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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기나는방/드라마·영화

[영화] 이동진 리뷰- ‘전우치’-한국 대중영화의 보폭

[리뷰] ‘전우치’-한국 대중영화의 보폭
| 기사입력 2009-12-16 14:05




[이동진닷컴] (글=이동진) ‘전우치’(12월23일 개봉)는 올 초부터 ‘2009년 가장 기대되는 한국영화’로 줄곧 손꼽혀왔다. 멋진 대중영화 ‘타짜’와 ‘범죄의 재구성’을 통해 큰 사랑을 받아온 최동훈 감독의 세번째 영화를 기다리던 팬들은 조선시대와 현대를 넘나드는 대작으로서의 규모와 강동원 김윤석 임수정 유해진 백윤식 등을 아우르는 호화 캐스팅 소식에 더욱 몸이 달았다. 그 영화 ‘전우치’가 12월14일 기자시사회를 통해 처음 공개됐다.

천관대사(백윤식)의 제자인 전우치(강동원)는 자신의 개 초랭이(유해진)와 함께 누명을 쓴 채 그림 족자 속에 갇힌다. 인간들 속에 섞여 살던 신선들은 요괴들이 날뛰자 이를 제압하기 위해 전우치를 그림 바깥으로 500년만에 불러낸다. 요괴들을 다스릴 수 있는 피리를 천관대사와 나눠가졌던 화담(김윤석)도 현대로 온다.

‘전우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차별화되는 영화 오락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박수를 받을 만하다. 조선시대의 고전소설 ‘전우치전’에서 캐릭터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핵심 모티브에서 볼거리와 웃음의 스타일까지도 동양적이다. 이 영화에는 ‘유머’라는 용어보다 ‘익살’이란 단어가, ‘능숙하다’는 말보다 ‘넉살좋다’는 표현이, ‘속임수’보다는 ‘딴청’이, ‘여유’보다는 ‘능청’이, ‘마법’보다는 ‘도술’이, ‘해프닝’보다는 ‘난장’이 훨씬 더 잘 어울린다.

물론 그런 느낌을 만들어내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전우치라는 캐릭터 자체다. 유들유들하고 승부욕이 강하며 동시에 바람둥이이기도 한 이 사랑스러운 영웅을 통해 아마도 감독은 ‘한국적인 제임스 본드’를 만들어내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극중 전우치는 제임스 본드처럼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입밖에 내길 즐긴다.) 동시에 이 인물은 선에 대한 신념보다는 최고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이 더 크다는 점에서 지극히 최동훈적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 수시로 출몰하는 요괴들이 힘을 과시하는 직선적 액션을 펼치는데 비해서, 주인공 전우치가 부드럽고 곡선적인 동작으로 맞서는 것도 눈길을 끈다. 둔갑술에서 분신술까지 전우치의 도술에 대한 찰기있는 묘사들도 인상적이다. 12지신상에서 모티브를 따온 듯한 요괴들 모습에서 어색한 측면이 전혀 없지 않지만, 정교함보다는 참신함이 더 중요한 이 영화의 특수효과는 작품의 성향과 무난하게 어울리기에 충분히 즐길 만하다. 지면 위 수평으로 담장을 타면서 펼치는 싸움이나 수직의 스릴을 잘 활용하는 갖가지 액션 아이디어들도 좋은 편이다.

서사에 확고한 기둥 하나를 세우는 대신 동그랗게 말아서 이야기를 이리저리 굴리는 식의 이 영화 내러티브가 몽환성을 중심 모티브로 추구하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 눈속임을 핵심으로 하는 전우치의 도술 내용과 기시감을 적극 내세우는 종반부 장면으로부터, 광고판이나 그림에서 인물이 튀어나오도록 하는 설정과 싸움 도중 공격을 받은 캐릭터들이 허공에 포말이나 조각으로 사그라드는 세부 묘사까지, 결국 ‘전우치’는 삶을 꿈과 겹쳐서 보려는 영화다. 클라이맥스 액션 장면이 펼쳐지는 장소가 영화 세트장이라는 사실까지 확인하고나면, 이건 영화라는 매체 고유의 환영성(幻影性)에 대해 언급하는 작품으로 보이기도 한다.

‘전우치’는 매우 운문적인 영화다. 특히 전반부에서 끊임없이 빠르게 이어지는 대사들은 어지러울 정도로 잘게 나눈 쇼트들 사이를 연결하는 편집 테크닉처럼 느껴지게까지 한다. 이 영화의 대사들은 종종 그 의미보다 리듬이 더 중요하다. 최고의 대사감각을 가진 최동훈 감독답게 곳곳에 매복하고 있다가 불쑥불쑥 튀어나와 콕콕 찌르는 그 대사들은 물론 내내 기발하고 재치가 넘친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에서 시간을 뛰어넘어 현대로 온 초랭이 지폐 속 세종대왕을 보면서 “낯 익네, 이 양반”이라고 내뱉을 때는 웃지 않을 재간이 없다.

그러나 ‘전우치’는 흥미진진한 미완성작 같다. 이 영화는 잔재미로 가득하지만 그것들을 단단히 지탱하는 굵은 동아줄이 없다. 때문에 ‘전우치’가 제공하는 오락은 지속적으로 분해되거나 환원된다. 이를 테면 이 영화는 부분의 합이 전체보다 작은 경우다.

초반부터 속력을 내며 만들어낸 리듬을 2시간16분에 달하는 러닝 타임 내내 이어가기엔 힘에 부쳐 보인다. 긴장감이 약하고 반복적인 내러티브는 결국 어느 순간부터 관객이 그때그때 펼쳐지는 코미디와 볼거리에만 몰두하게 할 뿐 이야기 진행 자체에 관심을 잃게 만든다. 신(Scene)의 내부에서는 충분히 성공적이지만, 신과 신의 관계에서까지 그런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최동훈 감독의 뛰어난 재능이 지닌 방향과 이 프로젝트가 근본적으로 지향하는 속성이 일치하는 경우였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의 여지가 있다.

‘범죄의 재구성’과 ‘타짜’를 통해 배우들과의 인상적인 협업을 보여줬던 최동훈 감독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진 못했다. 시종 반 박자 빠르게 커팅을 하고 쇼트의 평균 지속시간을 대폭 줄이는 이 영화의 현란한 스타일은 연기의 감성이나 리듬보다는 다른 쪽에 관심을 기울이게 한다는 점에서 배우들의 표현력을 제한하는 역할을 한다. 뛰어난 배우들인 김윤석과 백윤식이 따지고 보면 ‘타짜’에서와 흡사한 기능을 수행하는 캐릭터를 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감이 훨씬 더 약하다는 것은 단지 이 영화가 볼거리에 신경쓰는 블록버스터이기 때문인 것만은 아니다. (후반부에서 화담이 내뱉는 염세적인 대사들의 울림이 적은 것도 이 영화의 이야기가 관객을 온전히 설득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전우치 캐릭터는 매우 성공적이다. 어디에 빛을 쏘여야 할지를 잘 아는 감독과 어디서 빛나야 할지를 명확히 느끼고 있는 배우의 상승작용 덕분이다. 여기서 강동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맡은 캐릭터에 대해 확고히 감을 잡고 자신감 넘치게 연기한다. 유달리 와이어 액션이 많은 이 작품에서 그는 얼굴 못지 않게 팔과 다리로 우아하고 부드럽게 연기한다.  

그리고 ‘전우치’는 무엇보다 신선하다. 게다가 이 작품이 제공하는 다양하고도 새로운 오락은 그 양에서 일반적인 충무로 영화 두세편에 담긴 분량을 능가한다. 최동훈 감독은 익히 검증된 안전한 길을 버리고 장르의 안개 속으로 뛰어들어 사투를 벌인 끝에 의미있는 성과를 냈다. 아울러 한국의 대중영화는 그렇게 또 한 걸음 보폭을 넓혔다.

출처: 이동진의 영화풍경