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뒹굴면서 보는 드라마의 재미
어제는 정말 편안하게 드라마를 봤습니다. 거실의 큰 텔레비전을 집안 식구에게 빼앗겼거든요. 전날의 월드컵 경기를 다시 보기로 보겠다는 식구 중 한 명 때문에 안방의 조그만 텔레비전으로 쫓겨 갔습니다.
푹신한 베개를 끌어 안고 침대 위에 엎드려 나쁜 남자 9회를 시청했습니다.
어제 나남 9회를 보며 베개를 깨물기도 하고 호호거리며 웃기도 하고 정말 재미있게 시청을 했습니다. 어제 9화가 재미있어서였을까요? 아니면 몇 년전인지도 가물가물할 만큼 이렇게 편안하게 즐기는 마음으로 드라마를 본 것이 오래 되어서? 드라마시청의 원초적 재미를 다시 느꼈던 때문일까요?
제게 깨알같은 재미를 주었던 장면들이 무엇이었는지 한번 되짚어 보겠습니다.
# 2 - 심건욱과 문재인 - 이 커플은 대체 뭐란 말인가?
마치 커플룩인 듯 멋진 검정 수트를 입은 건욱과 고혹적인 검정 정장을 입은 재인이 서로 등을 기대고 의지하며 앉아 쉬는 장면입니다. 화려한 가면 전시회가 끝난 뒤 썰물같이 빠져 나간 텅 빈 전시회장의 뒷처리를 하려고 둘만 남아 있습니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라는 오래된 노래가 문득 떠오르는 장면이었습니다. 객석의 관객은 다 빠져나가고 화려한 무대 의상을 걸쳤다는 사실만이 이전의 시간들을 상기시켜 줍니다. 결국 그들만 남은 거죠.
재벌가 안에 잠입했지만 결코 그들과 같은 세계의 사람일 수 없는 그들의 처지가 느껴집니다. 등을 기대 앉은 데에서 그들이 같은 편이라는 것도 느끼게 해줍니다.
'네가 홍태성이라면 뭐 받고 싶을 것 같아?" 조언을 구하는 문재인. '집밥' 이라는 건욱의 대답은 따뜻한 가정의 느낌을 줘라는 의미였을 겁니다.
"이걸 언제 다 치우지?" 라는 재인의 마지막 대사가 심상치 않게 들립니다.
상대역들이 다 퇴장하고 난 뒤 등을 기대고 앉아 얘기하는 이 둘을 보자니 건욱이 재인에게 바라는 바가 뭘까 라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더군요. 지금으로서는 재인의 신분상승을 위한 질주를 건욱이 도와주고 있는 형상인데요, 가면을 쓰고 있는 태성에게 가서 건욱이인 척 얘기를 해 보라며 기회를 준 것도 그렇고, 태성이 다니는 헬스 클럽의 회원권을 안겨 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리를 삔 자신을 병원에 데려다 준 태성이 얼마나 자기에게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는지 재인은 자랑처럼 건욱에게 얘기를 합니다. " 자기가 처음으로 간호한 사람은 잊지 못하는 법이지. 잘 다쳤네 -" 라고 건욱이 말을 하자 재인은 뭘 그런 식으로 말하냐며 약간 불쾌해합니다. 재인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모든 상황을 전략적으로 분석하는 건욱이 그대로 보여졌습니다. 이에 비해 건욱과 자신과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아직 파악 안된 듯한 재인이입니다.
재인이 어리버리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죠. 집밥이라는 해답을 듣기 전에도 재인은 여우같이 태성의 약한 부분을 공략했습니다.
태성이가 좀 안된 사람이더라고 - 식구들에게 따뜻한 대접을 못 받는 태성이에 대해 동정어린 말을 합니다. 자신을 건욱이라고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태성은 이에 감동을 받습니다. 자신의 계획대로 잘 풀려나감을 깨닫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우는 재인이 보통내기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저 표정이 순정파 아가씨의 표정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 드라마가 어차피 가상 현실이라는 것을 알고 보고는 있었지만 어제는 문득 저 둘은 대체 뭐란 말인가? 라는 생각이 들어서 흥미로왔습니다. 자신의 배경이 보잘것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재인, 그리고, 건욱도 별 다를 건 없습니다.
자신의 특별한 매력으로 태성을 어쩌면 유혹할 수도 있다고 믿고 있는 재인, 대담하게 접근해 나가고 자신만의 전략을 펼치죠. 건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네도 그렇고 태라에게도 망설임없이 뻔뻔스러울 정도로 저돌적으로 접근해갑니다. 잘못하면 뺨 한 대 맞을 상황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맞지 않았습니다. 거부당하지 않았고, 재인도 태성으로부터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자신들이 대쉬하기만 하면 거부당하지 않으리라는 그들의 확신. 그들의 자신감 - 그 근거는? 부럽습니다.... 사실 납득이 갈 만한 외모와 매력의 두 남녀니까요.
사실 이 드라마는 '저들이라면 누구도 의심할 바 없이 상대를 굴복시킬 수 있는 매력' 이라는 것에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 나야 상대역들의 심리진행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 부럽다.. 라고 생각이 드는 순간은 잠시 이 드라마 밖으로 빠져나오는 시간이구요.
전략을 진행시켜 나가는 데 필요한 조언을 구하고, 또 해주고, 헬스 클럽 회원권을 주어서 진행시켜나가도록 도와주고, 진행상황에 대해 상대에게 보고하고 , 그것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분석해서 얘기해주고 -
퍼뜩 떠오르는 느낌은..... 한 쌍의 부부 사기단....??
아, 물론 건욱과 재인의 관계는 아직 완결된 것이 아니고 당연히 커플이 아닙니다. 진행중이죠. 그리고 그들도 이런 행동들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잘 모르는 듯 합니다. 특히 재인 쪽에서는 -. 확실한 건 둘은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목적으로 해신 그룹 내로 들어가려고 하고 있고 그것을 서로 지켜보고 있으며 때로는 도움을 주기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회사에 정직원이 된 걸 보니까 해신그룹 사람들 널 받아들이는 것 같은데.... 너 모네랑 결혼해?? 걱정스레 묻는 재인의 표정 - '아니-' 라고 단순 명쾌하게 대답하는 건욱. 이에 순식간에 안도의 표정으로 변하는 재인. 재인의 저 표정의 의미는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전 같이 일을 진행해가던 동지가 혼자만 일이 완결되어버리면 혼자만 남을텐데... 라는 걱정이 해소되어 아직은 같은 편으로 남아 있겠구나를 확인한 안도같이 보이던데요 .
# 3 - 귀여웠던 태성이 -
태성이 건욱을 데리고 다른 방으로 들어가서 가면을 바꿔 쓰자고 할 때부터 새로운 장난거리에 들뜬 표정이 참 재미있었습니다. 가면을 바꿔 쓰고 왕자와 거지 역을 바꿔 보자고 제안하면서부터 조금 더 텔레비 앞으로 다가앉게 되었습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전개시켜 나갈 건지, 이 카드를 어디까지 각각의 캐릭터 들이 써 먹게 될 건지 흥미로왔습니다.
결국...
건욱은 이 가면놀이로 태라를 깨뜨렸고 재인은 태성을 끌어 당기게 되더군요.
재인이 자기를 태성으로 알고 있으면서 거짓된 얘기를 했던 것을 태성은 모릅니다. 재인이 자신에게 남다른 감정(본인이 받고 싶어하는 따뜻한 사랑)을 품고 있다고 믿고는 흐뭇해하는 표정이 귀엽지 않습니까?
속아 넘어 가는 것이 안되어 보이기도 하구요.
건욱에게 우쭐대며 '재인이가 너 귀찮다고 하던데?' 라며 뻐기는 모습도 귀여웠습니다.
헬스 클럽에서 태성의 행동은 더 미소를 띄게 했지요. 은근 슬쩍 의식하며 다가가서 운동을 하는 모습도 신선했습니다. 사랑을 시작하는 풋풋한 소년의 모습을 보여줬어요. 이러한 귀여움은 그의 단순함에서 나왔겠지요.
이것은 또 다시 말해서 태성이, 재인이 요리하기에는 손쉬운 상대라는 의미도 됩니다. 그래서 태성이 더 불쌍합니다. 재인이한테까지 이용을 당하게 되었으니.
재인에게 거칠 것이라고는 해신그룹사람들 뿐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태성의 엄마인 신여사와 홍회장.
누군가의 보호자라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설레어하는 태성이입니다. -> 재인의 약봉투를 받아 들고는 재인과 무언가 특별한 끈으로 연결되었다는 사실에 행복해 하고 있군요.
그리고 어두운 골목길에서의 키스 .
이 관계의 진전이 무얼 의미하는 지는 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만, 보는 순간만은 태성의 설레임에 동화되어 즐거웠습니다.
상하로 교차되어 가볍게 움직인 화면처리와 상큼한 OST에 이성을 잃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건욱과 재인, 둘 다 너무 손쉬운 상대를 만난건지, 아니면 그들의 매력이 저항 불가의 치명적인 것인지, 혹은 그들의 근자감 ( 여기서는 근거있는 자신감 ) 이 상대를 자기 최면에 빠뜨리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건욱이 왜 자신의 계획에 협조를 하고 있는 것인지 재인도 모르겠지만, 저도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
진한 매력을 보여주었던 태라와 건욱, 풋풋한 첫사랑의 느낌을 보여주었던 재인과 태성.
색깔은 달랐지만 둘은 같은 지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나 봅니다. 그 끝은 어디일런지?
예고편을 보니 재인이 자신에게 계획적으로 접근한 것을 태성이 알게 되더군요. 재인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 성 싶습니다. 태라는 자신의 감정을 드디어 건욱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될 듯 싶구요.
해신그룹내 장남이 몰래 비자금을 마련하고 있다는 걸 찔러준 것이 이번 화에서 나왔습니다. 8화를 보니 태라와 신여사 역시 주식을 자기 몫으로 빼 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가족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내부적으로는 다 와해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밖으로 다 터트려 완전한 가족 해체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 건욱의 계획인 듯 싶기도 하고요.
영화에서도 그렇지만 TV 드라마의 경우 도덕적 잣대가 조금 더 엄격하죠. 나쁜 짓을 하는 자가 해피 엔딩을 맞기는 힘듭니다. '벌은 나중에 받겠다'고 건욱이 독백을 하는 데에서도 나타났지만, 비극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그들을 폭파 시키고 자신도 자폭하려는 가미가제식의 복수가 아닐까 싶네요.
즐겁게 보면서도 다가올 비극적 결말을 예감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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