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76&aid=0002022941
야구선수들도 흥분했다. 24일 낮 12시쯤, 삼성의 오키나와 전훈캠프인 아카마구장에선 여기저기서 김연아의 이름이 들렸다.
점심식사를 마친 뒤의 휴식시간. 선수도, 심판도, 선동열 감독도 관심사는 김연아였다. 본래 전지훈련중인 선수들은 한국에서 빅뉴스가 터져도 야구와 관련 없으면 관심을 크게 두지 않는다. 그러나 이날은 상황이 달랐다.
역시 연아 비거리가 달라! 아사다 73.78점 받자 "어허, 이거 좋은데…" 우려-탄식 연아 78.50점 세계신 세우자 모두 "우~와" 박수-환호
◇김연아의 쇼트프로그램 경기가 열리던 날, 태평양 반대쪽 일본 오키나와에 전훈캠프를 차린 삼성 선수단도 잠시 훈련을 중단하고 TV 앞에 모여 '피겨 여왕' 응원에 목청을 높였다. 선동열 감독(가운데)이 창문 밖에서 창틀에 몸을 맡긴 채 TV를 지켜보는 모습이 이채롭다. <오키나와=김남형 기자>
▶선동열 감독의 우려
김종훈 코치는 "어제(23일) 김연아가 훈련때 세게 넘어진 장면을 일본 방송에서 아침 내내 연속해서 틀어줬다"고 말했다. 김연아 경기 시각을 묻는 얘기가 오가자 선동열 감독은 큰 목소리로 "1시쯤 할거야"라고 정리해줬다.
아카마구장 관리사무실에 조그만 TV 한 대가 있다. 어느덧 화면에선 여자 피겨 쇼트프로그램 장면이 나오기 시작했다.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가 포함된 조의 선수들이 연습을 시작했다. 관리사무실 창가 의자에 앉은 선 감독은 "일본에서도 시청률 엄청날거야. 이거 어찌 될지 몰라. 괜히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가 경쟁하다가 의외로 안도 미키가 금메달 따는 것 아닌가"라고 염려하기도 했다. 모두가 그랬듯, 경기전엔 일말의 불안감이 없지 않았다.
이날 삼성은 오후 1시부터 자체 청백전이 예정돼 있었다. 그러나 선 감독은 12시30분부터 관리사무실 근처를 떠나지 않았다.
▶늦춰진 청백전
우선 핀란드 선수의 경기를 본 선 감독은 "저것 봐, 방금 회전은 약간 실수였네. 역시 저 선수 말고 뒤에 나오는 선수가 짱짱하겠지"라며 웃었다.
양준혁이 헬멧을 쓴 채 배트를 들고 사무실로 다가와 슬며시 기자에게 묻는다. "저거 지금 하는 건가요?" 다른 선수들 몇몇도 관심을 보인다.
12시54분쯤 아사다 마오 차례가 됐다. 어느새 심판, 코치, 선수들이 웅성거리며 꽤 많이 모였다. 하지만 다소 주춤주춤하는 분위기였다. 1시에 청백전을 시작하기로 했으니 대놓고 TV를 보기엔 민망한 분위기였다.
감독이 한방에 해결했다. "자, 이왕 하는 거 이거 보고 합시다. 다들 오라 그래. 경기는 1시5분에 하자구. 어여들 와" 하면서 손짓했다. 그제서야 관전객들은 테이블에 걸터앉거나 아예 바닥에 주저앉았다. 저연차 선수들은 창밖에서 까치발로 겨우 볼 수 있었다. 관리사무실은 그 옛날 마을에서 유일한 흑백TV를 갖고 있던 이장댁 분위기로 바뀌었다.
▶모두가 전문가
아사다 마오가 큰 실수 없이 연기를 이어갔다. "어허, 이거 좋은데", "어떻게 보면 2인자인 아사다가 부담이 적을 수도 있지. 불안한 걸" 등 의견이 분분하다.
선 감독은 "아사다가 첫번째 연속 점프에선 약간 불안했던 것 같은데, 나머진 좋았다"고 해설가처럼 말했다. 아사다가 경기를 마쳤다. "잘했는걸. 김연아 앞에서 저리 잘 하면 부담이 커지는데" 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73.78점. "우와!" 아사다의 점수가 발표되자 전원이 놀라움의 탄식을 터뜨렸다.
뒤쪽에서 누군가 "상당히 높은 점수네. 근데 여기서 약간 지더라도 김연아가 프리에 강하니까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어"라고 말했다. 포수 프로텍터까지 착용한 채 경기를 본 진갑용은 "괜찮아, 괜찮아"를 연신 되풀이했다.
▶한국시리즈 7차전
드디어 김연아 차례다. "긴장한 건가. 김연아 얼굴이 굳었는 걸." 불안해하는 목소리가 나오니 진짜 그렇게 보이는 것 같았다.
다들 첫 점프를 기다렸다. 깔끔하게 성공. 김평코 코치는 "그림이 (아사다 보다) 더 예쁘네"라고 말했다. 진갑용은 "밸런스 죽인다"라고 한 뒤 두번째 점프 직후에는 "오우~, 나이스!"하고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최규순 심판원이 "이거 무슨 한국시리즈 7차전 같은 분위기네. 긴장 엄청 되네" 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끄덕. 기자가 이 장면을 촬영하자 누군가 "기사 나온다, 나온다"라고 말해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어려운 점프를 모두 마친 김연아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자 삼성 김정수 매니저는 "빨리 총 쏴라, 총 쏴라" 했다. 요즘 한국 사람치고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는 이가 있을까.
▶싱거운 마무리?
김연아 차례가 끝났다. 일본어에 능한 선 감독이 상황을 설명했다. "일본 해설자도 '역시 김연아네요'라고 말하네."
은근히 낮으면서도 뚜렷하게 "칠.십.사, 칠.십.사" 하는 목소리가 하나둘씩 들리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점수 등장. 78.50점.
"우~와!" 박수가 터졌다. 대단하다는 얘기가 이어졌다. 그리고는 곧바로 모두 해산, 운동장쪽으로 향했다. 재미있는 건 돌아가는 관전객들의 반응이었다.
"에~이, 께(게)임이 안되는구만", "그럼 그렇지", "이럴 줄 알았다니까" 등등. 잠시 전까지 불안했던 표정들은, 어느새 자부심에서 비롯된 거만한 표정들로 바뀌어 있었다.
야구심판들의 최종 평가. "역시 (김연아는) 비거리가 달라."
전일수 심판원은 "긴장해서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속으로 아사다가 한번 넘어지길 얼마나 빌었는지 모르겠네"라고 했다. 김태한 코치는 25일 "나중에 TV 뉴스를 보니 아사다 연기가 끝난 직후 김연아가 콧방귀 뀌는 것처럼 신경 안쓰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만 긴장했던 것 같다"며 웃었다.
< 오키나와=김남형 기자 star@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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