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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기나는방/문화·애니

[문화]나에게만 콕 박히는 사진 - 푼크툼 ??

푼크툼이란 "로랑 바르트"의 마지막 저서인 "카메라 루시다"에 언급된 용어 입니다.

 

 

바르트는 사진을 스튜디움(studium)과 푼크툼 (punctum)으로 나누고 코드화 되고 일상적인 것을 예를 들어 어떤 사진속의 여인이 아름답다든지 하는 정보에 관한것이라 든지 이런것을 스튜디움이라 하였고

코드화 될수 없는 사진의 어떤 작은 요소가 자기의 마음을 찌르는것 , 작은 구멍, 작은 반점 , 작은 흠을 푼크툼이라 하였습니다.

타인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사진이 자신에게는 가슴을 찌르고 오랫동안 응어리가 지는 요소를 푼크툼이라 하였습니다.

 

카메라 루시다에 있는 글을 옮겨 보겠습니다.

 

"많은 사진들이 유감스럽게도 내가 보기에는 생기가 없다. 나의 눈에 어떤 실재를  지닌것처럼 보인 사진들 중에서도 대부분은 막연한 흥미 말하자면 세련된 흥미만 을 불러일으켰을 뿐이다.

그런사진에는 푼크툼이 없었다 .또 나의 마음에 드는것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어쨌든 나의 가슴을 찌르지는 못했다.

스투디움은 나른한 욕망 , 잡다한 흥미, 분별없는 취향 따위의 지극히 넓은 영역이다.........

사진은 위험한 것인데 스투디움은 그것을 코드화 시킴으로서 사회와 환원해 준다....."

 

"푼크툼은 세부 다시 말하면 부분적인 대상이다. 또한 푼크툼의 실례를 보여준다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무방비 상태로 찔릴 때의 적나라함으로 나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다.......

이 하찮은 세부가 온통 사진에 관한 나의 시선을 흥분시킨다.그것은 나의 관심의 격렬한 변화 하나의 섬광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푼크툼은 코드로는 해독될 수 없는것 언어 이외의 영역이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개개인 마다 푼크툼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요.

마들렌과는 다른것으로 이책이 바르트의 마지막 저서 이기에 바르트로 이와 관련한 언급은 없었습니다

 

 

<지식인에서 푼크툼을 검색해서 나온 답 >

 


 

 

스투디움과 푼크툼

 

롤랑 바르트는 그의 저서 (카메라 루시다) 를 통해 사진미학을 구분하는 잣대로서 스투디움 과 푼크툼 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스투디움 (studium) 이란 대상에 대한 호의와 맥락적 관심은 있으나 특별한 강렬함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감정을 의미한다. 즉 외부로부터 길들여진 문화적을 앎 을 전제로 한 가장 일반적인 사진감상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비에 라틴어로 ()을 의미하는 푼크툼(punctum)은 순간적으로 꽂히는 어떤 강렬함을 의미한다. 즉 사진의 세부적인 구성요소 등을 통해 감상자의 뇌리 속으로 불현듯 찾아오는 정서적 울림이 바로 푼크툼이라 할 수 있다.

 

푼크툼은 보편적이고 분석적인 맥락 이전에 감상자의 개인적 취향이나 경험, 잠재의식 따위와 연결되어 순간적으로 찾아오는 강렬한 자극이다.

따라서 푼크툼을 관통하는 미학적 특성은 논리성이라기 보다는 우연성이다.

 

롤랑 바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사진은 위험한 것이지만, 스투디움은 대상을 코드화시킴으로서 사회와 화해시킨다. 푼크툼은 세부, 다시 말하면 부분적인 대상이다. 이 하찮은 세부가 사진에 관한 나의 시선을 흥분시킨다. 그것은 관심의 격렬한 변화, 하나의 섬광이다.

 

 

 < 야후블로그에서 >


 

 

아래는 - 롤랑 바르트와 그의 저서에 대해서 설명된 글입니다.

 

 

 

롤랑 바르트(프랑스,1915~1980)

 

 

 

동성애자였던 롤랑 바르트는 현대 비평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1980년 3월 26일 교통사고가 난지 한 달만에 병원에서 사망했다. 처음에는 별 심각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회복을 위해 별 다른 노력도 하지 않아서 자살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마치 과거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것처럼, 교통사고 후 자신을 죽도록 내버려 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이 든다. 같은 해인 1980년에 <밝은 방>이 출간되었다. 사진에 관한 이 글은 <카이에 뒤 시네마>紙의 청탁과 어머니의 죽음이 계기가 되어 거의 두 달만에 탈고하였다. <카메라 루시다>에는 어머니와 죽음에 관한 언급이 많이 나온다. 이 글을 읽어보면 바르트는 그 이전의 일일이 기호로 해독하는 사진분석이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닌가, 즉 이제껏 자신의 연구가 허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 책의 주제도 '죽음'이 아닐까. 바르트가 마지막으로 끌어안았던 문제는 '삶과 죽음'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는 '사진'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개인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사진의 의미가 텍스트를 요리조리 뜯어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차원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보편적인 논리에 따라 정리되고 그 근거를 논리적으로 추론하는 것이 일반적인 학문의 성격이다. 그러나 롤랑 바르트는 개별적인 학문을 연구하는 것에 관심을 둔 것처럼 보인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와 정 반대의 입장 즉 모든 근거를 자신에게서만 찾는 학문을 언급하며, 이 글에서의 이야기도 철저하게 바르트 개인의 관심을 토대로 씌어지고 있다. 따라서 바르트는 죽음 이전에 자신이 이전까지 해 온 연구와는 막다른 지점을 이 책에서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외상적인 것, 찌르는 것, 충격적인 것, 비문명화 되어있는 것, 코드로는 해독할 수 없는 것, 언어 이외의 영역 등을 자주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종류의 것들은 그 동안 바르트의 연구와는 상당히 대조적인 것으로서, 왜 그가 이토록 여기에 집착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혹시 어머니의 죽음과도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자신의 죽음을 정말 예견하고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을 남기는 부분이다. 이 책이 바르트 생전에 집필했던 마지막 책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성급한 결론은 내릴 수가 없지만, 죽음을 앞둔 그가 왜 이토록 사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으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폭넓게 이해해야할 필요가 있다.

 

이책에서 바르트는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이런 사진들에 대해 때로는 감동적인, 일종의 일반적인 흥미를 느낄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 감동은 도덕적 . 정치적인 교양이라는 합리적인 중계를 거친다. 내가 이 사진들에 대해 느끼는 것은 거의 길들이기에 가까운 '평균'감정 상태에 속한다... 그것은 스투디움이라는 말인데 무엇에 대한 전념, 누군가에 대한 호의, 즉 일반적인 정신 집중을 의미한다. 여기서 스투디움은 코드화될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 "두 번째 요소는 스투디움을 깨뜨리기 위해 혹은 스투디움과 박자를 맞추려고 온다. 이번에는 내가 이 요소를 찾지 않고 그것 스스로가 마치 화살처럼 사건의 현장을 떠나 나를 꿰뚫기 위해서 온다. 이 낙인들, 이 상처들은 점이다. 이 요소를 나는 푼크툼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푼쿠툼은 그 자체가 나를 찌르는, 또한 나를 상처 입히고 주먹으로 때리는 이 우연이다." 여기서의 푼쿠툼은 코드화 될 수 없는 것이다. 

 

'바르트는 왜 이렇게 스투디움과 푼쿠툼으로 나누고, 푼쿠툼에 집착했을까? 그것은 어머니의 죽음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왜 그는 먼저 썼던 시를 최소하는 시인 개영시를 써야했다고 할만큼, 이제까지의 자신의 연구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들을 하고 있을까'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 봐야겠다.

 

1부의 끝에서 바르트는 "이처럼 이 사진 저 사진을 살펴보는 동안, 나는 아마도 내 자신의 욕망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를 깨달았겠지만, 아직도 사진의 본질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나의 기쁨은 불완전한 중재인이었음을, 향락주의적인 계획으로 축소된 보편적인 것을 알아볼 수 없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나는 사진의 자명성, 사진을 바라보는 어떤 사람이라도 볼 수 있는, 그리고 그가 보기에 그것을 모든 다른 영상과 구별시켜주는 이 자명성을 찾아내기 위해서, 내 자신 속으로 더 깊이 내려가야만 했다. 나는 나의 개영시를 써야만 했다."라고 말하고 있다.

 

2부의 끝에서 그는 "사회는 사진을 길들이려 하고, 사진을 바라보는 사람의 얼굴에서 끊임없이 폭발하는 사진을 예술로 만드는 것인데. 왜냐하면 예술은 결코 광기가 없기 때문이다. 사진을 길들이는 또 다른 방법은 일반화시키고 군생시켜 진부하게 만드는 거인데, 그렇게 함으로써 사진은 스스로를 표지할 수 있게 된다. 광기를 택할 것인가, 분별을 택할 것인가? 사진은 전자도 될 수 있고, 후자도 될 수 있다... 사진의 두 길은 그와 같은 것이다. 그 광경을 완전한 환상의 문명화된 약호에 종속시킬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통해 완강한 형실성의 깨어남과 마주칠 것인가는 내 자신의 선택에 달린 일이다"라고 쓰고 있다.

 

결론에서, 바르트는 1부의 끝에서 이제까지 자신이 해왔던 모든 연구들을 취소하고 막다른 지점에서 다시 시작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언어의 영역으로 환원될 수 없고 코드화될 수 없으며 일반화될 수도 없는 어떤 금기들을 관심에 놓고 있었다. 그것은 어머니의 죽음에서 받은 일종의 외상일 수도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들이 다분히 나올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결론을 정확하게 내리는 것은 불가능 할 것이다.

 

바르트는 죽음 직전에 왜 그렇게 사진에 집착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마지막 저서였던 이 글은 과거의 바르트의 연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그것들의 연관성은 무엇이며, 마지막으로 그가 말하려 했던 것은 어떤 것일까 하는 텍스트의 복합적인 면에 대해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야 할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정답을 내릴 수가 없지만, 결국 바르트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금기의 영역, 코드화 될 수 없는 영역, 길들여질 수 없는 영역, 사회 속에서 소통될 수 없는 그런 영역 즉 '죽음'도 될 수 있고 그 외 다른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잇는 것에 대한 언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평생동안 그 반대의 영역, 즉 언어의 영역, 코드로서 소통될 수 있는 영역에 대한 논의만 해왔던 바르트가 이제까지의 모든 것들을 접고 또 다른 지평을 열어나가기 위한 시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글을 쓴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새싹을 하나씩 나눠주는 일이다."- 롤랑 바르트

 

 

 

 


 

 

롤랑 바르트는 - 프랑스의 작가인데 처음으로 '기호학 '강좌를 개설한 교수이기도 합니다.

어학에서 기호학은 굉장히 중요한 파트이기 때문에 - 저희 집에도  롤랑 바르트의 기호학 책이

원서로 여러 권 있습니다....만, 롤랑 바르트가 사진에도 이렇게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군요.

 

이분의 기호학 개론 - << Eléments de sémiologie>>(1965) 은 언어학에서 필독서입니다.

 

지금 검색해보니 이 분은 아주 다재다능하여서 연주도 하고 그림도 그렸다고 나옵니다.

오브비와 옵투스L'Obvie et l'obtus》(1982)에서 슈만톰블리(C.Y. Twombly)를,

<밝은 방: 사진에 대한 노트La Chambre claire. Note sur la photographie>(1982) 에서 사진을 다루었다고.

 

 

 

 

폰크툼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 롤랑 바르트가 설명한 그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지는 몰라도

막연한 어떤 의미의 덩어리로써 제게도 느낌이 옵니다. 

 

근데 이 푼크툼이라는 것이요 - 음악에도 있고, 향수에도 있는 것 같습니다. ^ ^

 

롤랑 바르트의 또 다른 이야기들 -

 

 

 롤랑 바르트는 [기호의 제국]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 얼굴은 ‘인용’이 아니라면 또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의 헤어스타일, 화장하는 방식, 기분에 따라 즐겁거나 불쾌함을 나타내는 표정 등은 독창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모두 다른 얼굴로부터 ‘인용’된 것이다 

 

 

롤랑바르트, <사랑의 단상> 중에서 :  롤랑 바르트에 의하면 '기호'라는 체계에는 아무리 관능, 혹은 쾌락, 그러니까 주이상스jouissance를 자기 '코드' 안에 포함시키고 통제하려 해도 어쩔 수 없이 밀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부분으로 남아 있는 것이 있다. 요컨대 그것은 '틈새'이다. 기호의 틈새.! 독서 행위에 의해서 독서 행위와 만나게 되고, 일단 그 잉여부분과 만나게 되면 기호의 운동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주이상스의 개념에 관해서 그는 충분히 '정신분석학'을 따르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롤랑 바르트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예로 들고 있다. 그/녀들은 문법에 맞게 얘기하지 않는다. 그/녀들의 '말'들은 파편들로서만 존재하지 않는가. 그/녀들은 일반적인 체계의 문법에 맞게 얘기하지도 않는다. signification의 문법을 가지고는 얘기할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언어, 기호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다. 확연히 다르게. 의미화signification가 아니라, 의미작용signifiant으로서! (롤랑 바르트의 '텍스트론'에 의하면 독서는 기호의 의미화 체계를 의미작용으로 치환시켜주는 주요한 행위이다. 그러므로 '읽기'는 중요하다.)

의미작용signifiant으로 '소통'하는 것은 감정과 신체,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말투들! 바로 그 정제되지 않은 단말마적인 비명과 외침, 혹은 통렬한 고백의 언어가 구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방식으로 말하자면,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에 빠졌지만 응답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사랑의 구렁텅이에 완전히 빠져 있지만 '응답'받을 수 없는 사람들, 그래서 항상 '연인'을 '부재'로서만 가질 수 밖 에 없는 사람들 말이다. 하기에 연애라고 하는 것은 부재에 의해서 성립되는 행위인 것이다.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끊임없이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끊임없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욕망은 갈 데가 없어 또 욕망을 불러들인다. 그래서 기호는, 즉 기호운동은 반복된 욕망의 순환으로서, 요컨대 결코 '도착'할 수 없는 욕망의 체인 안에서 수행된다. 다시 돌아가자면, 그것이 바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쏟아내는 파편화된 중얼거림, 주절거림인 것이다.

 

윗 글은 기호학이 의미론과 맞닿은 부분들입니다...

 

 

그 사람을 위해 글을 쓰지 않으며, 내가 쓰려고 하는 것이 결코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을 받게 하지 않으며, 글쓰기는 그 어떤 것도 보상하거나 승화하지 않으며, 글쓰기는 당신이 없는 바로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이 곧 글쓰기의 시작이다."

-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 중에서. By 롤랑 바르트

 

독서에 관해 바르트가 한 이야기 : '하나의 이야기에서 내가 음미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그 내용이나 구조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그 아름다운 겉봉투 위에 입힌 상처이다." (59, 텍스트의 즐거움, 바르트 저 )

 

 

롤랑 바르트에게 학문이란....

그러므로 제가 살기를 원한다면 제 육체가 역사적이라는 걸 망각해야 하며, 제 자신의 육체, 제 과거의 육체가 아니라 현존하는 젊은 육체들과 동시대의 것이라는 환상 속에 자신을 내던져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 주기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고, 현재의 나이보다 더 젊어져야 합니다.

미슐레는 51세에 그의 새로운 삶을, 새로운 일을,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습니다.

그보다 더 나이를 먹은 저 역시 오늘 이 새로운 곳, 이 새로운 환대로 새겨진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의 힘, 즉 망각에 자신을 내맡기려 합니다.

한때 우리가 아는 것을 가르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이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가르치는 시기가 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연구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어쩌면 배운 것을 잊어버리는,

또는 우리가 관통한 지식이나 문화, 믿음의 침전물에

망각이 부과하는 그런 예측불허의 수정작업을 허용하는 또 다른 체험의 시기가 온지도 모릅니다.

이 체험은 잘 알려진, 그러나 유행에 뒤진 한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

바로 그 어원의 교차로에서 저는 스스럼 없이 그 말을 다시 쓰고자 합니다.

즉 예지라는 말을.

어떤 권력도 존재하지 않으며,

약간의 지식과 약간의 지혜,

그리고 가능한 많은 맛을 가진 그 말을.

 

 

롤랑바르트/김희영 역: 텍스트의 즐거움(2002) 142-143쪽  

 

 

사진을 찍을 때 내가 유일하게 받아들이고 좋아하는 것, 
                        나에게 친숙한 것은 카메라의 셔텨 소리이다. 
                        나는 이 기계적인 소리를 거의 관능적으로 사랑한다.

                        사진에 관심을 갖게된 이유로는 오직, 
                        사진이 사랑하는 대상의 모습을 찍을 수 있게 해준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다른 이유도 없었다. 
                        나는 구경꾼으로서, 감정에 의해서만 사진에 흥미를 느꼈다. 
                        사진에 질문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의 상처로서 깊이 파고들고 싶었다.


                        나는 눈으로 보고 느낀다. 
                        그러므로 구별하고, 바라보고, 그리고 생각한다. 
                        사진은 그 흔해빠진 수다스러움, 시끄러움, 번잡함으로부터 끌어내어준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것, 눈을 감을 것, 하찮은 세부로 하여금, 
                        홀로 감정적 의식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도록 내버려 둘 것.


                      _롤랑바르트. 카메라루시다.

 

 

 <사랑의 단상 중에서 >

 

기다림 파트 중 -..

"나는 사랑하고 있는 걸까? ㅡㅡ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 사람,  그 사람은 결코 기다리지 않는다.

때로 나는 기다리지 않는 그 사람의 역할을 해보고 싶어한다.

다른 일 때문에 바빠 늦게 도착하려고 애써 본다.

그러나 이 내기에서 나는 항상 패자이다.  무슨 일을 하든간에

나는 항상 시간이 있으며, 정확하며, 일찍 도착하기조차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



질투 파트 중-


질투하는 사람으로서의 나는 네번 괴로워하는 셈이다.

질투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질투한다는 사실에 대해

자신을 비난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내 질투가 그 사람을

아프게 할까봐 괴로워하며,  통속적인 것의 노예가 된 자신에

대해 괴로워 한다.  나는 자신이 배타적인,  공격적인,  미치광이같은,

상투적인 사람이라는 데 대해 괴로워하는 것이다.

 

 


검색을 하면 할수록 언어학이나 의미론, 철학 등 분야 이외의 포스팅에서 롤랑 바르트를 만나게 됩니다 ;;;;

 

 

 

이 사진은 - PURPLE MAGAZINE 에 실린 사진인데  1978년 의 파리 나이트 클럽 the palace 에서 찍은 씬 -

 

 

 

이건 까뮈(설마 이방인,에트랑제를 모르시진 않겠죠??;) - 아주 밝은 모습인데 -  위의 사진과 같은 날에 찍힌 것.

 

롤랑 바르트의 '작은 사건들' 이라는 저서를 보면 the palace 클럽에 대한 예찬글이 있다고 합니다.

 

 

'나는 아무리 아름다운 장소라해도 ,사람이 없는 장소엔 관심이 없다는걸

고백해야 겠다.(그래서 텅빈 박물관을 좋아하지 않는다.)

역으로 내가 하나의 얼굴 ,하나의 실루엣,한벌의 옷에 흥미를 느끼는 때는

그 장소 역시 흥미와 멋을 갖춘 곳일 경우이다.

...........................................................

팔라스에서는 장소와의 실감나는 관계를 맺기 위해서 반드시 춤을 출 필요가 없다.

쓸쓸히 혼자서 ,또는 사람들로 부터 약간 떨어져서 '꿈'을 꿀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 공간에서 ,어느순간

"모든것이 어쩌면 이렇게 다 기묘할까!"하고 외칠수도 있다.'

 

이 글또한 1978년 vogue homme 10월호에 기고한 글이라고 - 또한 놀라는 사실. 보그지에도 롤랑 바르뜨가 기고를 했다고?

전공서적 속의 엄숙한 학자로만 대했던 그가 클럽에 있는 사진도 놀랍지만, 보그지와 패션에 대한 그의 관심을 보게 된 것도

놀랍습니다.;;

 

사진을 좋아했다니 외형적인 부분, 실루엣에 관심이 없었을리가 없겠군요.

 

생전에도 -동성애자임을 밝히기 전에도 - 젊고 아리따운 청년들을 흠모한다고 말했었는데  양 쪽에 끼고 있는 미청년들의

모습이 일단 눈에 들어오고 - 흑백인데도 미청년들은 시대를 초월해서 참 알흠답습니다려 -

 

팔라스에 대한 롤랑 바르트씨의 또 다른 구절

 

'푸루스트라면 팔라스를 좋아했을까?

모르겠다. 이젠 더 이상 귀부인들이 없으니.'

 

 

사랑의 단상 중에서 -

 

사랑 이야기(또는 모험)란,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과 화해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공물이다.

 

기다리고 있고, 또 그로 인해 괴로워하는 남자는 놀랍게도 여성화되어 있다. 성도착자여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여성적인 것이다.

 

불교의 한 공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스승이 제자의 머리를 오랫동안 물속에 붙잡고 있었다. 점차 물거품이 희박해지고,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스승은 제자를 꺼내어 되살린다. 네가 지금 공기를 원했던 것처럼 진실을 원할 때, 너는 비로소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리라.'

 

라캉 '당신의 욕망에 정확히 부합되는 이미지를 만난다는 것은 매일 있는 일은 아니다.'<세미나>

 

나는 도착을, 귀가를, 약속된 신호를 기다린다. 그것은 하찮은 것일 수도 있지만 아주 비장한 것일 수도 있다. 쇤베르크의 <기다림>에서는 밤마다 한 여인이 숲속에서 그의 연인을 기다린다. 그러나 나는 다만 한 통의 전화만을 기다릴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동일한 고뇌이다. 모든 것은 엄숙하다. 내게는 크기에 대한 감각이 없다.

 

<베르테르>는 X 영주에 대해 불평한다. '영주는 내 정신과 재능을 내 마음보다 더 높이 평가한다네. 그러나 내 마음만이 내 유일한 자랑거리인데... 아!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누군들 모르겠는가? 하지만 내 마음, 그것은 나만이 가지고 있겠지.'

 

질투란 교환 가능한(결정할 수 없는) 세 가지 사랑의 방정식이다. 우리는 항상 동시에 두 사람에 대해 질투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또 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세상은 이렇게 내가 더불어 그 사람을 공유해야만 하는 염치없는 이웃들로 가득 차 있다. 세상이란 '공유의 구속'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세속적인 것)은 내 적수이다. 나는 끊임없이 이런 불쾌한 것들로 방해받는다. 어쩌다 우연히 알게 된 사람이 억지로 우리 식탁에 와 앉거나, 또는 그 사람이 옆에 앉은 사람들의 저속한 대화에 정신이 팔려 내가 말하는지 어떤지도 알지 못할 때, 또는 하나의 물건, 이를테면 한 권의 책조차도 모두 불쾌한 것이다.

 

나는 이미지를 변질시키러 오는 것은 모두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의 피로를 두려워한다. 피로란 경쟁 상대 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것이다. 어떻게 피로에 대항해 싸울 수 있단 말인가?

 

질투하는 사람으로서의 나는 네 번 괴로워하는 셈이다. 질투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질투한다는 사실에 대해 자신을 비난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내 질투가 그 사람을 아프게 할까 봐 괴로워하며, 통속적인 것의 노예가 된 자신에 대해 괴로워한다. 나는 자신이 배타적인, 공격적인, 미치광이 같은, 상투적인 사람이라는 데 대해 괴로워하는 것이다.

 

 
'난 널 사랑해'에는 여러 가지 사교적인 대답이 있을 수 있다. '난 사랑하지 않아요.' '당신 말은 한마디도 믿지 않아요.'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등등. 그러나 진짜 거절은 '대답 없음'이란 말이다.

자폐증에 걸린 아이들은 자주 물건을 만지작거리는 자신의 손을 쳐다본다고 한다(물건 자체는 쳐다보지 않은 채). 이것이 비틀기이다. 비틀기는 놀이가 아닌, 상투적인 것과 강박적인 것으로 특징지어지는 하나의 의례적인 조작이다. 이처럼 다변에 사로잡힌 연인도 자신의 상처를 만지작거린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사랑의 대상의 눈에 자기보다 우월하게 보이거나 동등한 자가 나타나면 참지 못해 모든 경쟁자를 깎아내리려고 애쓴다. 그는 사랑의 대상을 다른 많은 관계들로부터 고립시키기 위해 교활한 계략을 써서 연인을 무지 속으로 몰아넣고, 오로지 자신을 통해서만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는 남몰래 연인이 그의 소중한 사람들, 아버지, 어머니, 친척, 친구를 잃기를 바라며, 집도 아이도 없기를 바란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단한 출현은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며, 낮이나 밤이나 그는 잠시도 혼자 떨어져 있기를 원치 않는다. 나이가 들어도(늙음이란 그 자체가 귀찮은 것이다) 그는 포악한 탐정처럼 행동하며, 심술궂게도 연인을 감시하는 일을 조금도 멈추지 아니한다. 그러나 자신이 장차 불충실해지거나 배반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가 무엇을 생각하든간에 그의 마음은 이렇듯 사악한 감정으로 채워져 있다. 그의 사랑은 관대한 것이 아니다.

잡담은 진실의 소리이며, 또 이 소리는 마술적이다. 그 여자 친구는 충고한다는 구실하에 예언하고 강요하는 심술궂은 마녀이다.

왜 사랑하는 사람은 왜 자신이 사랑받지 못하는가를 집요하게 자문하면서도 동시에 사랑하는 이가 자기를 사랑하면서도 다만 말하지 않고 있을 뿐이라는 믿음 속에 살아간다.

상처가 깊으면 깊을수록-육체의 중심부(심장)까지-주체는 더욱 주체가 된다. 왜냐하면 주체란 내면성 그 자체이기에.('상처란 무시무시한 내면성이다')

나를 매혹하고 황홀케 하는 것은 어떤 상황 속에 있는 육체의 이미지이다. 내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작업하는 모습이 나를 흥분케 한다.

"그렇지만 당신이 이제 떠난다면, 이 테두리로부터 멀어진다면, 당신이 없음으로 해서 그들 운명에 생길 공허를 당신 친구들은 느낄까? 얼마나 오랫동안?"


내가 그 사람의 얼굴에서 끈질기게 그 대답을 요구하는 것은 난 당신에게 어떤 가치가 있죠? 라는 질문이 아닐까?

나는 아주 조그만 상처에도 자살하고 싶어한다. 사랑의 자살에는 잘 생각해 보면 동기가 없다.

하루의 일과를 끝낸 식당 종업원들은 내일을 위해 새로이 식탁을 준비한다. 똑같은 하얀 식탁보, 똑같은 식기, 똑같은 소금병. 그것은 자리와 교체의 세계이지, 그대로의 세계가 아니다.

L...은 바이에른의 어느 식당에서 A...가 커틀릿을 주문하면서 식당 종업원에게 그토록 자기를 감동시켰던, 똑같은 천사 같은 눈길, 똑같은 다정한 시선을 보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사랑은 눈을 멀게 한다라는 속담은 거짓말이다. 사랑은 오히려 눈을 크게 뜨게 하며, 명석하게 만든다. '나는 당신에 대해, 당신에 관해 절대적인 앎을 갖고 있다.' 서기가 주인에게 보내는 보고서:" "주인님은 저에 대해 모든 권리를 갖고 있지만, 저는 주인님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습니다."

도: 그는 자신을 과시하지 않기 때문에 빛날 것이요,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기 때문에 위압할 것이다. 그의 작업이 성취되었다 할지라도 거기에 집착하지 아니하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의 업적은 길이 남으리라.<도덕경>



롤랑 바르트는 살아생전에 한 강의실에서 학문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테러리스트가 되기보다는 자신의 내면적 성찰을 우선하는 에고이스트가 되겠다는 그의 발언과 그 뒤를 이은, 바르트가 소설을 쓸지도 모른다는 그 파다한 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