 있었다. 그들은 흔히 3가지의 프로그램, 즉 먼저 소티(풍자극)를, 다음에 모랄리테(도덕극)를, 끝으로 소극을 상연했다.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이며 휴머니즘과 종교개혁 운동의 시대로서, 많은 작가들 중에서도 특히 라블레·롱사르·몽테뉴가 높은 산봉우리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사상의 전달에는 아직도 라틴어가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에라스무스가 루터와 논쟁한 다음 내놓은 〈우신 예찬 Eloge de la folie〉(1511)과 칼뱅의 〈그리스도교 강요(綱要) lnstitution chrétienne〉(1535)도 라틴어로 씌어졌다. 16세기 중엽에 7명의 시인들에 의해 플레야드라는 시파가 결성되었는데, 그들은 프랑스어를 고대 그리스어·라틴어의 수준으로 높이고자 했다. 조아생 뒤 벨레가 쓴 〈프랑스어의 옹호와 선양(宣揚) Défense et illustration de la langue française〉(1549)은 플레야드파의 선언서가 되었는데, 이에 호응하여 많은 학자들도 프랑스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조아생 뒤 벨레.
-시
이 시대에는 시가 찬란하게 꽃피었다. 압운파 시인 장 마로의 아들이자 제자인 클레망 마로(1496~1544) 는 '멋진 익살'에 능한 세련된 궁정시인으로서 특히 롱도·발라드·경구·서간시에 뛰어났다. 신교도로서 박해를 받은 그는 이단자로서 감옥살이를 한 뒤 시집 <지옥 L'Enfer>(1526)에서 신랄한 어조로 재판을 풍자했다. 리옹에서는 모리스 세브(1501경~60경)를 비롯해 〈시집 Rymes〉(1545)으로 페르네트 뒤 기예가, 〈작품집 Oeuvres〉(1555)으로 루이스 라베가 화려하게 등장했다. 세브는 특히 그의 긴 연애시 〈델리 Délie〉(1544)로 이름을 떨쳤다.
이 시대의 대표적 시인은 물론 피에르 드 롱사르(1524~85) 였다. 그는 관능적이고 애수에 젖어 있었으며, 아름다움과 자연을 열렬히 사랑했다. 그는 오드(송가)와 소네트 속에서 덧없이 흘러가버리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오드는 5권의 〈송가집 Odes〉(1550~53) 속에 담겨 있고 소네트는 3권의 〈연애 시집 Amours〉(1552, 1555, 1574) 속에 들어 있다. 플레야드파 중 롱사르 다음으로 뛰어난 시인은 조아생 뒤 벨레(1525~60) 이다. 그는 이탈리아의 소네트를 프랑스에 도입했는데, 그의 〈올리브 L'Olive〉(1549)는 페트라르카풍의 소네트 시집이다. 그의 걸작 〈망향 Regrets〉(1558)은 그가 로마에 장기간 체류하는 동안, 고향인 앙주에 대한 향수를 섬세하게 표현한 것이다. 그밖에도 플레야드 시인들은 많은 시집을 냈는데, 앙투안 드 바이프의 〈멜린의 사랑 Les Amours de Méline〉(1552)·〈프랑신의 사랑 Les Amours de Francine〉(1555), 레미 벨로의 〈연애와 보석의 새 교환 Amours et nouveaux échanges des pierres pré cieuses〉(1576) 등이 있다. 같은 시파의 에티엔 조델은 최초의 근대적 비극 〈사로잡힌 클레오파트라 Cléopâtre captive〉(1553)로 알려져 있다. 이 시대의 대표적 비극작가는 로베르 가르니에(1544~90)로 그의 대표작으로는 〈유대 여인들 Sédécie ou les Juives〉(1583)·〈앙티곤 Antigone〉(1580) 등이 있다.
16세기 후반은 격렬한 내란기였는데, 신교도 아그리파 오비녜(1550~1630)가 쓴 〈단 장(斷腸)의 노래 Les Tragiques〉(1616)는 그러한 종교전쟁의 전화 속에서 씌어진 것이다. 이는 개신교의 적들에 대한 끊임없는 저주로 가득 찬 서정시이자 서사시이다. 이 시대의 마지막 대시인은 마튀랭 레니에(1573~1613)이며, 우스꽝스러운 것을 정확히 재현하고 있는 그의 〈풍자시 Satires〉(1608~13)는 17세기 고전주의의 비개성적 문학으로의 길을 열어놓았다.
↑피에르 드 롱사르. ↑클레망 마로.
-산문
프랑수아 라블레(1494경~1553)의 5부작 〈팡타그뤼엘 Pantagruel〉과 〈가르강튀아 Gargantua〉는 1532~64년에 걸쳐 간행되었다. 라블레는 너무나 황당무계하고 우스꽝스럽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통해서, 그 시대에는 말하는 것이 분명히 위험했을 그런 사상들을 표현했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파뉘르즈 등과 같은 그의 주인공들, 그리고 "그대 하고 싶은대로 하라"라는 단 하나의 규칙 아래 평등하고 자유로운 젊은 남녀들이 오직 마음과 정신의 즐거움만을 따라서 생활하는 텔렘의 수도원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프랑수아 1세의 누나 마르그리트 당굴렘(1492~1549)은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을 본뜬 〈7일 이야기 Heptaméron〉(1558)를 남겼다.
미셸 드 몽테뉴(1533~93)의 〈수상록 Essais〉(1580~88) 은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널리 애독되고 있는 프랑스어 작품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는 에세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었다. 몽테뉴는 이 〈수상록〉에서 '자기 자신을 그리려고' 했다. 그것은 지혜를 추구하는 인간의 일기이다. 그는 거기에 허물 없는 잡담투로, 아무런 계획도 없이 완전한 하나의 행복 철학을 진술해놓았다. 그에 의하면 보편적인 회의주의가 행복하기 위한 제1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는 새로운 교육법을 내놓으면서 교육의 목적은 판단력의 양성이라고 했는데, 이 방법은 17세기의 ' 오 네트 옴'(honnête homme:교양 있는 신사)을 길러내게 되었다. 그는 오네트 옴을 위한 문학, 즉 인간의 정신적 연구를 제재(題材)로 하는 문학을 개척했는데, 이 문학이 곧 17세기의 고전주의 문학의 선구였다. 몽테뉴에서 볼 수 있는 심리분석과 도덕적 고찰에 대한 기호, 이성에의 끊임없는 호소, 고대(古代)와의 친교, 보수적 사상들은 이미 고전주의 정신의 본질적인 특성이 되었다.
↑프랑수아 라블레. ↑미셸 드 몽테뉴.
17세기
-고전주의의 준비
17세기초에 귀족 계급이 서서히 상류사회로 편성되었는데, 이 변화는 특히 오노레 뒤르페의 전원소설 〈아스트레 L'Astrée〉1607~27)와 그 영향으로 랑부예 후작 부인이 처음으로 연(1608) 살롱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문학 살롱에서 발달된 프레시오지테(세 련된 재치)는 폐단도 있었지만, 프랑스어를 명료하고 우아한 언어로 만드는 데 이바지했는데, 뱅상 부아튀르(1597~1648)가 그 대표적 시인이었고, 스퀴데리 양(1607~1701)은 소설 〈아르타메네스 또는 키루스 대왕 Artamène ou le grand Cyrus〉(1649~53)과 〈클레리 Clélie〉(1654~60)에서 이 사교계의 풍속을 그렸다. 한편 이 프레시오지테에 대한 반동으로 벌레스크 작가군이 생겼는데, 〈희극 이야기 Roman comique〉(1651~57)를 쓴 폴 스카롱, 〈부르주아 이야기 Roman bourgeois〉(1666)를 쓴 앙투안 퓌르티에르, 해와 달로의 공상적인 여행담을 쓴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1619~55) 등이 이에 속한다. 프랑수아 드 말레르브(1555~1628) 는 상상력과 개인 감정을 멀리하고 명료함·질서·규칙으로 프랑스어를 정화했다. 그의 업적은 1635년에 창설된 아카데미 프랑세즈에서 계속되었다. 말레르브는 프랑스어 서정시를 우아하고 세련된 것으로 만드는 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영감과 상상력은 결핍되어 있었다. 그에게는 프랑수아 메나르, 오노라 드 라캉과 같은 제자들도 있었지만 마튀랭 레니에(1573~1613), 테오필 드 비오(1590~1626) 같은 공격자들도 있었다. 말레르브가 특히 시를 개혁한 데 반해, 장 루이 게즈 드 발자크(1597~1654)는 산문의 정규화에 공헌했다.
〈방법서설 Discours de la méthode〉(1637)의 저자 르네 데카르트(1596~1650)는 이성을 진리의 최고 심판자로 간주함으로써 합리주의의 기초를 세웠는데, 바로 이 진리의 예찬이 프랑스 고전주의의 근본원리가 되는 것이다. 블레즈 파스칼(1623~62) 은 이성에 대한 불신과 강력한 상상력을 옹호함으로써 데카르트와 그밖의 고전주의 작가들과는 구별된다. 그는 얀센주의의 대변자가 되어 〈시골 친구에게 쓴 편지 Provinciales〉(1656~57)에서 예수회의 안이한 도덕관을 고발했고, 무신론자의 개종을 위해 〈그리스도교 변호〉를 구상했으며 그것이 그의 사후에 〈명상록 Pensées〉이 되었는데, 이는 인간 본질과 신앙에 관한 심오한 철학적 고찰로서 사람들의 정신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프랑수아 드 말레르브. ↑블레즈 파스칼.
-전반기의 희곡
1600~30년 가장 인기 있었던 연극 장르는 희비극과 목가극(牧歌劇)이었다. 그러나 1620년대에는 테오필 드 비오의 비극 〈피라모스와 티스베 Pyrame et Thisbé〉(1623)가 큰 성공을 거두었다. 1630년경에 이르러서야 정규의 비극이 상연되기 시작했는데, 그 작가로는 피에르 코르네유(1606~84), 장 메레(1604~86), 트리스탕 레르미트(1601경~55), 장 드 로트루(1609~50) 등이 있다. 17세기초에 세련된 사교계 사람들을 극장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것은 알렉상드르 아르디(1570~1632)였다. 그러자 종래의 중세식 연극을 보다 사실적으로 보이기 위해, 합리주의적인 사교계의 요구와 작가들의 경향에 부응해 '한 장소에서, 하루 동안에, 단 하나의 사건이 완결되도록……' 하는 삼일치의 법칙이 확립되었다. 이 법칙이 처음으로 적용된 것은 메레의 희곡 〈실바니르 Silvanire〉(1630)에서였으나, 그것을 확립하고 실천함으로써 고전주의 비극의 개념을 정착시킨 것은 코르네유의 〈르 시드 Le Cid〉(1637)·〈호라티우스 Horace〉(1640)·〈킨나 Cinna〉(1640) 등이었다. 〈르 시드〉는 심리적 위기의 연구로서 프랑스 연극의 방향을 제시해주었다. 코르네유는 "정열은 이성과 의지의 통제에 따라야 한다"는 데카르트의 〈정열론 Traité des passions〉(1649)을 그의 비극에서 구체화하고 있는데, 거기서 그는 지적이고 의지적인 프랑스인의 유형을 숭고의 경지까지 끌어올리고 있다.
<-피에르 코르네유.
-고전주의 문학의 개화
루이 14세가 친정을 시작한 1660년이 문학사의 구분점이 되어 고전주의 문학이 꽃피었다.
사교인들이 가져다준 걸작들이 있다. 프랑수아 라 로슈푸코 공작(1613~80)의 〈잠언집 Maximes〉(1665)은 염세가의 저작으로 거기서는 모든 것을 이기주의, 즉 욕심으로 돌리고 있다. 17세기 심리소설의 걸작인 라 파예트 부인(1634~93)의 〈클 레브 공작부인 La Princesse de Clèves〉(1678)은 마치 코르네유의 비극을 소설화한 것과 같다.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모은 세비녜 부인(1626~96)의 〈서간집〉(1726)은 지성과 상상력과 재치로 가득 차 있다. 레스 추기경은 〈회고록 Mémoires〉(1717)에서 프롱드 난(1648~53)의 경과와 동시대 인물들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니콜라 부알로(1636~1711), 몰리에르(1622~73), 장 라신(1639~99), 장 드 라퐁텐(1621~95) 등 4명의 시인들은 젊어서부터 교분을 나누었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면서 문학에 일생을 바친 부알로는 그의 〈시학 Art poétique〉(1674)에 의해서 고전주의 문학예술의 이론가가 되었다. 몰리에르는 극단장이자 배우이며 작가였다. 1659년 〈재치를 뽐내는 여인들 Les Précieuses ridicules〉이 크게 성공함으로써 루이 14세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성격묘사에 역점을 두었으며, 17세기의 독특한 인물이면서도 영원한 인간형을 그렸다. 그의 주요작품은 위선자의 전형을 그린 〈타르튀프 Tartuffe〉(1664~66)·〈인간 혐오자 Le Misanthrope〉(1666)·〈수전노 L'Avare〉(1668)·〈부르주아 귀족 Bourgeois gentilhomme〉(1670) 등이다. 라신(1639~99)의 〈앙 드로마크 Andromaque〉(1667)는 〈르 시드〉에 못지않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그후 10년 동안 〈브리타니퀴스 Britannicus〉(1669)·〈이피제니 Iphigénie〉(1674)·〈페드르 Phèdre〉(1677) 등 6편의 걸작을 계속 내놓았다. 〈앙드로마크〉의 성공은 코르네유의 시대와는 달리 이제 전쟁도 프롱드 난도 겪지 않고 오직 연애만을 생각하는 세대가 시작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고전주의 정신은 그 완벽한 표현을 라신의 비극에서 얻게 된다. 끝으로 라퐁텐(1621~95)은 〈우화집 Fables〉(1668~94)에서 '다양한 100막의 극'을 쓰려고 했는데, 그것은 인간 생활의 완전한 한 폭의 그림인 동시에 동물의 모습 아래 가려진 프랑스 사회의 그림이기도 하다.
17세기를 논할 때 두 성직자를 빠뜨릴 수 없다. 철저한 가톨릭교의 옹호자 자크 베니뉴 보쉬에(1627~1704) 는 〈설교집 Les Sermons〉·〈조사집(弔辭集) Oraisons funèbres〉 외에 〈세계사 서설 Discours sur l'histoire universelle〉(1681)에서 논법의 강력함과 웅대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정적주의자(靜寂主義者)로서 보쉬에와의 논쟁 끝에 유죄 선고를 받은 페늘롱(1651~1715)은 그의 교육소설 〈텔레마크 Les Aventures de Télémaque〉(1699)에 정치비평을 섞어넣었다.
↑장 드 라퐁텐. ↑몰리에르.
-신구(新舊) 논쟁
1687~97년에 특히 격렬했던 이 논쟁에서 부알로, 〈성격론 Caractères〉(1688)의 저자 라 브뤼예르(1645~96) 등과 같은 고대파는 오직 고대 문학의 모방만이 우수성을 보장할 수 있다고 본데 비해 근대파, 예컨대 〈동화 Contes de fées〉의 작가 샤를 페로(1628~1703)는 〈고대인과 근대인의 비교 Parallèles des anciens et des modernes〉(1688~97)에서, 〈신탁의 역사 Histoires des oracles〉(1687)의 저자 퐁트넬(1657~1757)은 〈고대인과 근대인에 관한 여담 Digression sur les anciens et les modernes〉(1688)에서 최선의 현대적인 작품은 인간 정신의 진보로 당연히 더 우수하게 마련이라고 주장했다. 근대파가 결국 승리를 거두었고 이 싸움이 진행되는 동안 이미 18세기가 싹트고 있었다.
18세기
-계몽사상
17세기말부터 교회·귀족·왕권 등 전통적인 권위가 쇠퇴함에 따라 이성의 활동이 활발해졌는데, 먼저 이성은 기존 질서의 핵심과도 같았던 신앙의 원리를 쓰러뜨리려고 했다. 이러한 합리주의적 비판 작업은 두 선구자에 의해 이루어졌다. 퐁트넬은 〈신탁의 역사〉에서 "이성에 의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믿어서는 안 된다"고 했고, 피에르 벨(1647~1706)은 〈역사와 비평의 사전 Dictionnaire historique et critique〉(1697)으로 합리주의를 발전시켰다. 계몽시대 최초의 위대한 철학자 샤를 몽테스키외(1689~1755)는 〈페르시아인의 편지 Lettres persanes〉(1721)에서 프랑스의 여러 가지 제도와 풍습을 풍자하고 비판했다. 그의 〈로 마인의 위대함과 그 쇠락의 원인에 관한 고찰 Considérations sur les causes de la grandeur des Romains et de leur décadence〉(1734)은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역사의 기초를 세웠으며, 〈법의 정신 De l'esprit des lois〉(1748)은 삼권분립이라는 영국의 헌법 이론을 소개함으로써 전제정치를 뒤흔들어 놓았다. 볼테르는 시인·극작가·역사가·철학자·소설가로서 60년간 프랑스의 지적 지도자 역할을 했다. 그는 〈철학 서간 Lettres philosophiques〉(1734) 에서 영국을 정치적·종교적·철학적인 자유국가로 소개했는데, 이는 전제주의와 가톨릭교에 대한 최초의 폭탄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는 훗날 〈신앙자유론 Traité sur la tolérance〉(1763)·〈철학사전 Dictionnaire philosophique〉(1764)에서 더 직접적으로 가톨릭 교회를 공격했다. 또한 〈자디그 Zadig〉(1747)·〈캉디드 Candide〉(1759)·〈어수룩한 사나이 L'lngénu〉(1767) 등과 같은 철학적 소설에서는 사회의 불의, 형이상학적 낙관주의, 정치의 부패 등을 고발했다.
18세기 후반에 철학자들의 그룹이 조직되어 합리적인 철학의 '총화'와도 같은 〈백과전서 Encyclopédie〉(1751~72)를 펴냄으로써 이성의 승리를 가져다주었는데, 주요편집자는 달랑베르(1717~83)와 드니 디드로(1713~84) 였다. 디드로는 연극이론가이자 극작가이고 〈라모의 조카 Le Neveu de Rameau〉(1805, 1821, 1891)·〈운명론자 자크 Jacques le fataliste〉(1796)를 쓴 당대의 위대한 반소설(anti-roman) 작가이자 프랑스 최초의 미술 비평가(<미술 비평 Salons>, 1759~81)였는데, 무신론자로서 그리스도교 도덕을 공격했다. 진보를 믿었던 18세기 계몽시대의 모든 철학자들과는 달리 장 자크 루소는 진보에 이론을 제기했다. 그는 <학예론 Discours sur les sciences et les arts>(1750)에서 자연은 선하나 문명은 그것을 타락시켰다고 주장했다. 또 <인간 불평등기원론 Discours sur l'origine de l'inégalité>(1755)에서는 불평등의 기원인 사유재산 제도에 기초를 둔 현대 사회 질서의 부정을 고발했다. 그의 <사회계약론 Le Contrat social>(1762)은 27년 후 혁명가들의 코란이 되었고, 인권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낳게 했다.
<-<백과전서>의 표지.
-연극
18세기 전반에는 모든 장르의 예술이 타락했는데 특히 비극이 그러하여, 볼테르의 비극들, 즉 〈자이르 Zaïre〉(1732)·〈메로프 Mérope〉(1743) 외에는 볼 만한 것이 없다. 희극은 비극보다 훌륭하다. 희극 작가로는 〈튀르카레 Turcaret〉(1709)를 쓴 알랭 르네 르사주(1668~1747)에 이어 피에르 마리보(1688~1763), 피에르 오귀스탱 카롱 드 보마르셰(1732~99) 가 등장한다. 마리보는 30편 이상의 희극을 썼으며, 대부분이 복잡하고 미묘한 연애심리를 그렸는데, 문체가 매우 세련되어 훗날 이런 문체를 '마리보다주'라고 불렀다. 주요작품은 〈사랑으로 닦여진 아를캥 Arlequin poli par l'amour〉(1720)·〈사랑의 놀라움 La Surprise de l'amour〉(1722)·〈사랑과 우연의 장난 Le Jeu de l'amour et du hasard〉(1730) 등이 있다. 보마르셰의 걸작으로는 사회·정치 풍자극 〈세비야의 이발사 Le Barbier de Séville〉(1775)·〈피가로의 결혼 Le Mariage de Figaro〉(1784) 등이 있다.
18세기 연극에는 '드라마'(le drame)라는 새로운 장르가 태어났다. 관객의 감정에 변화가 생겨 순수한 웃음 대신 감동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이 새로운 취미를 만족시키기 위해 희극은 진지해지고 '눈물을 자아내는 희극'(comédies larmoyantes)으로 바뀌어, 특수한 신분과 가정의 고민을 다루는 드라마가 된 것이다. 드라마의 이론은 디드로의 〈사생아에 관한 대담 Entretion sur le fils naturel〉(1757)에 의해 정립되었으며, 그 예로는 니벨 드 라 쇼세(1691~1754)의 〈유행의 편견 Préjugé à la mode〉(1735) 등이 있으나, 미셸 장 스덴(1719~97)이 쓴 〈자신도 그런 줄 모르는 철학자 Le Philosophe sans le savoir〉(1765)가 가장 훌륭한 드라마로 평가되고 있다.
-시, 소설, 기타
볼테르는 서사시·철학시·풍자시 등 온갖 장르에서 뛰어난 시인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최대의 시인은 단두대에 목이 잘린 앙드레 셰니에 인데, 그의 격렬한 〈풍자시 Iambes〉(1819)는 옥중에서 쓴 것이다. 18세기에는 소설이 크게 발달했다. 몽테스키외는 〈페르시아인의 편지〉(1721)에서 철학적 소설양식을 창조했다. 그후 거의 모든 계몽사상가들이 그것을 즐겨 사용했는데, 특히 루소는 그의 방대한 서간체 소설 〈신(新)엘로이즈 La Nouvelle Héloïse〉(1761)에서 사회적·도덕적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다. 르사주는 〈절름발이 악마 Le Diable boiteux〉(1707)와 특히 〈질 블라스 Gil Blas〉(1715~35)에서 사실주의적 소설을 창조했다. 〈질 블라스〉는 한 청년의 파란 많은 일생을 그린 것인데, 프랑스 문학에서 가장 성공한 악한소설(roman picaresque) 중 하나이다. 레스티프 드 라 브르톤(1734~1806) 역시 사실주의 작가로서 농민, 도시 서민, 파리 사회 등을 그렸다.
심리소설 또는 감성소설은 마리보의 〈마리안의 일생 La Vie de Marianne〉(1731~41)과 아베 프레보(1697~1763)의 〈마농 레스코 Manon Lescaut〉(1731)에 의해서 대표된다. 베르나르댕 드 생 피에르(1737~1814)의 〈폴과 비르지니 Paul et Virginie〉(1788) 도 이 감성 문학 계열에 속한다. 이 작품은 열대의 이국적 배경 속에서 펼쳐지는 한 편의 전원시이다. 코데를로스 드 라클로(1741~1803)의 서간체 소설 〈위험한 관계 Les Liaisons dangereuses〉(1782)는 상류사회의 타락한 남녀관계를 분석한 걸작이다. 끝으로 사드 후작(1740~1814)의 소설 〈쥐스틴, 또는 미덕의 불운 Justine ou les malheurs de la vertu〉(1791)은 '새디즘'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음란하고 잔인한 것으로 유명하다. 18세기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자전적 회고록이다. 생 시몽 공작(1675~1755)의 〈회상록 Mémoires〉은 부정확한 기록이 많지만 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루소의 〈고백록 Confessions〉(1765~70)은 성실한 자기 분석서로서, 자아를 토로하는 낭만주의의 길을 열었으며,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Rêveries d'un promeneur solitaire〉(1776~78)은 추억과 명상과 몽상의 연속으로서 〈고백록〉의 후편이라 할 수 있다.
<-<신(新)엘로이즈 La Nouvelle Héloïse>의 제1판 표지.
대혁명~ 1850년
-대혁명과 낭만주의의 준비
프랑스 대혁명은 문학의 과거와의 연결을 끊었다. 작가들은 세련된 사교계의 제약과 갖가지 규칙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었고, 그에 따라 문학의 영역은 엄청나게 넓어졌다. 그리하여 자유로운 체제 아래 웅변술이 발달하여, 온hfp 미라보 백작(1749~91)과 같은 천재적인 웅변가가 출현하게 되었다. 미국 여행과 영국 망명생활에서 돌아온 프랑수아 르네 드 샤토브리앙(1768~1848)은 그의 호교론적(護敎論的)인 〈그리스도교 정수(精髓) Génie du Christianisme〉(1802)를 내놓았는데, 거기에는 소설 〈아탈라 Atala〉와 〈르네 René〉가 삽입되어 있었다. 〈르네〉는 괴테의 베르테르와 같은 불안하고 고독하며 방향 감각을 잃은 젊은 주인공을 보여줌으로써, 이내 낭만적 감수성의 본질인 '세기병'의 상징이 되었다. 〈죽 음 저편의 회상 Mémoires d'outre-tombe〉(1848~50)은 30년 동안 쓴 그의 걸작인데, 그의 동시대인들이 그에게 '마술사'라는 별명을 붙였을 만큼 문체가 매혹적이었다. 스탈 부인(1766~1817)의 3대 작품으로는 세계주의적이고 여권주의적인 소설 〈코린 Corinne〉(1807)과 두 논문 〈문학론 De la littérature〉(1800)·〈독일론 De l'Allemagne〉(1810)이 있다. 〈문학론〉에서 저자는 북방문학과 남방문학을 대립시키고 아름다움의 상대성을 밝혔다. 〈독일론〉에서는 프랑스인에게 '낭만주의'라는 하나의 새로운 문학을 계시했다. 여기서도 저자는 북방과 남방을 대립시켜, "북방은 낭만적이고 남방은 고전적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프랑수아 르네 드 샤토브리앙.
-낭만주의
프랑스 낭만주의는 전(前) 세기의 고전적 규칙과 철학적 합리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왕정복고와 7월왕조시대에 발달된 자아와 예술의 해방운동으로서, 그것은 본질적으로 작가의 개성이 자유롭게 표현되는 문학이다. 이미 반세기 전부터 감수성과 상상력, 감정 토로와 자연애호의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경향은 특히 루소와 샤토브리앙에게서 뚜렷하게 나타났으며, 스탈 부인은 낭만주의 문학의 이론을 제시했다. 게다가 바이런, 월터 스콧, 실러, 괴테 등과 같은 외국 작가들의 작품이 영향을 미쳤다. 낭만파는 1823년경 샤를 노디에의 살롱에서 최초의 세나클을 구성했으며, 1827년에 빅토르 위고가 그의 희곡 〈크롬웰 Cromwell〉에 쓴 서문이 이 새로운 유파의 선언서로 인정받게 되었다.
-낭만파의 시
이 새로운 풍조는 특히 시에서 뚜렷했다. 비련의 감정을 담은 알퐁스 드 라마르틴(1790~1869)의 <명상시집 Méditations poétiques>(1820)은 커다란 감동을 자아냈다. 이 시집에서 보여준 개인적인 서정이 나중에는 종교적 감정, 인류의 운명에 대한 관심으로 바뀌어갔다. 빅토르 위고(1802~85) 는 낭만파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1829년 〈동방 시집 Les Orientales〉에서 1840년 〈빛과 그림자 Les Rayons et les ombres〉에 이르기까지 5권의 시집을 내놓았는데, 그의 시 역시 개인적인 것에서 정치적·사회적·도덕적·철학적인 것으로 옮아가고 예언자적 모습을 띠게 된다. 〈운명 Les Destinées〉(1864)의 시인 알프레드 드 비니(1797~1863)는 인간의 고뇌와 고독에 대해 명상하고, 인간에게 극기와 체념을 권하고, 비참한 동포를 사랑할 것을 권한다. 젊은 천재 시인 알프레드 드 뮈세(1810~57) 는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이야기 Contes d'Espagne et d'Italie〉(1830)로 즉각적인 명성을 떨쳤다. 실연의 커다란 슬픔을 겪은 뒤, 그 유명한 비가(悲歌)인 4편의 〈밤 Nuits〉을 썼다. 제라르 드 네르발(1808~55)의 〈몽 환들 Les Chimères〉(1854)은 최근 들어 높이 평가되고 있는데, 그것은 다양한 종교적 신화와 초자연적 지신에 의존하는 그의 고뇌에 찬 비교적 탐색을 시로 옮겨놓은 것으로, 보들레르·말라르메의 시와 일맥상통하고 있다.
<- 알프레드 드 뮈세.
-낭만파의 연극
낭만극은 삼일치의 법칙, 장르의 규칙 등 모든 고전극의 인습을 깨뜨렸다. 위고의 운문극 〈에 르나니 Hernani〉(1830)의 초연은 고전주의에 대한 낭만주의의 도전이었고 낭만주의의 승리였으며, 뒤이어 〈뤼 블라스 Ruy Blas〉(1838)의 성공이 이어졌다. 1831년 대(大)알렉상드르 뒤마(1802~70)의 〈앙토니 Antony〉가 상연되었을 때, 낭만주의 세대는 앙토니에게서 자기 이상에 맞는 주인공, 즉 침울하고 열광적이고 반항적인 인간을 발견하고 박수갈채를 보냈다. 비니의 〈채터턴 Chatterton〉(1835)은 그 농축된 단순성에서 고전극과 많은 유사성을 갖고 있다. 뮈세의 〈로렌차초 Lorenzaccio〉(1834)는 낭만주의의 걸작으로서 셰익스피어의 극에 비견된다.
-낭만파와 발자크의 소설
낭만주의 소설은 오래 전부터 루소, 베르나르댕 드 생 피에르, 스탈 부인, 샤토브리앙에 의해 준비되었다. 세낭쿠르(1770~1846)의 〈오베르만 Obermann〉(1804)과 뱅자맹 콩스탕(1767~1830)의 〈아돌프 Adolphe〉(1861)는 모두 심리소설이지만, 〈르네〉처럼 숨김 없는 자서전이기도 하다. 1820년대에는 역사소설이 크게 유행했는데, 그것은 월터 스콧의 프랑스어 번역 작품의 영향에 의해 촉진되었다. 역사소설의 가장 훌륭한 보기는 위고의 〈노트르담의 꼽추 Notre-Dame de Paris〉(1831)이다. 역사 소설은 마침내 대(大)뒤마의 〈삼총사 Les Trois mousquetaires〉(1844)처럼 대중소설로 변모했다. 스탕달(1783~1842) 은 19세기의 감수성을 가진 18세기적 합리주의자이다. 그의 두 걸작은 〈적과 흑 Le Rouge et le noir〉(1830)·〈파름의 수도원 La Chartreuse de Parme〉(1839)인데, 이 소설들의 주인공을 통해 스탕달은 오직 '행복의 추구'만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르주 상드(1804~76) 는 처음에는 이상주의와 낭만주의가 넘쳐 흐르는 소설 또는 인도주의적 사회주의 소설을 썼으나, 나중에는 사실주의적 요소를 띤 전원생활의 감상적인 이야기를 담은 걸작 〈악마의 늪 La Mare au diable〉(1846)·〈사랑의 요정 La Petite Fadette〉(1849) 등을 내놓았다.
오노레 드 발자크(1799~1850) 와 더불어 낭만주의는 사실주의로 변해갔다. 90여 편의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을 포함하는 방대한 〈인간희극 Comédie humaine〉은 부르주아 계급의 정확한 묘사, 배경의 진실성 등 사실적인 특성에 의해 가치가 있다. 그는 몰리에르처럼 전형적인 인간형(그랑데의 인색, 사촌누이 베트의 질투, 고리오의 부성애 등)을 그려냈다. 샤를 노디에(1780~1844)와 프로스페르 메리메는 단편 및 중편 소설을 개발했다. 메리메의 〈카르멘 Carmen〉(1845)·〈콜롱바 Colomba〉(1840)는 이 장르의 최고 걸작이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의 등장인물들을 그린 삽화. ↑'스탕달'이라는 필명으로 알려진 앙리 베일.
↑오노레 드 발자크. ↑조르주 상드.
-낭만주의 시대의 역사와 비평
19세기초의 역사가들의 작품은 흔히 문학과 더 가까워 보인다. 오귀스탱 티에리(1795~1856)의 영국과 프랑스의 역사는 감동적이고 회화적이며, 쥘 미슐레(1798~1874)의 저서〈프랑스사 Histoire de France〉(1833~44)는 시인의 상상력과 감수성으로 과거의 생활을 완전히 부활시켜 놓았다. 그러나 프랑수아 기조(1787~1874)와 특히 〈아메리카의 민주주의 De la démocratie en Amé-rique〉(1835~40)의 저자 알렉시 드 토크빌(1805~59)은 더 철학적이고 과학적이다. 시인이자 소설가이기도 한 비평가 샤를 생트뵈브(1804~69)는 1830년경에는 낭만주의를 지지했으나, 점차 그러한 경향에서 벗어나 전기적(傳記的) 비평방법을 창출해갔는데, 여기에서 벌써 사실주의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
<- 알렉시 드 토크빌.
1850년~제1차 세계대전 이전
848년의 2월혁명 후 과학이 사회적·지적 생활을 지배하자 문학에서도 낭만주의에 대한 반동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사실주의 또는 자연주의의 시대이다. 당시 오귀스트 콩트의 〈실증철학 강의 Cours de philosophie positive〉(1830~42)가 낳은 실증주의는 거의 하나의 새로운 종교가 되었다. 에른스트 르낭(1823~92)은 종교 연구에도 실증주의적 방법을 적용했고, 이폴리트 텐(1828~93)은 실증주의적 분석을 계속하여 생물학적 결정론을 주장했는데, 에밀 졸라(1840~1902)의 자연주의 문학이론에 미친 텐의 영향은 결정적인 것이었다.
-시에서의 새로운 방향
이 시기의 시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1830년대말까지 낭만주의 시는 개인 감정의 직접적인 표현과 동의어가 되었는데, 애초에 화가로서 낭만주의의 열렬한 투사였던 테오필 고티에(1811~72) 가 그러한 낭만주의에 등을 돌렸다. 그는 감정을 억누르고 대상을 정확히 재현함으로써 '예술의 치환'을 행했다. 즉 그림이 주는 정확한 감각을 언어에 의해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예술의 본질을 형식 속에 있게 하고 일체의 도덕도 사상도 배제하고 ' 예 술을 위한 예술'을 추구했는데, 그의 걸작 〈에나멜과 카메오 Émaux et camées〉(1852)가 그것을 예증하고 있다. 그리하여 프랑스 문학은 고티에를 축으로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로 방향을 돌리게 된 셈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의 대표자는 고답파(高踏派)의 거두 샤를 르콩트드릴(1818~94) 이었다. 그의 작품 〈고대 시집 Poèmes antiques〉(1852)·〈야만 시집 Poémes barbares〉(1862) 등에서 그 시형은 완벽하고 조형적(造形的)인 효과를 보이고 있다. 1866년에 〈현대 고답 시집〉 제1권이 간행되었는데, 고티에, 르콩트 드 릴, 보들레르, 테오도르 드 방빌(1823~91), 쉴리 프리돔(1839~1908), 조제 마리아 드 에레디아(1842~1906), 프랑수아 코페(1842~1908) 등이 기고했다. '예술에 새로운 전율을 가져다준' 샤를 보들레르(1821~67) 는 자기 생애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악의 꽃 Les Fleurs du mal〉(1857)에 담았다. 그의 시는 많은 낭만주의적 요소와 고답파적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그 강력한 암시력에 의해 상징주의를 예고하고 있었다.
19세기 후반은 보통 낭만주의에 대한 반동의 시대로 규정되지만, 〈징벌 시집 Les Châiments〉(1853)·<정관 시집 Les Contemplations>(1856)·〈여러 세기의 전설 La Légende des siècles〉(1859, 1877, 1883) 등 위고의 거의 모든 주요 시작품들은 1851년 12월 쿠데타 후 그가 나폴레옹 3세에 의해 추방된 국외의 망명지에서 발표되었다. 〈레 미제라블 Les Misérables〉(1862)이 발표된 것도 이무렵이었는데, 시인·사상가로서 위고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는 1편의 방대한 산문 서사시이다.
-> 샤를 보들레르.
-사실주의 소설
사실주의, 즉 레알리슴이란 말은 본래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의 화풍에서 유래된 용어인데 그것이 문학에 적용된 것이다. 사실주의 이론은 샹플뢰리(1821~89)에 의해 형성되었지만, 그 이론은 아주 다양하며, 흔히 자연주의란 말과도 동의어로 쓰인다. 그리하여 플로베르, 보들레르, 소(小)알렉상드르 뒤마, 알퐁스 도데, 모파상, 공쿠르 형제, 에밀 졸라 등은 모두 사실주의 작가이자 자연주의 작가이다. 샹플뢰리와 에드몽 뒤랑티(월간지 〈Réalisme〉[1856]의 창간자의 한 사람)와는 달리 에드몽 드 공쿠르와 쥘 드 공쿠르 형제는 지나치게 꾸민 세련된 인상주의적 문체로, 어떤 환경이나 병리상태를 상세히 기록한 것을 소재로 소설을 꾸몄는데, <르네 모프랭 Renée Mauprin>(1864)·〈제르미니 라세르퇴 Germinie Lacerteux〉(1865)가 그것이다.
사실주의의 거장 귀스타브 플로베르(1821~80) 에 있어 예술은 과학적 인식의 모든 성격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예술은 예술가의 감정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내야 하며, 따라서 예술은 몰개성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플로베르의 성격은 복잡하여, 취미와 인간 형성 면에서는 낭만주의자이고 이성적인 면에서는 고전주의자이다. 이러한 이중성 때문에 그가 다룬 주제는 진부한 일상생활을 그린 〈보바리 부인 Madame Bovary〉(1857)·〈감정 교육 L'Éducation sentimentale〉(1870)에서 각각 낭만적이고 현실도피적인 〈살랑보 Salammbô〉(1863)·〈성 앙투안의 유혹 La Tentation de Saint-Antoine〉(1874)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 알퐁스 도데. ↑기 드 모파상. ↑에밀 졸라. ↑귀스타브 플로베르.
-사실주의 연극
1843년 위고의 운문극 〈레 뷔르그라브 Les Burgraves〉의 실패가 낭만주의에 종지부를 찍은 뒤 무대를 차지한 것은 소 뒤마(1824~95)와 에밀 오지에(1820~89) 의 희극이었다. 그들의 희극은 항상 당대의 풍속을 정확히 묘사하면서 도덕적인 주장을 내포하고 있었는데, 사실적(寫實的)이면서도 감동적이다. 뒤마는 매춘부를 등장시킨 〈춘희 La Dame aux camélias〉(1852)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오지에의 대표작은 매춘부의 명예회복에 반대하는 〈올랭프의 결혼 Le Mariage d'Olympe〉(1855), 신문과 금융계의 부패를 고발한 〈파렴치한들 Les Effrontés〉(1861) 등이다. 이 시대에는 소극도 유행했는데, 외젠 라비슈(1815~88)의 〈이탈리아 밀짚모자 Le Chapeau de paille d'Italie〉(1851)·〈페리숑 씨의 여행 Le Voyage de M. Perrichon〉(1860) 등이 유명하다.
-자연주의
1880년에 단편집 〈메당의 저녁 Les Soirées de Médan〉(1권)이 간행되었다. 이는 자연주의(naturalisme)의 탄생을 알리는 것으로서, 거기에는 에밀 졸라(1840~1902), 조리 카를 위스망스(1848~1907), 앙리 세아르 등이 기고했는데, 기 드 모파상의 〈비곗덩어리 Boule de Suif〉도 실려 있었다.
.이 유파의 중심인물인 졸라는 그의 논문 〈실험 소설 Le Roman expérimental〉(1880)에서 자연주의 이론을 전개했는데, 실증주의자 이폴리트 텐과 생리학자 클로드 베르나르(1813~78)의 영향을 받은 그는 소설가와 실험 과학자의 방법이 동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는 정신에 대한 육체의 영향, 운명에 미치는 유전과 환경의 결정론적 영향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20권의 소설로 구성된 연작 〈루공 마카르 총서:제2제정 시대 어느 집안의 자연적·사회적 역사 Rougon-Macquart, Histoire naturelle et sociale d'une famille sous le second Empire〉를 썼다. 졸라의 대표작은 〈목로주점 L'Assommoir〉(1877)·<나나 Nana>(1880)·<제르미날 Germinal〉(1885) 등이다. 기 드 모파상(1850~93)이 이름을 떨친 것은 단편 작가로서였지만, 300편의 단편 외에 6편의 장편을 내놓았는데, 그 가운데 〈여자의 일생 Une Vie〉(1883)은 매우 널리 읽혀지고 있다. 알퐁스 도데(1840~97) 는 자연주의 작가로서는 특이하게 객관적이면서도 전혀 몰개성적이 아닌 작품을 만드는 데 성공했는데, 시정이 넘쳐 흐르는 〈방앗간 소식 Lettres de mon Moulin〉(1869) 이외에 〈자크 Jack〉(1876)·〈사포 Sapho〉(1884) 등 수많은 장편소설을 발표했다.
->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의 표지(1877)
-상징주의
1880년 이후 자연주의는 쇠퇴하고 상징주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상징주의는 고답파 시의 딱딱하고 싸늘한 형식과 자연주의 산문의 사진적 수법에 대한 반동이었다. 그러나 상징주의 운동은 주로 시의 혁신운동이었는데, 이 시의 혁신은 3명의 선구자, 베를렌·랭보·말라르메에 의해 준비되었다.
폴 베를렌(1844~96) 은 처음에 고답파였으나 랭보의 영향으로 이 유파의 규율에서 해방되었다. 그리하여 〈말없는 연가(戀歌) Romances sans paroles〉(1874)·〈지혜 Sagesse〉(1888)에서는 독창성을 발휘해 자기 감수성의 가장 순간적인 상태를 음악적인 말로 표현했다. 아르튀르 랭보(1854~96) 는 외관의 뒤에서, 보들레르에 의해 드러내어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현실인 '만물조응'(萬物照應)의 세계에 도달하려고 시를 마술 수단처럼 사용하면서 초현실주의를 예고했다. 그는 50여 편의 운문시와 두 산문시집 〈지옥에서 보낸 한 철 Une Saison en enfer〉(1873)·〈일뤼미나시옹 Illumination〉(1886)을 남겼다. 스테판 말라르메(1842~99) 는 언어의 연금술사로서, 말을 오로지 음악적·암시적 가치에 따라 결합함으로써 사물의 이상적인 관념을 암시할 것을 가르쳤는데, 그의 〈목신의 오후 L'Après-midi d'un Faune〉(1876)는 유명하다. 이 선구자들과 이른바 상징주의자들과의 사이에 데카당파(Décadents)가 끼는데, 이들은 자유시를 보급시켰다. 그 대표적 인물은 쥘 라포르그(1860~87)이며, 그는 시집 〈애가 Complaintes〉(1885)를 남겼다.
1886년에 상징주의를 제창한 것은 장 모레아스(1856~1910) 였다. 그는 〈피가로〉지에 발표한 상징주의 선언문 속에서, 말라르메의 이론에 따라, "자연 풍경, 인간행위 등, 모든 구체적인 현상들은…… 원초적인 관념과의 그들의 신비로운 유사관계를 나타내도록 운명지어진, 지각할 수 있는 단순한 외관에 불과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1891년 이미 상징주의에서 벗어나 고전적인 작시법으로 돌아갔다. 상징주의 최대의 시인은 모레아스, 앙리 드 레니에(1864~1936), 에밀 베라랭(1855~1916) 등이다. 상징주의의 격동기는 짧았다(1886~98). 그러나 그 영향은 오래 계속되었으며, 그후 대부분의 시인들은 그 영향을 받았다.
↑폴 베를렌. ↑아르튀르 랭보. ↑스테판 말라르메.
상징주의 시대~제1차 세계 대전
-소설
1880년대에 자연주의와 과학을 경멸하는 소설들이 나왔는데, 오귀스트 빌리에드릴라당(1838~89) 의 〈잔인한 이야기 Contes cruels〉(1883)가 그 한 예이다. 그러나 소설의 주류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후의 가톨릭의 부활과 국가주의의 대두와 관계가 있었다. 처음에 자연주의 소설가였던 위스망스는 〈거꾸로 À rebours〉(1884)를 거쳐 〈대성당 La Cathédrale〉(1898)에 이르러서는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열광적인 가톨릭교도인 레옹 블루아(1846~1917)는 자전적 소설 〈절망자 Le Désespéré〉(1886)를 썼다. 그러나 가톨릭교와 우익 정치가 결합되어 있는 〈제자 Le Disciple〉(1889)를 비롯한 폴 부르제(1852~1935)의 소설들이 시대정신을 더 잘 대변해주고 있었다. 그의 반민주주의적·반공화주의적 견해는 모리스 바레스(1862~1923)와 같은 국가주의 작가들의 견해와 비슷했다. 바레스의 〈뿌리 뽑힌 사람들 Les Déracinés〉(1897)은 드레퓌스 사건과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의 프랑스 우익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아나톨 프랑스(1844~1924)는 부르제와 바레스와는 달리 자유사상과 민주주의를 위해 그의 예술을 사용했다. 프랑스는 드레퓌스파의 입장에서 적극 투쟁한 문인으로서, 그의 〈현대사 Histoire contemporaine〉(4권, 1896, 1897, 1899, 1901)에는 교회, 우익반대파, 부패한 집권층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강렬한 인도주의적 이상이 담겨져 있다. 피에르 로티(1850~1923)는 해군장교로서 세계의 풍경을 우울한 관능주의자의 영혼으로 섬세히 그렸다(〈아이슬란드의 어부 Pêcheur d'lslande〉, 1886). 쥘 르나르(1864~1910) 는 간결하고 익살스런 문체로 소설과 희곡을 썼는데 소설로서는 〈홍당무 Poil de carotte〉(1894)·〈박물지 Histoires naturelles〉(1896)가 유명하다. 샤를 루이 필리프(1874~1909)는 파리의 빈민가를 공감을 가지고 그린 민중작가이고(〈뷔뷔 드 몽파르나스 Bubu de Montparnasse〉, 1901), 대하소설 〈장 크리스토프 Jean Christophe〉(1904~12)의 작가 로맹 롤랑(1866~1944)은 국제주의적 인도주의자였다. 마지막으로 알랭 푸르니에(1886~1914)의 〈대장 몬느 Le Grand Meaulnes〉(1913)은 탈출 문학의 대표작으로서 사춘기의 환상적 세계를 그린 자전적·시적 소설이다.
<-아나톨 프랑스.
-시
프랑시스 잠(1868~1938)과 폴 클로델(1868~1955) 은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잠은 전원을 노래하는 데 자유시를 사용했고(〈새벽 미사의 종에서 저녁 미사의 종까지 De l'Angélus de l'aube à l'Angélus du soir〉, 1898), 클로델은 자신의 가톨릭 신앙을 표현하는 데 상징주의적 수법을 사용했다(〈5대 송가 Cinq grandes odes〉, 1899). 안나 드 노아유 백작 부인(1876~1933)은 낭만파의 마지막 시인으로서 삶의 즐거움과 쓰라림을 노래했다(〈헤아릴 수 없는 마음 Le Coeur inombrable〉 1901). 열정적인 시인 샤를 페기(1873~1914)는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조국을 지키기 위해 출정하여 전사했다(〈우리의 조국 Notre patrie〉 1905).
-연극
자연주의는 앙리 베크(1823~95)의 희곡을 낳았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까마귀들 Les Corbeaux〉(1882)이다. 1887년에 앙드레 앙투안은 '자유극장'을 창설하여 자연주의 희곡을 상연했다. 이무렵 에드몽 로스탕(1868~1918)은 낭만주의적 표현 양식의 희곡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Cyraro de Bergerac〉(1897)를 상연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상징주의는 〈파랑새 L'Oiseau bleu〉(1908)의 작자 모리스 메테를링크(1842~1949)와 〈마리아에게 알림 L'Annonce faite à Marie〉(1912)의 작자 클로델에 의해 프랑스의 연극을 쇄신했다. 문제극의 작가로는 프랑수아 드 퀴렐(〈새로운 우상〉 1895)과 폴 에르비외(〈횃불 경주〉, 1901)가 유명하며, 심리극은 '연애극'의 작자 조르주 드 포르토 리슈에 의해 상연되었다(〈사랑하는 여인 Amoureuse〉, 1891). 이 시대의 많은 희극 작가들 중 몰리에르적 희극미를 보여준 유일한 극작가는 조르주 쿠르틀린(1861~1929)인데, 그의 대표작은 〈부부로슈 Boubouroche〉(1893)이다.
<-모리스 메테를링크의 <파랑새>를 원작으로 한 연극의 포스터(1908).
-문예비평
제1차 세계대전 전의 비평가로는 장르의 진화를 추구한 페르디낭 브륀티에르(1849~1906), 개인 연구에 뛰어난 에밀 파게(1847~1916), 인상주의의 쥘 르메트르(1853~1914), 상징주의 운동의 위대한 비평가 레미 드 구르몽(1858~1915) 등이 있다. 이 시대에 귀스타브 랑송은 브륀티에르의 뒤를 이어 문학사의 방법을 확립해 오랫동안 그 권위자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은 기성 작가들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나, 젊은 세대에게는 방향을 잃게 하고 반항심을 품게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모든 것을 거부하고(다다이즘 운동) 영감을 직접 잠재의식 속에서 끌어내려고 했다(초현실주의 운동).
-시
전통적인 시를 제외한 현대시는 두 줄기, 즉 말라르메를 거친 발레리의 주지주의와 랭보를 거친 초현실주의로 갈라졌다. 폴 발레리(1871~1945)의 시는 비상한 자기 인식과 외계의 관능적 향락의 결합이다. 생 종 페르스(1887~1975)는 위대한 작품 <아나바즈 Anabase〉(1924)를 남겼다. 초현실주의(Surréalisme)의 선구자는 〈알코올 Alcools〉(1913)·〈칼리그람 Calligrammes〉(1918)의 작가 기욤 아폴리네르(1880~1918) 이고 이 운동의 주도자는 앙드레 브르통(1896~1966), 루이 아라공(1897~1982), 폴 엘뤼아르(1895~1952)였다. 장 콕토와 쥘 쉬페르비엘도 그들의 영향을 받았다. 이 유파에 두 훌륭한 시인이 있었는데, 〈밤이 움직이다 La Nuit remue〉(1934)의 작가 앙리 미쇼(1899~1984)는 무의식의 세계를 탐구했으며, 〈분노와 신비 Fureur et mystère〉(1948)의 작자 르네 샤르(1907~88)는 생명력과 동포애의 힘을 찬미했다.
제2차 세계대전중 엘뤼아르와 아라공은 레지스탕스 시인으로서 환영받았다. 〈말 Paroles〉(1948)의 작가 자크 프레베르(1900~77) 의 시는 샹송 가수 조르주 브라상스와 자크 브렐의 노래들과 함께 민중시로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생 종 페르스를 제외한 발레리와 클로델의 전통에서는 중요한 시인이 없었고, 초현실주의 이후 세대의 시는 뚜렷한 방향이 없어 보였다. 대전 후 프랑스 시의 주류는 르네 샤르, 피에르 에마뉘엘, 이브 본푸아로 대표되었다. 그들의 추상적·상징적 경향과는 대조적으로, 프랑시스 퐁즈(1899~1988)는 산문시 속에서 대상의 몰개성적인 묘사에 주력했다(〈사물의 편견 Le Parti pris des choses〉, 1942). 1970년대에는 ' 울리포'(Oulipo:Ouvroir de littérature potentielle의 줄인 말로서 잠재 문학 작업장) 작가들의 실험문학운동이 있었는데, 소설 〈사용법 인생 La Vie mode d'emploi〉(1978)의 작가로 이름난 조르주 페레크(1936~82), 〈지하철 안의 자지 Zazie dans le métro〉(1959)로 널리 알려진 레몽 크노(1903~76), 자크 루보 등의 시인들이 이에 속했다.
-> 폴 발레리.
-소설
제1차 세계대전은 앙리 바르뷔스의 〈포화 Le Feu〉(1916)와 같은 반전소설을 낳았다. 전후 프랑스 작품은 외국 작가들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중 한 예로 〈바나부스 A.O. Barnabooth〉(1913)의 작가 발레리 라르보는 〈연인들, 행복한 연인들 Amants, heureux amants〉(1923)에서 제임스 조이스의 내적 독백을 적용했다. 초현실주의 소설로는 브르통의 〈나자 Nadja〉(1928)와 아라공의 〈파리의 시골뜨기 Le Paysan de Paris〉(1926)가 있는데, 이들은 크노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이 시대에는 여행소설이 인기가 있었는데, 폴 모랑(1888~1976)의 〈야간 개업 Ouvert la nuit〉(1922)·〈야간 폐업 Fermé la nuit〉(1923)이 그러했다. 대전 직후에는 소설도 무의식의 연구(즉 인간의 인식) 쪽을 향해갔으나 세계공황 때(1929~32)부터는 사회 묘사와 윤리 문제로 관심이 옮아갔다.
모두가 무의식의 신비를 캐려고 노력했다. 이 무의식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와 지그문트 프로이트, 그리고 초현실주의자들에 의해서 탐구되었다.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1913~27)에서 무의식의 심연을 뚫고 들어갔고, 앙드레 지드(1869~1951)는 〈교황청의 지하도 Les Caves du Vatican〉(1914)에서 '무동기의 행위'(acte gratuit)를 그렸다. 프랑수아 모리아크(1885~1970)는 성총(聖寵)을 잃은 사람들의 비참을, 쥘리앵 그린(1900~)은 정열과 신앙의 갈등을 그렸다. 반대로 콜레트(1873~1954)가 다룬 주제는 감각의 개화(開花)와 본능의 발휘였다.
로제 마르탱 뒤 가르(1881~1958)의 〈티보가의 사람들 Les Thibault〉(1922~40), 조르주 뒤아멜(1884~1966)의 〈파스키에가(家)의 기록 chronique des Pasquier〉(1933~45), 자크 드 라크르텔(1888~1967)의 〈높은 다리 Les Hauts-Ponts〉(1932~35)는 가족 소설의 계열에 속한다. 위나니미슴(Unanimisme:일체주의)의 창시자 쥘 로맹(1885~1972)은 〈선의의 사람들 Les Hommes de bonne volonté〉(1932~47)에서 집단적인 영혼을 그렸다.
〈투우사들 Les Bestiaires〉(1934)·〈젊은 처녀들 Les jeunes filles〉(4부작, 1936~39)의 작자 앙리 드 몽테를랑(1896~1972)은 고매한 정신을 찬미했고, 앙드레 말로(1901~76)는 〈인간 조건 La Condition humaine〉(1933)·〈희망 L'Espoir〉(1937)에서 중국 혁명과 스페인 내전을 그렸으며, 앙투안 드 생 텍쥐페리(1900~44)는 〈어린왕자 Le Petit Prince〉를 내놓았다. 조르주 베르나노스(1888~1948)는 죄악의 문제를 탐구한 데 대해, 장 지오노(1895~1970)는 문명인이 원시적인 본능에 빠져들기를 바랐다. 필리프가 열어놓은 노동계급 소설은 루이 기유의 〈서민의 집 La Maison du peuple〉(1927)에 의해 계속되었고, 민중소설가 외젠 다비의 사실주의적 소설 〈북(北)호텔 Hôtel du nord〉(1929)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30년대의 가장 훌륭한 소설가는 〈밤으로의 여행 Voyage au bout de la nuit〉(1932)의 작가 루이 페르디낭 셀린(1894~1961) 이었는데, 그는 곁말투성이의 구어체를 구사함으로써 문체를 혁신했다. 제2차 세계대전중 레지스탕스 작가들에 의해 비밀리에 '심야총서'(深夜叢書)가 퍼졌는데, 그 첫째 권으로 나온 베르코르의 〈바다의 침묵 Le Silence de la mer〉(1942)은 독일군 점령하의 프랑스의 분위기와 긍지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장 폴 사르트르(1905~80)의 유물론적 실존주의 철학이 전후 세대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보리스 비앙(1920~59)의 〈세월의 거품 L'Ecume des jours〉(1947)은 환멸을 느낀 그들의 모습과 사르트르 숭배를 그려내고 있다. 사르트르의 소설 세계는 무기력과 메스꺼움, 구토의 세계이다(〈구토 La Nausée〉, 1938). 알베르 카뮈(1931~60) 의 작품 〈이방인 L'Étranger〉(1945)은 초기 사르트르의 세계('부조리')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절교 후,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적 마르크스주의 쪽으로 전향했고 카뮈는 금욕적 인도주의 쪽으로 기울었다. 사르트르의 평생 동반자 시몬 드 보부아르(1908~86)는 〈레 망다랭 Les Mandarins〉(1954)에서 프랑스 지식인들에 대한 공산주의와 미국의 상반된 매력을 생생하게 그렸다. 그녀의 〈사르트르에게 보내는 편지〉가 1990년에 간행되 었다.
1954년의 문학적 사건은 19세 처녀 프랑수아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 Bonjour tristesse〉이었는데, 이는 고전적·전통적 형식의 소설이었다. 그러나 전통적 소설 개념은 알랭 로브 그리예, 클로드 시몽, 나탈리 사로트, 미셸 뷔토르, 마르그리트 뒤라스, 로베르 팽제, 장 케롤 등의 '누보 로망'에 의해 오랫동안 도전을 받고 있었다. 이 소설가들은 소설의 전통적인 틀(연대순, 줄거리, 등장인물의 성격 등)과 작자의 전지전능성을 거부했다. 1963년에는 르노도상이 장 마리 르클레지오의 '현대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조서(調書) Le Procès-verbal〉에 주어졌는데, 그것은 지나치게 지적인 누보 로망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1968년의 학생 봉기사건은 여권 운동을 활성화했다. 〈제2의 성 Le Deuxième sexe〉(1944)의 작가 보부아르의 뒤를 이어 여러 여성소설가들이 여성의 조건을 다루었는데, 클레르 에츠렐리, 마리 카르디날, 샹탈 샤와프, 엘렌 시크수스, 그리고 뒤라스 등이 이에 속한다. 1980년대 중반까지의 프랑스 소설은 '누보 로망'(post-nouveau roman)의 실험적 소설로부터 전통적 형식의 소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향을 나타냈다. 미셸 투르니에(1924~)는 '새로운 고전 작가'로 인정받는 현대의 최대 작가이고(〈마왕 Le Roi des Aulnes〉 1970, 〈유성 Les Météores〉 1975, 〈질과 잔 Gilles et Jeanne〉 1983), 파트리크 모디아노(1945~)는 1968~78년 5개의 소설에서 문학상을 받았다(〈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Rue des boutiques obscures〉로 1978년도 공쿠르상 수상).
이 시대가 준 좌절감은 역사소설에 한결 흥미를 느끼게 했는데, 1980년 여성 작가로서는 처음으로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으로 선출된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1903~87)를 비롯해, 잔 부랭, 클로드 시몽, 크리스티안 생제 등이 독자의 관심을 끌었다. 마르셀 파뇰의 소년시절, 나탈리 사로트의 〈어린시절 Enfance〉(1983) 등과 같은 전기 또는 회고록도 많이 읽혔으며, 필리프 솔레르스의 〈여자들 Femmes〉(1983), 조르주 바타유, 앙리 미쇼 등 난해한 작가들의 소설도 독자층을 넓혀갔다.
↑앙드레 지드. ↑알베르 카뮈.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
-연극
초현실주의자들은 일체의 연극적 관례를 타파한 알프레드 자리(1873~1907)의 〈위뷔 왕 Ubu roi〉(1896)을 찬미했지만 그들 자신은 영속적인 가치가 있는 희곡을 생산하지 못했다. 이 시대에 훌륭한 연출가들이 나와서 연극을 혁신했는데 자크 코포, 샤를 뒬랭, 루이 주베, 장 루이 바로가 그러했다. 장 콕토(1889~1963)는 비상한 솜씨를 발휘했지만(〈지옥의 기계 La Machine infernale〉 1934) 연극을 근본적으로 개혁한 것은 진짜 시인인 장 지로두(1882~1944) 였다(〈트로이 전쟁은 일어나지 않으리 La Guerre de Troie n'aura pas lieu〉 1935). 장 아누이(1910~87, 〈앙티곤 Antigone〉 1943)와 아르망 살라크루(1899~1989, 〈지구는 둥글다 La Terre est ronde〉, 1938)는 지로두로부터 시를 도덕적인 관찰과 섞는 방법을 배웠다. 통속극과 희극 분야에서 에두아르 부르데(1887~1945:〈최신간(最新刊) Vient de paraître〉 1927)와 마르셀 파뇰(1895~1974:〈마리위스 Marius〉 1929)의 작품은 능란한 솜씨에 재치가 넘쳐 흐르고 있다. 그밖에 아주 훌륭한 소극도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쥘 로맹의 〈크노크 Knock〉(1923)를 들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비극작가는 몽테를랑으로 〈죽은 여왕 La Reine morte〉(1942)·〈말라테스타 Malatesta〉(1950) 등 수많은 걸작을 남겼다. 사상극은 사르트르와 카뮈에 의해 다시 생명을 얻었다. 사르트르는 '참여하는' 극작가로서 〈더러운 손 Les Mains sales〉(1948) 등 수많은 희곡을 썼고, 카뮈는 〈칼리굴라 Caligula〉(1945)·〈정의의 사람들 Les Justes〉(1949) 등에서 여러 가지 사상을 검토하고 있다. 뛰어난 독창성을 지닌 장 주네(1910~86) 는 〈하녀들 Les Bonnes〉(1947)·〈발코니 Le Balcon〉(1956)·〈병풍 Les Paravents〉(1961) 등을 통해 반사실주의적·반사회적 연극을 창조했다. 1950년은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그것은 외젠 이오네스코(1912~)의 〈대머리 여가수 La Cantatrice chauve〉와 아르튀르 아다모프(1908~20)의 〈침입 L'Invasion〉이 발표된 해인데, 이들은 종래의 형식과 관습에서 벗어난 새로운 부조리극으로서, '반연극'(anti-théâtre)의 길을 열었다. 1952년에는 사뮈엘 베케트(1906~89)가 〈고도를 기다리며 En attendant Godot〉라는 부조리극을 발표하여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카뮈의 <정의의 사람들>의 표지.
-철학·문예 비평
9세기말의 과학 만능주의는 문학에서뿐만 아니라 철학에서도 후퇴했다. 반주지주의적인 직관설을 내세운 앙리 베르그송(1845~1921)과 인간의 본성을 전적으로 무의식에 존속시키려고 한 프로이트(1856~1939)가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또 철학은 인간의 운명을 그리스도교적 유심론, 마르크스주의적 유물론, 실존주의적 현실주의 등에 의해서 각각 다르게 해석했다. 현대 프랑스의 실존주의는 가브리엘 마르셀로 대표되는 그리스도교도 그룹과 사르트르와 카뮈로 대표되는 무신론자 그룹이 있으며, 현상학을 실존주의에 결합한 모리스 메를로 퐁티(1908~61), 물질의 실존적 정신분석을 시도한 가스통 바슐라르(1844~1962), 신화의 인류학적 연구에 구조적 분석을 도입한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1908~91) 등의 업적도 독창적이다.
비평 정신은 20세기 고유의 특징일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자크 리비에르(1886~1925)에 의해 발행된 〈신 프랑스 평론 La Nouvelle Revue Française〉(약칭 N. R. F.)은 특히 이 비평 정신을 무의식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에 의해 갱신된 인간의 인식에 적용했다. 제1·2차세계대전 사이의 가장 중요한 비평가는 〈N. R. F〉의 비평가 알베르 티보데(1874~1935)였다. 베르그송의 영향을 받은 그는 작가에 대한 완전한 공감으로 비평을 하기보다는 설명하고 서술하는 쪽을 택했다. 그와 함께 발레리 라르보와 에드몽 잘루(1878~1949)의 비평 작품에는 유럽 정신이 두드러지게 느껴진다. 앙드레 쉬아레스(1868~1948)와 샤를 뒤 보스(1883~1939)는 비평 속에서 영적인 획득물을 찾았는데, 특히 쉬아레스는 베르그송적인 방법에 따라, 직관에 의해 작가의 영감과 직접 통하려고 했다. 피에르 라세르(1867~1930)와 쥘리앵 뱅다(1867~1957)의 비평은 그들과는 달리 주지주의적이다. 데카르트적 인도주의자 알랭(본명은 에밀 샤르티에, 1868~1951)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지식과 행동의 비평가였다.
르네 마릴 알베레스, 모리스 나도, 피에르 앙리 시몽, 클로드 에드몽드 마니, 가에탕 피콩 등의 비평은 인간 존재가 놓여져 있는 조건에의 추구를 주제로 삼고 있는데, 그러한 의미에서 '형이상학적 비평'으로 한데 묶여져 있다. 1960년대 이후 새로운 비평가들이 등장했는데, 인류학자이자 구조주의의 창시자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미셸 푸코(1926~84), 롤랑 바르트(1915~80) 등이 있다. 푸코의 〈낱말과 사물 Les Mots et les choses〉(1966)은 1940년대에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L'Êre et le néant〉(1943)가 가졌던 것과 동일한 비중을 가졌는데, 그는 그후 〈지식의 고고학 L'Archéologie du savoir〉(1969)·〈성(性)의 역사 Histoire de la sexualité〉(3권, 1976~1984) 등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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