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향기나는방/문화·애니

[과학] 엔리코 페르미 -

 

엔리코 페르미(이탈리아어: Enrico Fermi, 1901년 9월 29일 ~ 1954년 11월 28일)은 이탈리아 출신의 미국물리학자이다. 20세기 이후의 물리학자로서는 드물게, 실험과 이론 양쪽 방면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193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노벨상 수상 시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이었던 이탈리아를 빠져나와 스톡홀름에서 상을 받은 후 아내인 로라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유대인 박해를 피해 그대로 미국에 망명했다. 미국에서 핵분열 반응을 연구했으며, 맨해튼 계획에도 참여하여 원자폭탄을 개발했다. 핵시대의 주요개척자 중 한 사람이었다. 원자 내부에서 일어나는 많은 현상을 명확히 하는 데 필요한 수학적 통계를 발전시켰고 중성자 유도 방사능을 발견했으며 최초의 제어된 핵연쇄반응을 지휘했다.

원자 번호 100번 원소는 그를 기려 페르뮴으로 명명되었고 미국 에너지부의 엔리코 페르미 상은 그를 기념하여 주는 상이다.

 

 

 

 

 

 

 

 

 

 

 

 

 

 

 

 

출생                1901년 9월 29일

                       

                   이탈리아 왕국 로마

 

사망                1954년 11월 28일 (향년 53세)

                       

                       미국 시카고

 

분야                        물리학

 

 

소속                        피사 고등사범학교

                               괴팅겐대학교
                               라이덴대학교
                               로마 라 사피엔차 대학교
                               컬럼비아대학교
                               시카고대학교

 

 

모교                         피사 고등사범학교

 

국적                  이탈리아

                       미국

 

지도 교수                  막스 보른

                                루이지 푸시안티

 

업적                          중성자 유도 방사능 발견

                                 핵 연쇄 반응 제어

                                 페르미-디랙 통계

                                 베타 붕괴

 

수상                          마테우치 메달 (1926)
                                 노벨 물리학상 (1938)
                                 휴즈 메달 (1942)
                                 럼포드 상 (1953)

 

서명                 

 
 

생애

 

-교육과 초기경력
 

페르미는 철도 종업원이었던 알베르토 페르미와 이다 데 가티스의 3자녀 중 막내였다. 고등학교시절 활동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천재였던 그는 물리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17세에 고등사범실업학교에 들어갔는데 이 학교는 피사대학교와 제휴하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X선을 연구한 논문으로 21세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로마를 잠시 방문한 후 이탈리아 대중 교육부의 장학금으로 독일 괴팅겐대학교의 물리학자 막스 보른 밑에서 공부했는데, 양자역학에 대한 보른의 공헌은 페르미의 후기 연구에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던 지식의 일부였다. 그뒤 피렌체대학교로 돌아가 수학을 가르쳤다.

 

1926년 완전하고 가상적인 기체 움직임에 관한 그의 논문을 인정한 로마대학교의 물리학과에서 그를 이론물리학 정교수로 초빙했다. 페르미는 단시간 내에 새로운 일군의 물리학자를 끌어모았는데 이들은 모두 20대 초반이었다. 1926년 같은 방식으로 기술되어질 수 있는 원자구성입자가 1개 이상 존재할 수 없다는 파울리의 배타원리에 따라 전자의 특성을 예측하는 통계적인 방법을 개발했다. 1928년 로라 카폰과 결혼하여 1931년 넬라, 1936년 줄리오를 두었다. 이탈리아 왕립 아카데미는 1929년 그의 업적을 인정하여 최연소 회원으로 선출했다.

 

로마대학교 시절 그에게는 이론적 연구가 최고로 중요한 관심사였으나 새로운 발견들로 인해 실험물리학으로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1932년 중성자라고 하는 전기적 중성입자의 존재가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제임스 채드윅 경에 의해 발견되었고, 1934년 프랑스의 졸리오 퀴리 부부가 폴로늄으로부터 방출되는 양전하를 띤 헬륨 원자핵인 알파 입자를 원소에 충돌시켜 처음으로 인공방사능을 만들어냈다.

 

이 연구에 감명을 받은 페르미는 인공방사능을 유발하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냈는데, 방사성 베릴륨에서 나온 중성자를 파라핀에 통과시켜 속도를 감속시킴으로써 느린 중성자가 방사성 입자를 방출시키는 데 특별히 효과적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일련의 원소들에 이 방법을 성공적으로 이용했다. 그러나 원자량 92의 우라늄을 느린 중성자 충돌의 표적으로 이용했을 때 미확인된 이상한 방사성 물질을 얻었다. 페르미의 동료들은 그가 원자번호 93의 새로운 '초(超)우라늄' 원소를 실제로 만들어냈다고 믿고 싶어했다. 즉 충돌이 일어나는 동안 우라늄의 핵이 중성자를 포획하여 그 원자량이 증가했다는 것이다.

 

페르미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주장하지 않았는데, 실제로 자신이 세계를 뒤흔들어놓을 발견을 할 찰나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가 수년 후에 조심스럽게 말했듯이 "우리는 다른 붕괴과정이 어떤 다른 원소가 아닌 우라늄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충분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더욱이 생성물질을 서로 분해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화학을 알지 못했다"라고 했으며, 그의 조수 중 한 명은 "신은 그의 불가사의한 목적을 위해 모든 사람들이 원자 핵분열 현상을 모르게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1938년말 페르미는 '중성자를 충돌시켜 만들어낸 새로운 방사성 원소를 확인하고 느린 중성자에 의해 일어나는 핵반응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지명되었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부는 그가 상을 받기 위해 스웨덴으로 여행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이미 비밀리에 계획했던 대로 그와 그의 가족들은 파시즘을 싫어했기 때문에 이탈리아를 떠나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38년 3명의 독일 과학자들이 페르미의 초기실험을 반복했다. 오토 한, 리제 마이트너, 프리츠 슈트라스만은 우라늄을 느린 중성자로 충돌시킨 후 형성된 생성물을 조심스럽게 화학적으로 분석했다. 1939년 1월 6일 그들은 우라늄 원자가 여러 조각으로 쪼개졌다고 보고했다. 수리물리학자였던 마이트너는 비밀리에 독일을 빠져나와 스톡홀름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그녀는 조카인 오토 프리시와 함께 이 새로운 현상을 우라늄 원자핵이 바륨과 크립톤, 그리고 작은 양의 다른 붕괴 생성물로 쪼개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들은 과학잡지 〈네이처 Nature〉에 편지를 보냈고 그들의 보고서는 1939년 1월 16일 발행되었다. 마이트너는 이 핵분열이 우라늄의 질량 중 일부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질량-에너지 방정식에 따라 에너지로 전환되어 광대한 양의 에너지를 방출시키는 것임을 깨달았다.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은 에너지(E)가 질량(m)과 광속의 제곱(c2)의 곱과 같다는 것으로, E〓mc2으로 표현된다.

 

 


-미국에서의 활동

뉴욕에 도착한 직후 이 사실을 알게 된 페르미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뉴욕 시에 도착하는 닐스 보어를 마중하기 위해 서둘러 갔다. 한-마이트너-슈트라스만의 실험은 컬럼비아대학교에서 반복되었고 심사숙고 끝에 보어는 핵연쇄반응의 가능성을 제안했다. 다른 형태의 우라늄과 원자량이 다른 우라늄-235 동위원소가 그러한 연쇄반응에 가장 효과적인 원자라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페르미, 레오 실라르드, 유진 위그너는 아돌프 히틀러의 과학자들이 핵연쇄반응의 원리를 원자폭탄의 생산에 응용한다면 세계 평화에 위험이 닥치리라는 것을 예측했다. 그들은 편지를 작성해 아인슈타인의 사인을 받은 다음 1939년 10월 11일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내 이 위험에 대해 경고했다. 루스벨트는 그들의 경고에 따라 행동했고 1942년 마침내 최초의 원자폭탄 생산을 위한 맨해튼 계획이 체계화되었다.

 

페르미에게는 제어된 지속적인 핵연쇄반응을 만들어내는 임무가 부여되었다. 그는 자신이 원자로라고 부른 필수적인 기구를 고안했고 1942년 12월 2일 과학자 팀을 이끌고 시카고대학교의 스태그필드 지하실의 스쿼시 코트에 설치된 실험실에서 최초의 지속적인 연쇄반응을 일으켰다.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의 앨러머고도 공군 기지에서 최초의 핵기구에 대한 시험이 있은 지 몇 주 후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 시카고대학과학자팀. 앞줄 왼쪽 1번째가 페르미, 앞줄 오른쪽 2번째가 실라르드이다.
 
1944년 거주 요건을 충족시킨 후 페르미 가족은 미국 시민이 되었다. 1946년 그는 시카고대학교의 핵연구 수훈교수가 되었고 의회 공로훈장도 받았다. 시카고대학교의 금속학연구소에서 페르미는 핵입자의 기본 특성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는데 핵을 모으는 힘의 양자화된 형태인 중간자를 특히 강조했다. 또한 시카고대학교에서 큰 입자가속기인 싱크로사이클로트론을 건설하는 데 자문역을 맡았다. 1950년 런던 왕립학회의 외국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 페르미의 로스 앨러모스 국립연구소 소속 배지의 증명 사진.

 

 

페르미는 이론물리학, 특히 원자구성입자의 수학에 매우 독창적인 공헌을 했다. 더욱이 중성자-유도 방사능에 대한 그의 실험적 연구는 핵분열에 대한 최초의 성공적인 실증으로 이어졌는데 핵분열은 핵력(核力)과 원자폭탄 모두의 기본적 원리이다. 1942년 시카고대학교의 원자로는 최초로 태양 이외의 에너지원으로부터 에너지의 제어된 흐름을 방출했는데, 이는 평화적인 목적으로 물질의 기초 결합 에너지를 방출시키는 현대식 원자로의 선조였다. 원소번호 100인 페르뮴은 그의 이름을 따라 명명되었고 엔리코 페르미 상은 그를 기념하여 제정되었다. 1954년 엔리코 페르미 상의 첫번째 수혜자가 되어 2만 5,000달러를 받았다. 1954년 암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링거의 물방울이 떨어지는 간격을 측정해 유속을 산출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 페르미-실라르드 원자로 특허장.
 
업적

전자의 행동에 파울리의 배타 원리를 도입하여, '페르미 통계'라고 하는 새로운 통계역학을 만들어 냈다. 같은 시기에 폴 디랙도 같은 결론을 이끌어냈기 때문에, '페르미 통계'는 '페르미-디랙 통계'로도 불린다. 전자 등, 페르미 통계에 따라 행동하는 입자를 총칭해 페르미 입자 혹은 페르미온라고 부른다. '페르미 통계'는 금속의 열전도나, 백색 왜성의 안정성에 관한 이론적인 기초를 제공한다.

 

중성미자의 존재를 도입하여 베타 붕괴 이론을 완성시켰다.

 

자연에 존재하는 원소에 중성자를 쏘아 40 종류 이상의 인공방사성 동위 원소를 생성했다. 또, 열중성자를 발견해, 그 성질을 밝혔다. 이러한 성과로 1938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942년 세계 최초의 원자로인 '시카고·파일 1호'를 완성시켜 원자핵 분열 연쇄 반응을 제어하는 것에 성공했다. 이 원자로는 원자 폭탄의 재료가 되는 플루토늄을 생산하기 위해 이용되었다.

 

 

 

 

 

 

 <- 이탈리아 로마의 엔리코 페르미 거리 표지판.

 

 

 

 

 

[출처] 엔리코 페르미|작성자 휘참

 

 

하나 더 - 페르미에 관한 이야기 -

 

엔리코 페르미 (Enrico Fermi / 1901~1954)



엔리코 페르미가 14살이 되던 어느 날, 그는 로마 거리의 구 시장 안으로 걸어 들어가 고서적들이 즐비하던 진열대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얼마 후, 그는 흥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1840년에 라틴어로 쓴 물리학 책이었다.
이 어린 책략가는 이미 투영 기하학과 수학에서 쓰이는 다른 도구들에 관해서는 통달한 지 오래되었다. 

다음 이야기는 에밀리오 세그레Emilio Segre가 친구 엔리코 페르미의 전기에 쓴 내용이다.

페르미는 x2 + y2 = r2이라는 공식이 원을 나타낸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 그가 열 살 때 -

이해하려고 한 일이 어려운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고 말했다.

누군가 분명히 그 사실을 말해줬지만, 그 의미는 혼자서 알아내야 했던 것이다.

극좌표 체계를 열 살 난 소년이 이해했다는 것은 분명히 경이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그는 지금 물리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엔리코는 뛰어난 암기력을 가진 덕분에 대개의 경우 책을 한번만 읽으면 그만이었다.
몇 년이 지난 후에도 그는 여전히 단테의 <신곡>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들 대부분을 암송할 수 있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엔리코의 학교 성적은 우수했다.



대학에서 엔리코는 이론에 관한 물리학 문제를 푸는데는 거의 무적에 가까웠다.
그러나 1920년대인 그때까지 물리학자란 결국 실험 물리학자를 의미했다.
엔리코는 엑스선의 회절에 관한 연구를 굽은 크리스탈을 가지고 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에 관한 논문은 그의 박사 학위 취득을 거의 확실하게 했지만, 그는 보다 안전하게 두개의 논문을 제출하였다.



로마 대학에서 직위를 얻은 후, 페르미는 자신의 실험 능력을 개선시키는 데 관심을 돌렸다.
얼마 안 가서 그는 기계적인 것들에 매우 정통하게 되었다. 실제로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한번은 강의 차 미국으로 출장을 간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그는 "나르는 거북"이라는 이름의 자동차를 샀다.
도로에서 차에 어떤 문제가 생겼고 그는 근처 주유소에 차를 세웠다.
엔리코는 아주 능숙하게 차를 수리했고, 이를 지켜보던 주유소 사장은 즉석에서 일자리를 제의했다.
더욱이 이때는 바로 대공황의 한 가운데였다.



페르미의 실험 능력은 곧 보다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32년에 중성자가 발견한 후, 그는 중성자 다발을 쏘았을 때 생겨나는 방사능을 연구하는 그룹의 장이 되었다.
이 그룹은 실험 장치가 나무로 된 테이블 위에 놓였을 때와 비교하여 대리석 위에 놓였을 때 다른 결과를 얻었기 때문에 의아해 했다.
페르미는 대답을 찾았으며 천천히 움직이는 중성자들이 더 큰 방사능을 갖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이 그에게 1938년도 노벨상을 안겨 주었다.



핵분열의 가능성은 Ida Noddack에 의해서 보다 일찍 제의된 바 있었고, 페르미 또한 그 가능성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중성자 다발을 이용한 그의 모든 연구에서 그는 핵분열에 관한 어떠한 증거도 발견할 수 없었다.
후에 핵분열이 발견되었을 때, 페르미는 자신의 부주의로 인한 실수를 크게 나무랐다.



페르미는 콜롬비아 대학의 직위를 받아들였고, 후에는 시카고 대학으로 옮겨갔다.
그는 이 동안 내내 핵분열과 연쇄반응의 가능성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였다.
이 당시 유럽은 한창 전쟁 중이었고 미국은 이탈리아인들을 가리켜 "적국의 국민들"이라고 선포했다.
페르미의 우편물은 검열을 받아야 했고 출국 또한 금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최초의 원자로를 고안해 냈고, 1942년에 이는 임계 상태에 도달하여 28분 동안 1/2와트의 전력을 일으켰다.
다음으로 그는 로스알라모스로 옮겨와 원자폭탄을 설계했다.



페르미의 비상한 암기력과 어려운 문제를 단순화시키는 뛰어난 능력은 때로는 그를 신들린 것처럼 보이게끔 하기도 했다.

만약 페르미가 어떤 문제에 직면하여 정답을 모른다고 해도,

누군가가 몇 개의 숫자를 그에게 들려주면 그는 정답에 눈을 반짝여 맞힐 것이라는 소문마저 돌기도 했다.

문제를 풀어내는 그의 능력은 실로 대단했지만, 말년에는 젊은 물리학자들의 세미나에 참석해서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고 불평을 늘어놓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단지 강연의 마지막 한마디만이 그를 감동시킬 수 있었다. 즉, 그 한마디는 "이것이 바로 엔리코 페르미의 베타붕괴 이론입니다."이었다.

 

재미있는 페르미 에피소드들 중 하나 - 페르미의 역설 , 더보기 안에

 

더보기

페르미 역설 [Fermi's Paradox]

 

1938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이탈리아[파시즘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의 천재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 [Enrico Fermi]. 원자폭탄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계획에도 참여하였고 최초의 원자로를 완성시켰던 그는 세계대전 이후 우주에 관한 연구를 시작합니다. [페르미씨는 암에 걸려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에도 링거액이 떨어지는 간격으로 유속을 계산하고 있었다고 하죠]

 

1950년 여름 로스 알라모스 국립 연구소 [Los Alamos National Laboratory]에서 일하던 페르미는 동료이자 세계적인 과학자들인 에밀 코노핀스, 에드워드 텔러, 허버트 요크와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벼운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덧 주제는 외계생명체로 넘어가게 됩니다. 이 4명의 과학자들은 우주의 크기와 우주의 나이를 계산한 후 외계 지적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때 급속히 이 문제를 계산하던 페르미는 갑자기 이들에게 이와 같이 질문합니다.

 

모두 어디 있지?

Where are they?

 

우주의 나이는 거의 120억년으로 추정됩니다. 지구에 문명이 탄생하기까지 45억년이 걸렸습니다. 현재 지구문명으로 광속의 1%로 여행을 할수 있습니다. 우리 은하 안에는 태양보다 오래된 별들이 수없이 많고 그들의 일부엔 지구형 행성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외계 지적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우리와 교신하거나 우리를 방문할 시간과 기회는 많았습니다.

 

즉 페르미의 역설은 외계 문명이 실존할 확률은 굉장히 높은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외계문명과 접촉한 기록이 극단적으로 부족[전무]한 모순을 이야기 하는 말입니다. 페르미의 역설은 외계 지적생명체가 존재한다는 증거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도 없기 때문에 아직 역설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 역설에 대한 다양한 가설과 규명하기 위한 움직임이 있을 뿐이죠.

 

페르미의 역설에 대한 가설은 크게 세 범주로 나누어 집니다.

0.  외계지적생명체는 존재하나 그들과 조우하지 못했다.

- 우주의 크기 문제 : 그들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조우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기때문에 아직 우리가 그들의 신호를 수신하지 못하였다. 무수히 많은 외계생명체가 있지만 문명이 조우할수 있는 범위내의 문명은 우리뿐이다. 

- 기술적인 문제 : 그들은 신호를 보내고 있지만 우리는 인류는 그것을 수신하는 법을 모른다. 혹은 어떤 주파수에서 들어야 할지 모른다. 이미 우리는 그들의 메세지를 수신했지만 이를 발견하고 해독하지 못하였다. 신호를 놓쳤다던가 구름등에 의해 정말 우연히 신호가 소실거나 그들의 방문이 무산되는 경우와 그들의 과학과 문명이 인류의 상상을 뛰어넘는 경우.

- 외계문명이 우리와의 조우를 거부한다 : 가장유명한건 동물원가설[Zoo hypothesis] 그들은 인류를 동물원과 같이 관리 혹은 보존하기를 원한다. 이의 여러파생가설[금지령가설, 플라네타륨가설 등]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인류를 너무 위험하다고 느끼거나 너무 열등하다고 판단하였거나 너무 이질적이라 조우를 시도하지 않았을 경우. 혹은 그들은 애초 어떤 문명과도 조우할 생각없을 경우.

0.  외계지적생명체는 이미 우리들 속에 있다.

가장 재미있는 가설은 현존하는 인류가 외계생명체다라는 겁니다. [혹은 지구상 어느 특정한 민족들] 어느 종교학자들은 그들이 신으로 군림한다는 가설을 내새우기도 하고 몇몇 사람들은 맨인블랙과 같이 그들이 인류에게 스스로를 알리지 않는다라는 가설을 내새웠죠.

0.  외계지적생명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독교학자들의 말과 같이 이 우주는 인류를 위해 존재한다. 인류가 첫번째 문명이다. 외계생명체는 존재하나 그들은 인류와 같은 고등생명체로 진화하지 못했거나 그들의 문명은  인류와 조우하기엔 열등하다. 외계지적생명체는 존재했지만 그들은 멸망했다. 스스로를 멸망시켰던지 [Doomsday 가설] 조우한 문명끼리 서로를 멸망시켰던지. 지구엔 아직 알아내지 못한 생명을 위한 무언가가 존재한다.

 

페르미 역설이나 SETI 프로젝트는 외계지적생명체가 존재한다면 그들은 우리와 같이 자신들 외의 지적생명체와의 교신을 원할것이다. 라는 걸 전제로 합니다. 비관론자들은 이러한 전제가 맞다는 보장이 없다라는 것을 지적하죠. 우리가 아는 문명이란 우리 인류뿐이기 때문에 이러한 정보의 부족은 충분한 가설도 세울수 없는 수준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황당한 가설부터 꽤나 설득력있는 전문적인 가설까지 우리 인류는 페르미 역설을 풀고자 수없는 가설들을 내놓았지만 지금 우리는 어떤 가설도 증명하거나 부정할수 없다가 결론입니다.


또다른 페르미 추정법에 관한 그의 일화들 - 더보기 안에

 

 

지금 서울 상공의 비행기 수는 몇 대일까요 - 페르미 추정

더보기

오늘 회사에서 같은 파트에 계신 분들과 식사를 하고 들어오던 중 페르마의 정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특이하게도 이야기는페르미 추정에 이르게 되었는데요. 솔직히 말해서 페르마는 파스칼과 으쌰으쌰 하던 그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페르미라는 분은처음 들어봤습니다. 알고보니 우리가 알고 있는 브레인티져 문제들 중 일부 -게스티메이션-가 바로 이 페르미 추정을 의미하던 것이더군요.


<이 분이 바로 엔리코 페르미 - 행복해 보이시네요^^>


3년 전인가. 모 회사 인턴면접에서 나온 질문이 제목과 같은 '지금 서울 상공의 비행기 수는 몇 대일까요' 였습니다. 그래도브레인티져 문제의 방향이 무엇인지 정도는 알고 가서 이렇게 저렇게 풀었었는데 원래 이러한 브레인티져의 출발은 바로 페르미추정이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시카고에 피아노 조율사가 몇명이나 있을까?' 더군요. 아래는 다음 블로그 규니의 잡다한 이야기 출처입니다.


  • 물리학에서 페르미 문제(Fermi Problem) 혹은 페르미 추정이나 0차 근사 (zeroth orderapproximation) 라고 불리는 방법에 대해 배우는데 간단히 말하면 가정이 정확하고, 근사치가 대충 들어맞는다면, 답역시 맞을것으로 예상하는 방법이 있다
  • 페르미가 처음 제기 했던 문제는 '시카고에 피아노 조율사가 몇명이나 있을까?'였는데
  • 1)시카고에 5백만명이 살고
  • 2)시카고에선 1가구 인원이 대충 2명 이므로 250만 가구가 있고
  • 3)주변을 살펴보니 대충 20가구마다 정기적으로 조율하는 피아노가 있을때
  • 시카고에 12.5 만대의 피아노가 있다고할수 있다
  • 4)피아노는 보통 1년에 한번씩 조율한다고 치고,
  • 5)이동 시간을 합쳐 조율사가 한대를 조율하는데는 2시간 정도 걸린다고 가정
  • 6)조율사는 1일 8시간, 주 5일, 1년에 50주 일한다고 하면
  • 50주/년 × 5일/주 × 8시간/일 × 1대/2시간= 1000대/년
  • 피아노 조율사 1명이 1년에 1000대를 손볼수 있으므로, 결론적으로, 시카고에는 대충 125명의 피아노 조율사가 있을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또 다른 유명한 일화는 핵폭팔 현장에서의 폭발위력 추정이었군요. - 보다 자세한 내용 클릭 (출처) 

대략적 내용은 더보기 안에


더보기

1945년 7월 16일, 트리니티 폭발1 현장에서의 관찰

7월 16일 아침, 나는 폭발 지점에서 10마일 정도 떨어진 트리니티 베이스캠프에 있었다.

폭발은 아침 5시 30분 경에 일어났다. 나는 어두운 용접 유리조각을 댄 커다란 보드로 얼굴을 보호하고 있었다. 폭발에대한 내 첫 인상은 매우 강렬한 불빛과, 노출된 내 몸 부위에 닿는 열의 느낌이었다. 나는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갑자기 온지방이 한낮보다도 밝아졌다는 인상을 받았다. 난 이윽고 어두운 유리를 통해 폭발 방향을 바라봤고, 화염이 뭉친 것처럼 보이는무언가가 곧이어 솓구쳐 오르는 것을 목격했다. 몇 초 뒤에, 솓구친 화염은 광채를 잃었으며, 거대한 버섯 모양으로 뻗은 머리를가진 엄청난 연기 기둥은 구름을 뚫고 상승하여 3만 피트 정도에 이르는 높이까지 올라갔다. 최고점에 도달한 뒤에, 연기는 바람에흩어지기 전에 얼마 동안 가만히 멎어 있었다.

폭발 후 약 40초가 지나자, 폭풍이 내게 닿았다. 나는 충격파가 지나가기 이전과, 도중과, 나중에 각각 작은 종이조각들을 약 6피트 높이에서 떨어뜨려 그 폭발력을 추정해봤다. 그 때 마침 바람이 불지 않았기에, 나는 폭풍이 지나가는 도중에떨어진 종이 조각들의 변위를 명확하고 사실적으로 측정할 수 있었다. 변위는 약 2.5미터 정도였고, 그때 나는 이 정도의폭풍이면 TNT 1만 톤의 폭발 위력에 해당한다고 추산2했다.

 

 


< 이분은 Brain의 저주에서 벗어나셨군요 >

이와 관련된 책으로 '지두력' 이라는 것이 있더군요. 한번 찾아서 읽어 보아야 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게스티메이션이 정말 쓰이냐구요? 물론이죠.. 당장 내일까지 풀어야 하는 이슈 중 하나가 -약간 바꿔 말하면- '멘토1인이 지도가능한 조직원의 규모' 를 산출하는 것인데 저 위의 문제와 다름 없습니다. 처음부터 기존의 Practice를 보는것이 아니라 게스티메이션을 먼저 하고 각 부분에 대한 추정의 근거를 찾게 되는 것이죠.


페르미라는 분은 Wiki 백과에 따르면


엔리코 페르미(이탈리아어: Enrico Fermi, 1901년 9월 29일~1954년 11월 28일)은 이탈리아미국물리학자이다. 20세기 이후의 물리학자로서는 드물게, 실험과 이론 양쪽 방면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938년의 노벨상 수상후 그대로 미국에 망명했다. 미국으로 이주 후 1939년 곧바로 컬럼비아 대학교의 물리학 교수가 되었다.


대단한 분이시죠 ^^. 하지만 능력의 대단함 보다 열정의 대단함에 정말 존경할 수 밖에 없습니다.


1954년 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링거의 물방울이 떨어지는 간격을 측정해 유속을 산출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갖고 태어난 이 분은 분명 한 평생 즐거운 삶을 살았겠지요.


*영문 위키에 가니 페르미 추정이 소개 되어 있군요 (클릭)


 재미있는 에피소드들 -

 

 

어떤 한 강연장에서


 

강연자 : 주절주절

페르미 : 요새 젊은 물리학자들 강연은 너무 어려운걸 해서 무슨소린지 도통 모르겠단 말야.

강연자 : ...여기까지가 페르미 박사의 베타붕괴 이론입니다.

페르미 : -_-;;;


 

주) 페르미는 천재였으나 일찍 노망이 들었다고 전해진다.

소립자의 종류가 3개가 아닌 원자의 종류 이상으로 많은 것이 알려지자


 

페르미 : 이럴줄 알았으면 아버지 따라 푸줏간 주인이나 하는건데.

제자들 : -_-;;

제자 : 소립자의 종류를 좀 불러주십시오.

 

페르미 : 그런걸 기억할만큼 내가 머리가 좋았으면 식물학자를 하고 있었겠지...


페르미, 듀폰의 중역들을 모아 놓고 핵분열 연쇄 반응을 증명하는 실험을 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긴장한 가운데 원자로의 제어봉을 꺼내며 실험을 실행하고 있었다. 이 원자로의 제어봉을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연쇄반응의 개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는 긴장의 정도를 넘어서 불안의 경지에 이르렀고 모두들 숨죽여 그 장면을 목격하고 있었다. 마침내 한계에 도달한 원자로에서 연쇄반응이 일어나는 찰나였다. 갑자기 페르미가 손을 들어 실험 정지를 명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의아심과 불안이 엇갈린 가운데 페르미를 쳐다보았는데 그때 페르미가 한말은 아직도 역사에 남아있다고 한다.


 

페르미 : 12시입니다. 밥먹으러 갑시다.
중역들 :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